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말동무를 해 드린다 했지만…… 스승의 성격상 속내를 먼저 말로 꺼내실 분은 아닌데.
천오가 고민하는 사이 초윤이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객잔에서 본 사람들과는 다르게 스승의 모습은 제례를 올리는 것처럼 단정하고 정결하기 짝이 없었다. 천오는 스승의 내리깐 눈이나 잔을 든 손끝, 곧은 자세 같은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물었다.
“향기가 참 좋습니다. 약재로 담그신 겁니까?”
입 밖으로 내고서야 알았다. 저번에 말한 것과 똑같은 것 아닌가!
매번 향기가 좋다는 말만 하다니, 사저와는 다르게 제겐 말주변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말동무인 듯했다.
허벅지 위에 올린 손만 모아 잡고 있을 때, 돌연 스승이 반상 너머에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멀거니 고개를 든 천오의 코끝을 검지로 콕 눌렀다.
“특이한 향을 다 좋아하는구나. 계화유는 그렇다 쳐도 두충주는 약 냄새가 강할 텐데.”
“……특이하지 않습니다. 스승님께 항상 나는 향입니다.”
초윤이 손을 거두자 천오는 손등으로 제 코끝을 문질렀다. 오늘따라 분위기가 다른 듯했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어쩐지 어색한 천오의 반응을 뒤로하고, 초윤은 술이 자작하게 남은 잔을 들어 맡아 보라는 듯 천오에게 내밀었다.
“두충주다. 두충나무의 껍질로 담근 술이지. 혈맥과 관절을 보하고 통증과 혈압은 낮춘다. 슬통, 요통에도 좋고 이뇨제와 자양 강장제로도 쓰이니 기억해 두거라. 술로 담글 때는 반드시 잘게 썰고 한 번 볶아서 껍질에 있는 흰 실을 녹여 주어야 한다.”
“예, 스승님.”
“그런 뒤 반년이 지나면 약으로 마실 수 있다. 적정량은 하루에 한 잔이다. 술로 담그지 않은 두충의 맛과 향은 내일 알려 주겠다.”
천오는 스승이 알려 주는 지식을 빠짐없이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짤막한 약재 이야기가 끝나자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창 틈새로 들어오는 밤바람에 작게 켜 둔 호롱불이 일렁이며 스승의 얼굴에 그림자를 지게 하는 동안 천오는 여기서 말을 거는 게 실례인지, 아니면 조용히 있는 게 더 실례인지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잔을 한 번 더 비운 초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천오 너는…….”
“예?”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예?”
“커서 되고 싶은 것 말이다.”
스승의 질문은 꽤 뜸을 들인 것치곤 굉장히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문제에 천오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복수였다. 천오는 서문세가를 파멸에 몰아넣은 백협맹의 주축을 무너트릴 의무가 있었다. 아직 요원하긴 했지만 스승께서 단언하신 이상 10년 후의, 20년 후의 자신은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시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승은 천오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은 다르다. 네 양친과 집안의 복수를 하는 것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일이지, 네 평생의 목표나 직업이 될 순 없지 않느냐.”
“그건…….”
과연 그럴까?
혼자 숨어 살아남은 주제에, 복수 이외의 것을 내 인생의 목표로 삼고 바라는 대로 살아가도 되는 걸까?
물론 스승의 말씀에는 한 치의 틀림도 없겠지만 믿음과는 별개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처럼 되고 싶은 것이 되어 살아가는 제 모습이 막막한 이상으로만 느껴진다.
말동무가 되어 드리고 싶었는데 어째 의도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천오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찰나, 초윤이 반상을 옆으로 밀고 무릎 위에 주먹을 쥐고 있던 천오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었다.
“내가 너무 쉽게 말을 했구나. 미안하다.”
“예? 아니요, 아닙니다.”
“아니, 내 실수가 맞다. 네게 무엇보다도 막중하고 중요할 일을 쉽게 떨쳐 낼 수 있는 것처럼 치부해 버렸다.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다오.”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천오의 목소리는 쥐구멍에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작고 여렸다. 스승의 미지근한 체온에 복잡하던 마음이 점차 차분해졌다.
