63화
“모용세가의 가주가 병환으로 자리보전한 지 2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세간에는 지병이 원인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독에 중독되었다는 소문도 알음알음 퍼지지 않았습니까.”
“네, 맞아요. 아무리 캐도 원인을 아는 의원이 없기에 중원에 알려지지 않은 신강의 독이 아닐까 했는데요.”
“둘 다 맞습니다. 모용정의 몸에 파문을 그린 것은 독이고, 그로 인해 내장 간의 균형이 깨져 합병증이 생겼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악화된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일 년도 못 가 세상을 뜰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연지를 바른 희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초윤은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말했다.
“붉은색, 노란색, 녹색 끈을 묶어 둔 이 세 줄의 병은 모용정을 낫게 할 약입니다. 먼저 붉은 끈의 약으로 독기를 지운 뒤 노란 끈의 약으로 내장의 기능을 수복하고, 마지막으로 녹색 끈의 약을 쓰면 다시 균형이 맞아 건강을 되찾을 것입니다.”
“……세상에, 모용 가주를 삼도천에서 건져 올 수 있는 약이라는 건가요?”
“예. 다만 이미 큰 화를 입은 몸은 온전한 이전으로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남은 수명도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텐데, 이를 억지로 늘리기 위해 영약을 쓰면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독한 약을 소화하기 위해선 몸도 강고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지요…….”
“정확한 복용법은 서면으로 첨부해 두었습니다.”
초윤이 덧붙였다.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선물을 받게 된 희는 황망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갈팡질팡 시선을 옮기다 초윤이 언급하지 않은 마지막 줄의 병을 보았다. 나무 함의 오른쪽에는 파란 매듭 끈을 목에 두른 다섯 개의 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것은, 이것은 무엇인가요? 이것도 제게 주시는 건가요?”
“아, 이것은…….”
초윤이 뜸을 들이며 손톱 끝으로 병의 오돌토돌한 표면을 살짝 긁어 내렸다. 희는 답지 않게 마른침을 삼키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초윤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희의 예상을 초월하다 못해 희가 파악한 무림의 정세를 단번에 뒤엎었다.
“이것은 모용정의 장자, 모용단의 뇌에 있는 고독을 죽이는 약입니다. 일주일에 한 병씩 마시게 한다면 어떠한 후유증이나 부작용 없이 고독을 없앨 수 있을 겁니다.”
“모용단이라면…… 칠성검이 맞나요? 칠성검의 뇌에 고독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아직은 손톱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라서 두통을 유발하는 정도겠지만, 내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모용단은 우수하고 영리한 청년이니 일찍이 전초제근하여 문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십시오.”
희는 눈을 약병에 고정한 채 양손을 깍지 끼고 생각에 잠겼다. 찌푸린 아미와 살짝 어그러진 입술이 서시처럼 고운 모습이었지만 정작 머릿속은 약삭빠른 궁리를 하느라 바빴다.
곧, 희는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를 말했다.
“모용정은 겉으로 보이는 증세가 확실하고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약을 가져다주면 당장이라도 먹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모용단은 아니에요. 그가 두통을 앓은 지는 꽤 오래됐는데, 원인이 고독임을 알아낸 자는 아무도 없어요. 아마 약선 대협 정도의 능력을 갖춘 의원이 아니라면 절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한 수법인 것이겠지요.”
“…….”
“문제는……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거예요. 아니, 눈에 보여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자가 태반이에요. 죽은 고독의 시체가 모용단의 입 밖으로 톡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오히려 독약을 먹였다는 말이 나돌 게 분명해요.”
모용세가는 청렴하고 담백한 성향의 집단이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세력 다툼에 얼굴을 비치진 않지만, 정도를 심하게 엇나가면 어느샌가 가슴을 파고드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남궁세가의 패악질이 하늘을 찔러도 백협맹을 끝내 전부 집어삼키지 못한 이유가 바로 모용세가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주인 모용정이 정체 모를 독에 당해 앓아누운 지 2년이 지나자 모용세가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나마 모용정의 장자 모용단이 어머니인 여장원과 함께 세가를 꽉 잡고 있어 휘청거리는 꼴은 면한 셈이었다.
그렇게 세가의 거의 모든 권력이 전부 모용단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그에게 갑자기 고독과 약선을 운운하며 다섯 병이나 되는 약을 먹인다?
하오문이 요녕 땅에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했다.
최소한 약선이나 약선에 버금가는 의원이 요녕성까지 동행해서 고독을 증명해 주지 않는 이상 이건 빛 좋은 개살구다. 고독이 기승을 부릴 때까지 기다리면 모용단이라는 ‘사람’은 살릴 수 있어도 ‘재능’은 온존할 수 없다. 벌레가 몸부림을 치며 헤집어 둔 뇌가 멀쩡하게 남을 리 없으니까.
결론을 내린 희가 미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파란 매듭 끈의 병을 보았다. 모용정을 살릴 수 있는 약으로도 충분한 값이 되었지만 이것은…… 놓치자니 너무나도 아쉽고, 가지자니 어떻게 쓸 방법이 없어 욕심만 나는 물건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언제나 평화로운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처럼 분란의 원인이 되어 버리곤 한다.
그때,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 희의 반응을 지켜보던 초윤이 대뜸 물었다.
“모용세가의 막내 공자가…… 올해로 몇 살이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모용서 말씀이신가요? 그 개구쟁이 도련님이라면 아마 여섯 살일 거예요. 섣달그믐의 이레 전에 태어났다고 했으니 생일이 되려면 아직 몇 달이 남았지요.”
“만일 모용서가 그날을 기점으로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행동한다면, 혹은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다닌다면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영문 모를 소리는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것 같은데. 희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에 늘어트린 장신구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초윤은 그에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아마 그쪽에서 먼저 문주님께 고독을 죽일 약을 찾아 달라며 전갈을 보낼 겁니다. 문주님께서는 그 전에 모용정을 살리고, 모용서와 더욱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두시면 됩니다.”
“……조금 이해가 안 가네요. 모용서는 자신의 형이 고독에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은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알 겁니다. 의학을 배운 적도 없고, 가진 무공 실력이 미흡해도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초윤은 기묘하게 자신감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만큼은 소설 빙의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알지 못할 사실이었다.
‘모용서가 7살이 되는 순간부터 원작이 시작되니까, 그 몸에 있는 건 서른을 넘어 죽은 모용서지.’
이 세계를 이루는 근간인 원작 〈귀환영웅〉의 장르는 바로 무협 회귀물이었다.
◇
그렇게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형님? 형님이 맞으십니까?”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진정하십시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멸문을 당하기 2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어린아이였을 때로 돌아왔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지키겠다. 아무도 잃지 않겠다. 내 사람을 건드리려는 자들은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신물의 힘으로 회귀한 모용세가 막내 공자의 무림 일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