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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64)화 (64/257)

64화

“만일 모용서가 그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한 가지를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초윤은 이 세계가 〈귀환영웅〉 속 ‘회귀하기 이전의 세계’였을 경우를 대비해 약을 좀 더 쳐 놓기로 했다. 여전히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던 희는 금세 초윤의 말에 집중했다.

진짜 미안하다, 주인공아. 한 번만 너를 좀 팔게. 근데 너한테 그렇게 나쁜 건 아닐 테니까…… 아마도.

대신 〈귀환영웅〉 본편에서 못 살렸던 너희 아버지도 살려 주려고 하잖아? 그러니 나중에 세상이 바뀐 원흉이 나라는 걸 알게 되어도 좀 봐주라.

초윤은 속으로 아직 만나지 못한 주인공에게 변명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쯤 모용세가가 주도하여 요녕에서 찾아낸 신물의 적합자를 찾고 있을 겁니다. 맞습니까.”

“아, 그것도 알고 계시군요! 맞아요. 모용, 개방, 아미, 하북, 소림이 다 함께 준비를 하고 있어요. 너무 주의를 기울인 탓에 도리어 허술한 것 같아서 제가 조금씩 돕고 있고요.”

“모용서가 바로 그 신물에 적합한 인재입니다. 지금은 몰락한 지 오래지만 신물을 만든 집안의 핏줄이 모용서의 어머니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헉!”

희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히끅! 확실히 모용서는 모용정이 바깥에서 낳아 온 자식이라고, 히끅, 들었어요. 그 어머니가 죽으면서 모용세가에 들어와 산다고 했는데, 히끅, 설마 그럴 줄이야……. 아우, 죄송해요. 간만에 굉장히 놀랐네요.”

“쉬엄쉬엄 답하십시오. 아마 모용세가에서도 조만간 이를 알아차릴 겁니다. 하지만 신물이 정확히 어떠한 능력을 가진 것인지 밝히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테니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한 가지입니다.”

앞에 놓인 찻잔을 황급히 들고는 숨을 참아 가며 꼴깍꼴깍 마신 희가 서둘러 자세를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서가 바뀌든, 바뀌지 않든 그의 인생에 고난을 안겨 주지 마십시오. 그가 바뀐다면 이미 큰 동기를 갖고 있을 테니 굳이 부여하실 필요가 없고, 바뀌지 않는다면 문주님께 사나운 복수심을 품게 될 겁니다.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자랄 인물이니 일찍이 아군으로서 은혜를 입히십시오.”

봐라, 주인공아. 내가 네 앞길에 꽃을 깔아 주기 위해 이렇게 노력한다. 원작에서 영웅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는 너를 담금질해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답시고 스토리 초중반의 위기를 만들어 주던 중간 흑막 희까지 회유했다. 쾌적하게 레벨 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줬다고.

이쯤 했으니 더 이상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우그러트린 일에 대해 엄청 미안해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히려 이대로 차곡차곡 잘 크면 해피 엔딩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사파를 통일하는 사상 최악의 마교 교주도 교화 중이지, 아버지의 죽음도 안 겪지, 형도 멀쩡하지, 뭐 일이 터질 계기가 없었다. 발굴된 후기지수들과 함께 부패한 무림에 혁명을 불러일으켜도 순조롭게 마무리될 것 같았다.

“확실히…… 이 정도의 정보라면 무리할 가치가 있어요. 잘하면 미래의 영웅과 칠성검을 함께 얻게 되겠네요. 제 하기 나름이겠지만요.”

손끝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리던 희는 이윽고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용정을 치료할 수 있는 약만으로도 보수는 차고 넘치는 격이지만 감사히 받을게요. 아직 미욱한 탓에 잘 모르겠지만, 약선 대협께 분명 큰 뜻이 있어 제게 이런 천기를 알려 주신 것이겠지요.”

“…….”

큰 뜻은커녕 아이들이 잘 대접받으면서 자랐으면 좋겠다는 욕심 때문에 몇백 화에 달하는 앞으로의 전개를 죄다 말아먹은 초윤은 찔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희는 한차례 흡족하게 웃은 뒤 다과 상 아래에서 동그란 은반을 꺼냈다. 그 위에는 금색 열쇠, 붉은색 옥패, 비단으로 만든 향낭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저도 약소하지만 드리고 싶은 게 있어 준비했어요.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 주셨으면 해요.”