초윤은 그에 그치지 않고 꿇어앉았던 자세를 책상다리로 바꾼 뒤 천오를 데려와 한쪽 무릎에 앉혔다. 약주를 더 하지 않으셔도 괜찮은 건지, 역시 자신은 방해만 된 게 아닌지 걱정하던 천오는 아차 하는 사이에 스승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한쪽 팔로 등을 받쳐 준 초윤은 주먹 쥔 천오의 손을 엄지로 밀어 풀고 손바닥에 난 손톱자국을 문질러 주며 조용히 말했다.
“네 모친이나 조부모라면 네가 어떻게 하기를 바랄 것이라는 둥, 진정한 복수는 네가 보란 듯이 잘 사는 것이라는 둥 뭣 모르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이는 네게 아주 중한 사안이고, 또 너 스스로 선택해야만 의미가 있으니까.”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훗날 네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주는 것뿐이겠지. 매정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네가 바라지 않는 이상 네 길에 간섭하지 않겠다. 아마 네게는 내 조언도, 도움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저 말은 무슨 뜻일까. 천오는 스승이 잡아 준 제 손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사저와 사형과는 다르게 자신은 하산을 하면 스승의 조력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일까. 복수를 시작하면 스승은 더 이상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걸까.
왜…… 당신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인가.
덜컥 겁이 났다. 스승의 말은 항상 한마디 한마디가 큰 뜻을 품고 있어 속내를 깊숙이 파헤치거나 진가가 드러나길 기다리다 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승의 말투가 여느 때와 같이 지나치게 담담하고 진솔해 숨긴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았으며, 때를 기다리기엔 마음이 조급했다.
초윤이 아이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타래가 천오의 어깨와 뒷목에 닿았다. 가까워진 약 향에 숨을 들이켠 아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가까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햇볕 아래에서는 황금색으로, 나무 아래에서는 연갈색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꺼져 가는 호롱불과 어스름한 달빛 밑에서 보니 밤중의 호수 같았다.
“그러니 지금부터 할 말은 내 이기심이다.”
“……예, 스승님.”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어떠한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고,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았으면 한다.
심장에서 시작된 고동이 가슴 전체에 저릿하게 울렸다. 이 담백한 한마디로 스승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매정하기는 무슨, 스승은 늘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잘 바뀌지 않는 표정과 고저 없는 목소리에 불안해하는 건 이제껏 자신을 아껴 준 스승에 대한 실례였다.
이를 깨닫자 말로 형용키 어려운 감정이 전신에 번졌다. 스승과 맞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고,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천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몸만 조금 기울여 스승의 품에 툭 기댔다. 초윤은 그런 아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주며 말했다.
“가정을 달리해 보자꾸나. 배우고 싶은 일이 있느냐. 해 보고 싶은 일은 있고? 가 보고 싶은 곳은, 두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천오는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다가 한번 꾹 다문 뒤 명료하게 대답했다. 새까맣게 죽어 있던 두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스승님의 약학을 전부 배우고 싶습니다. 스승님의 무공까지 다 배운 뒤, 무림의 제일가는 실력자가 되어 오래오래 스승님과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 홀로 유람하신 곳을 함께 돌아다녀 보고 싶고, 언젠가는 스승님과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하하, 그래.”
설마 방금 웃으신 건가?
천오는 번쩍 고개를 들려 했다. 하지만 스승의 손이 천오의 머리를 감싸고 품에 지그시 누른 탓에 일어나지 못했다. 하얀 무명옷 너머로 규칙적인 고동이 느껴졌다. 즐겁다는 듯 말하는 스승의 목소리 또한 천오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래, 전부 다 해 보자꾸나.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예, 스승님.”
결국 천오는 조그맣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응석이 심하다며 불쾌해하시는 것 같진 않았다. 곧 자신을 재우려는 건지 등을 둥글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천오는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무섭게만 들리던 바람 소리나 막막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이미 뇌리에서 사라졌다. 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안온해진 밤이었다.
<酒酊 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