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몸을 굳힌 천오가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나오려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아는지 모르는지, 스승은 지독하게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속이 불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천오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게…… 먹어도 되는 겁니까?”
“되니까 먹었지. 물론 너는 절대 이리하면 안 된다. 설령 수십 년 뒤 만독불침을 이룬다 해도 아무거나 덥석덥석 주워 먹으면 안 돼.”
“그런…….”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손아귀에서 스승의 손과 옷자락이 빠져나가는 것도 몰랐다. 제정신을 되찾았을 때 스승은 이미 제 앞을 벗어나 탁자에 나열해 놓은 약재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도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깃털은 태우고 지저분한 찌꺼기와 뼈는 묻었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으니 고도산도 그 정도는 원만히 해결하겠지.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도 곧 멀쩡해질 게다.”
“그렇지만…… 편찮아 보이십니다, 스승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회복하시는 동안 절대 요양이 필요하진 않습니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넌 준비하던 것을 마저 하거라.”
“스승님…….”
“급한 일을 해결한 뒤 설명할 테니 어서.”
저렇게 단언하시는데 또 억지를 부릴 순 없었다. 천오는 어쩔 수 없이 입술만 꾹 깨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배낭을 꺼내 스승의 옷과 면포를 차곡차곡 챙기고, 자신이 쓸 물건도 최소한으로 넣었다. 간식거리로 먹기 위해 만들어 둔 건량과 혹시 모를 상황에 쓸 여비를 포함해 이것저것 갖추고 나니 한 짐이 가득했다.
그동안 스승은 품에서 꺼낸 뿌리 식물 세 포기를 조합해 빠르게 조제를 시작했다. 말을 얹지 않아도 그것이 영험한 영약임을 알 수 있었다. 돌절구를 이용해 오래 갈아야 하는 약재들이 스승의 양 손바닥 사이에서 고운 가루가 되고, 그늘에 널어야 하는 날것의 약초들은 스승의 손이 스쳐 지나가자 단번에 바싹 말랐다.
스승은 가로세로 반 자 넓이의 면포 수십 장에 정확한 양으로 약재를 소분한 뒤 명주실로 꽁꽁 묶어 동그란 약낭(藥囊)을 만들며 입을 열었다.
“약장 옆에 있는 금(琴)을 가져오거라.”
준비를 다 마친 뒤 스승의 신기(神技)를 집어삼킬 듯 눈으로 탐하던 천오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재깍 약재 서랍장으로 다가가 먼지 쌓인 금을 들었다. 그러자 텅 비어 있어야 할 금의 안에서 무언가 덜거덕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약재 서랍장 옆에 비스듬히 놓인 칠현금은 무심서에서 처음 눈을 뜬 날부터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물건이었다. 소박한 방 안의 집기들과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목재가 쓰여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지만 스승이 이를 연주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칠현금은 그대로 방치되어 청소를 할 때나 잠시 깨끗해질 뿐 8년 내내 있으나 마나 한 소품이었다.
천오가 금을 들고 다가가 스승 앞에 놓자, 초윤이 말했다.
“머리 부분을 열어 보면 안에 검이 있을 것이다. 조심히 꺼내 보거라.”
천오는 약재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스승을 한 번, 그리고 칠현금을 한 번 본 뒤 금의 머리 부분을 살폈다. 듣고 보니 나무판에 작은 홈이 패어 있었다. 손톱을 넣어 뚜껑처럼 열어 보자, 칠현금 안쪽의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얀색 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어렸을 때 이후 한 번도 보여 주시지 않아 의아했는데, 이런 곳에 넣어 두셨던 겁니까?”
고동 밑의 검초를 잡고 조심스레 꺼내자 석 자 길이의 검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검집과 검 손잡이는 손에 착 감기는 하얀 가죽으로 감싸여 있었고, 물결무늬의 백옥과 은색 금속으로 간결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조그맣게 취우(翠雨)라는 글자가 음각된 검의 머리에는 백색 술이 매달려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어디 하나 삭은 부분이 없었다.
몇 년 전, 초윤이 천오에게 검무를 보여 주었을 때 들었던 검이었다.
미무, 일식, 그다음은 취우인가. 이름처럼 소나기구름이 연상되는 자태다.
천오는 잠시 상황을 잊고 감탄하며 스승의 검을 구경했다. 검법을 어느 정도 익힌 뒤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약낭 제작을 끝내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약을 꺼내 약함에 넣던 초윤이 물었다.
“네 손으로 직접 드는 건 처음인 것 같구나. 어떤 것 같으냐.”
“……손잡이를 이루는 백옥 때문인지 조금 무겁습니다. 하지만 균형이 아주 잘 잡혀 있어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가볍게 느껴질 듯합니다.”
“……맞다. 예리하진 않지만 쓸 만한 아이지.”
8년간 손질을 한 적이 없는데도 녹슨 내가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쓸 만한 수준을 넘어 명검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천오는 4년 전 마주쳤던 복면인들의 검을 빼앗은 것 이래로 진검을 마주한 적이 없었고, 삶의 기준은 모조리 스승에게 맞춰진 상태였다. 취우검을 보고 느낀 감상도 본능에 가까우니 스승이 그렇다 말하면 그런 것이었다.
