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천오는 무심서의 뒷마당에 쿵 내려섰다. 들숨을 최대한 참으며 한계까지 경공을 전개해서 그런지 연파강까지 걸어갔던 시간의 반의반도 걸리지 않아 돌아올 수 있었다. 다리의 기맥이 터질 것 같고 숨도 가빴지만 지체할 순 없었다.
겅중겅중 뛰어 스승의 방으로 들어간 천오는 한쪽 벽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약재 서랍장을 거칠게 열었다. 스승이 말한 재료를 찾아 하나하나 탁자에 올려놓고 보니 종류가 곧 서른을 넘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무엇을 해야 하지.
천오는 불안한 마음에 장명쇄를 만지작거리며 좁은 방 안을 부산스레 서성거렸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서선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하나, 스승님은 누구보다도 약과 독에 탁월하신 분이다. 금방 오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저 믿고 기다려야 한다.
둘, 독은 하류로 흘러들어 갔고, 스승님은 이것으로 해독제를 만들어 산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거나 산과 강을 정화하실 것이다. 이 과정에 며칠은 거뜬히 걸릴 거라고 예상하셨으니 여관에서 머무르며 기다리라 말씀하셨겠지.
셋, 그렇다면 자신은 대략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스승님께서 약을 제조하시는 동안 산 밑의 마을로 달려가 강물을 쓰지 말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고, 하나는 며칠에 걸쳐 바깥에서 노고가 많으실 스승님을 위해 수발을 들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전자는 홀로 산을 누벼야 하니 스승님께서 돌아오신 뒤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후자밖에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이대로 가만히 스승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릴 순 없어. 언제나 우수한 제자가 되고 싶어 노력해 온 천오는 생각이 끝나자마자 방의 구석에 놓인 나무 궤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곱게 개어 놓은 스승의 옷을 안에서 꺼냈다.
‘물기를 날리시는 모습을 봤지만 한 번 젖었던 옷가지를 계속 입고 계시기엔 불편하실 수도 있다. 바로 갈아입으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강을 정화하시면서 몇 번 더 몸을 적시게 되실 수 있으니 여분의 옷과 수건을 챙겨야 한다. 그리고…….’
젖어서 들러붙던 옷. 반투명한 무명 너머 비치던 파리한 피부. 반듯한 어깨와 얇은 허리. 머리카락을 넘기자 드러난 단아한 목선. 처음으로 목도한 스승의 흐트러진 모습.
툭, 들고 있던 스승의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천오는 허둥지둥 옷을 주워 든 뒤 새것을 꺼냈다. 퍼뜩 떠오른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행동 하나하나가 삐거덕거렸다. 눈을 몇 번씩 감았다 떠도 머릿속에 스승의 뒷모습이 아른거렸고, 축축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하얀 손등이 보여 눈이 부셨다.
“…….”
습관적으로 궤짝을 닫은 천오의 움직임이 다시금 서서히 멈췄다. 허공에 고정된 눈은 멀거니 회상을 쫓았다. 바깥에서 새 울음소리가 때마침 들려오지 않았다면 한참 넋을 놓고 있을 뻔했다.
천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모를 좌절감에 시선을 밑으로 떨어트리고 나서야 자신의 가슴이 튀어나올 듯 활랑활랑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이상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기억을 계속해 떠올리는 것도,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을 졸이는 것도 전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비정상적이고 파렴치하며 배은망덕한…… 나쁜 짓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무심서의 풍경과 유리된 채 홀로 우두커니 선 천오는 쿵쿵 뛰는 심장 위를 한 손으로 문질렀다. 손끝은 차갑고 숨은 버거웠다. 산새와 풀벌레가 찌르르 울고, 물이 흐르는 개울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코끝에 느껴지는 산속 공기와 약 향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를 더욱 선명히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가를 떠나지 못하던 천오의 머릿속이 차츰차츰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올라갔다. 영특한 머리는 스승과 함께했던 모든 장면을 고스란히 토해 냈으나, 새까만 시선은 이전과 다른 곳을 탐욕스레 훑고 있었다.
자신의 요리를 먹기 위해 벌어지던 입술, 그 안으로 보이던 하얀 이와 습윤한 혀끝.
달빛 아래 자작을 하며 술잔을 쥐고 있던 단정한 손끝, 꿈결 같던 웃음소리.
불길을 등지고 선 그를 행복하게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던 심장의 고동과 짙은 약 향.
제 손길을 따라 이리 빗기고 저리 흐트러지던 하얀 머리카락, 맑은 계화유 향과 부드러운 옥음.
자신의 작은 손을 잡아 주던 하얀 손등, 고개를 들면 따라 마주치던 시선.