뭐야. 이러면 결국 원점 아닌가? 초윤은 살짝 긴장하며 은반을 보았다. 표면에 금을 바른 열쇠는 섬세한 세공이 되어 있었고, 붉은 옥패는 자세히 보니 산호를 통째로 깎아 모란 모양을 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향낭의 특이한 향이 신경 쓰였다.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맡고 있었지만 희가 새로운 향을 피웠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중원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준비했다는데 그게 보통 물건일까. 산을 내려온 이래로 계속 얼토당토않은 일에 휘말리고 있는 초윤은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가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희는 그런 초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쇠부터 들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것은 중원의 곳곳에 있는 제 별저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예요. 저는 광동성에서 잘 나오지 않아 대체로 비어 있을 거예요. 번화가 가까이의 부촌이라면 한 채씩 사서 쟁여 두었으니 혹시라도 다음번에 하산하실 일이 생긴다면 객잔에서 머물지 마시고 꼭 제 별저를 찾아가서 마음껏 이용해 주세요. 이 열쇠와 같은 무늬의 자물쇠를 대문에 채워 둔 집이에요.”

“…….”

아이들을 데리고 방음도 별로 좋지 않은 객잔에서 묵는 기분이 썩 좋진 않았던 초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만 되면 술에 취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위층까지 올라오는 환경이 아이들의 휴식에 그리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별저마다 배치되어 있는 하인도 있고 파발 또한 쓸 수 있으니 편히 써 달라는 말을 종알종알 늘어놓은 희는 다음으로 붉은 산호 모란패를 들어 올렸다. 금사를 아낌없이 써서 만든 금술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하오문에 속한 모든 은장(銀場)과 표국에서 사용하실 수 있는 물건인데…… 혹시 서안에 있는 모란 표국을 아시나요?”

“예, 압니다.”

모란 표국이라면 두망산과 가까운 도시인 섬서성의 서안에서 번성한 곳이었다. 약을 팔고 쌀을 사러 도심으로 내려갈 때마다 붉은 옷을 맞춰 입은 표사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모란 표국은 저희 하오문에 속한 표국 중 진령 산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 임 소저와 임 소협이 약선 대협께 서신을 쓴다면 가장 빠른 천급(天級)으로 서안의 모란 표국에 전달할 생각이에요. 이 패를 가지고 내려와서 보여 주시기만 한다면 서신을 쉽게 받으실 수도, 보내실 수도 있을 거예요. 아무런 수수료 없이요!”

희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덧붙였다.

“특급의 표사를 전담으로 붙여 놓으면 광동, 호남, 장강, 호북을 넘어 섬서까지 도착하는 데에 아무리 늦어도 스무 날밖에 안 걸리겠네요.”

흐뭇하게 웃는 희를 보고, 초윤은 속으로 굉장히 감동받았다. 너무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한국의 무협지, 다시 말해 제대로 고증되지 않은 동양적 판타지가 섞인 고대 시대의 세계관은 현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교통과 통신이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정리된 길은 번화가에서나 볼 수 있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산을 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으며 무엇보다 도시 하나의 크기가 거의 나라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멀리 가지 않고 당장 이 사천 지역만 하더라도 과거에 ‘촉나라’였을 정도로 광활했다.

즉 무협지 속의 사람들은 무공을 배우지 않는 이상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현대의 우체국과 비슷한 업무를 하는 표국의 표사 정도는 되어야 새 땅을 밟을 엄두를 내 볼 수 있었다.

초윤이 난위정을 처음 만났을 때 ‘사천에서 섬서까지 왔다’는 말을 듣고 정말 절박했구나 싶어 마음을 썼던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내륙에 있는 두망산과 한참 떨어진 바닷가의 광동성에 아이들을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초윤은 아이들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을 기대는 일찍이 버렸다. 천오를 데리고 있는 이상 아이들을 확인하기 위해 빈번히 들락날락거릴 수도 없어 일 년에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20일마다 아이들에게 연락을 하고 받을 수 있는 통신 수단이 생겨 버렸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은장의 돈을 제 것처럼 꺼내 쓸 수 있다는 부연 설명보다도 이게 더 좋았다. 희를 향한 호감이 갑자기 치솟기 시작했다. 초윤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와.”

그런데 희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감탄사에 시선을 들어 그를 보자, 희는 아랫입술에 손끝을 얹은 채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었다. 초윤은 ‘초윤’이 감사를 표하는 게 그렇게 놀랄 만큼 드문 일인가 싶어 눈만 끔뻑거렸다.

“대협의 소태(笑態)를 보게 되다니 영광이에요. 후후, 임 소저와 임 소협은 정말 좋겠네요. 자, 마지막으로는 이 향낭이에요. 이것의 기능은 사실 모란패와 비슷해요.”

“……예.”

소태면, 웃는다고? 내가 웃었다고?

초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제 뺨을 살짝 매만졌다. 목석같이 무표정한 입가는 평소와 비슷했다.

언제 웃었다는 거지. 고민하는 사이에 주제는 휙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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