가득 채운 약함을 등에 메고 수십 개의 약낭도 자루에 넣어 챙긴 초윤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요대를 꺼내 허리에 찼다. 그리고 천오에게서 검을 넘겨받아 요대의 왼쪽에 매달았다.
독공보다 먼저 검을 익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한 번도 스승의 무림인다운 차림을 본 적 없던 천오는 정신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갈 길이 바쁘다. 자세한 건 가면서 알려 줄 테니 바짝 따르거라.”
“예, 스승님.”
초윤이 천오를 스치고 지나가 바깥으로 나갔다. 천오는 허공에 하늘거리는 흰 머리카락에 잠시 시선을 주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 그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의 신형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
원익산의 새머리바위 위, 까딱하면 떨어져 죽을 높이에 태연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이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고, 눈 구멍도 없는 거친 자루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밧줄로 목을 감아 죄수 같은 행색을 한 여자였다.
손에도 가죽 장갑을 낀 탓에 겉으로 드러나는 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사람은 망망대해 같은 수림을 무료하게 지켜보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저기, 저거 아닙니까? 단장, 저기 말입니다.”
“뭐?”
비슷한 차림의 사람이 바위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단장이라고 불린 이는 후다닥 바위 위로 올라가 자루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명이네?”
“그러게요. 아무래도 그 제자인가 봅니다.”
“사천에는 세 명을 데리고 갔다 하지 않았어? 제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여?”
“어…… 사람같이 생겼습니다.”
“너는 여자 아니면 사람 취급도 안 하니까 꽤 잘생긴 남자애인가 보네. 큰누나 하나랑 남동생 둘이라고 했으니까 남동생 쪽인 것 같은데…… 몇 살로 보여?”
“열일곱 살 정도로 보입니다. 더 어리다면 굉장히 건장한 편일 겁니다. 경공을 보건대 무공의 기초가 아주 잘 닦여 있군요. 일류의 끝자락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약선이 검을 차고 있습니다.”
“뭐? 진짜?”
단장이 반색을 하며 여자의 말을 받아 적었다. 여자는 자신의 일을 끝냈다는 듯이 아슬아슬한 바위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말했다.
“근데 약선이 검을 찬 게 뭐가 중요한 겁니까? 무림인은 당연히 검을 쓰지 않습니까. 겨우 이걸 보기 위해서 광동성에서부터 그 고생을 하고 우리 애들을 다 녹여 가며 여기 온 겁니까?”
“아주 중요하지. 엄청 중요하지. 생각을 해 봐라, 계월아. 약선이 언제 마지막으로 검을 썼을 것 같냐?”
목소리만 들어도 단장이 희희낙락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계월이라고 불린 여자는 그다지 영특하지 못한 머리를 굴려 잠시 골똘히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어…… 이십 년?”
“막 던지지 말고, 이것아. 자그마치 백오십 년을 넘는다고. 정파 연합이 암존(暗尊)을 간신히 봉인한 뒤로 약선은 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하기야 진절머리가 날 만도 하지.”
단장은 전해 들었던 약선의 과거사에 가볍게 몰입해 쩝, 입맛을 다시곤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이후의 기록에 약선이 검을 차고 있었단 말은 없다고. 그런데 짐조의 시체를 없앤 뒤 갑자기 묻어 두었던 검을 다시 꺼냈어. 이게 뭔 뜻일 것 같아?”
“어…… 뭐, 뜻이 있겠습니까? 쓰고 싶으면 쓰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네가 단장이 못 되는 거야.”
단장은 여자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아 검지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은밀한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루 안쪽에서 능글맞게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이 보여, 계월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약선은 지금 독공을 못 쓴다는 거야. 아마 짐조를 처리하다가 중독됐겠지. 펄펄 나는 걸 보니 저 정도로 죽진 않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약선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봉인할 수 있단 거라고.”
“…….”
“독을 못 쓰는 약선은 상성만 잘 맞추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뭐, 짐조를 능가하는 독과 이를 먹여야 하는 어려움도 있고 막대한 전력 손실까지 감수해야겠지만 그래도 방법이 있다는 게 어디야. 현경의 고수인데.”
설명을 마친 단장은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울창하게 펼쳐진 산맥을 바라보며 허리에 양손을 턱 얹었다.
“자, 이제 짐 싸라! 이 짓도 끝이다. 여길 나가면 이제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산 쪽으로는 머리도 안 놓고 잘 거다! 다 챙겨! 특히 은폐기물(隱蔽奇物)은 하나도 빠트리면 안 돼. 그게 망가지면 그냥 죽는 거야. 알았어?”
“……예, 뭐.”
단장은 후련하게 말한 뒤 양팔을 앞뒤로 휘휘 휘두르며 내려갔다. 계월은 잠시 멍하니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짐조를 나르느라 한 줌 핏물이 된 단원들을 묻어 놓은 흙무덤이 바로 바위 밑에 있었다.
그래도 풍경은 좋으니까. 계월이 등을 돌리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