-어떠한 사실이든 내가 그렇게 알고 있기를 바란다면 믿어 주겠다.
-내가 너를 버리고 외면할 일은 없다.
빗발치는 소리가 가득했던 어둑한 동굴과 자애로운 눈. 발목을 통해 전해지던 미지근한 체온. 울며 불안해하던 아이를 달래 주던 차분한 말. 그리고…….
-적어도 세상의 모든 독을 이겨 낼 수 있게 해 줄 순 있지.
황금빛 햇살 아래 현명하게 빛나던 눈동자.
행여나 닳을까 무서워 가끔씩만 꺼내 보던 소중한 추억이,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쌓아 왔던 동경이 한순간 피어난 도착적인 욕망과 맞닿아 변질되기 시작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찬란하기만 했던 갈망에 시꺼먼 역청이 첩첩하게 발렸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겹겹이 감싼 것을 벗기고 싶다. 무엇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얼굴을 혼자서만 알고 싶다. 단정한 미간이 일그러지게 만들고 싶다. 온몸을 젖게 하고 싶다. 침범하고 싶다. 검게 물들이고 싶다. 망가트리고 싶다.
범람하는 사고를 멈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휘말린 끝에 남은 것은…….
……숨겨야만 하는 욕정뿐이다.
나쁜 짓, 나쁜 짓이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며 해서는 안 될 생각이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천오는 한 손으로 제 아랫배를 더듬었다. 이 안쪽이 꽈악 조이고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이, 애태우듯 간질거리고 피가 쏠리는 것이 정말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어 보는 천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며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머리가 마비된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문간에서 들려왔다.
“천오야, 무얼 하고 있느냐.”
“스, 스승님?”
다른 때였다면 반기다 못해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영문도 모르고 지레 겁을 먹은 천오는 뻣뻣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창백한 안색으로 문틀에 기대 서 있는 스승이 보였다. 단박에 정신이 들었다.
“스승님? 무슨,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것은 내가 물어야지. 왜 그리 앉아 있었느냐. 설마 이제 복통이 느껴지는 것이냐?”
몰염치한 상념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방 안을 가득 채운 스승의 향취가 느껴졌다. 평소처럼 오래 달인 약 향이 아닌, 짓이겨 즙을 낸 풀과 같은 향이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스승의 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천오는 실색한 얼굴로 스승에게 뛰듯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스승은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천오의 어깨를 잡아 의자에 밀어 앉히고 진맥을 했다.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찌하여 정신을 쏙 빼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느냐. 불러도 대답하지 않기에 네 탈을 쓴 요괴가 집에 들어온 줄 알았다.”
“그것이,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저는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습니다.”
혼을 쏙 빼놓은 채 대답하는 천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까이서 보니 스승은 정말 어딘가 아픈 것 같았다. 손끝은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며 구역질이 올라온다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무는 것을 보니 전형적인 중독 증상이었다.
설마 하는 가정이 떠오른 천오는 새하얗게 질린 채 자신을 잡은 스승의 손을 다급히 낚아챘다.
“스, 스승님. 설마 중독되신 겁니까? 아프신 겁니까? 손이 차고 입술은 보랏빛입니다. 그 짐조 때문입니까?”
“부산스럽게 굴지 말거라. 일시적인 현상이다.”
초윤이 천오의 걱정을 뚝 자르고 약재가 놓인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천오는 서슴없이 손을 뻗어 스승의 옷을 그러쥐고 제 쪽으로 당겼다.
“스승님, 불안합니다. 스승님의 존체가 이리 되신 모습은 처음 봅니다. 불경한 말이지만 잘못되실까 두렵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나 부디 조금만 더 알려 주십시오. 제발…….”
“…….”
안 그래도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러운 머릿속에 스승까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자 혼란이 정점을 찍었다. 스승의 상냥함에 어리광을 부리고,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에 혹시라도 자신을 귀찮고 성가시다는 눈으로 볼까 봐 무서워 고개를 들기도 어려웠다.
제 스승을 닮아 가듯 무표정했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낮고 잠잠하던 목소리도 갈팡질팡 흔들리며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하지만 손을 놓을 순 없었다. 애원을 멈출 수도 없었다.
순간, 머리 위에 가벼운 손길이 느껴졌다. 천오는 이를 악물며 양손에 꽉 힘을 주었다.
초윤은 천오의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은 뒤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말했듯이, 일시적인 현상이다. 짐조의 시체는 썩어 문드러져도 독을 내뿜을 게 분명하니 그대로 둘 수가 없어…….”
“…….”
“먹어 버렸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