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너, 스승님께 딴마음 먹지 말고 지금처럼만 잘해.
사천에서 헤어지기 전날, 사영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전음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당시에는 사저가 말하는 딴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스승에게 그저 무한한 신뢰와 동경을 보내고 있었고, 정도가 과하다며 가끔 사저에게 잔소리를 들을지언정 이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어째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숨이 막히고 심장이 아파야만 하는가.
천오는 이리저리 뻗치는 생각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앞서 뛰어가는 등을 그저 쫓았다. 중독된 스승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졸이다가도 평온을 잃은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치밀었다. 그저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수련, 요리를 하고 수련, 공부를 하고 취침이었던 일상에 이렇게 몰아치는 혼란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풀거리는 옷자락과 휘날리는 흰 머리카락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때마다 정신이 아득했다. 달려가서 움켜쥐고 싶은 것을 이성이 간신히 억눌렀다. 스승님은 지금 편찮으시다, 상황이 급박하다, 뜬금없이 붙잡을 이유가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감정은 잘못됐다. 그러니까…… 나쁜 짓이다.
“천오야.”
“예?”
스승이 대뜸 천오를 부르며 부드럽게 멈춰 섰다. 찔리는 게 있어 덜컥 놀란 천오는 가속도를 받아 달음박질하던 몸에 급격히 제동을 걸어 스승의 곁에 다가갔다. 가만히 앞만 보는 스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다시 연파강에 도착해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느라 다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얼빠진 모습을 스승에게 고스란히 보여 드린 것도 부끄러웠다. 아, 짧게 침음을 내뱉고 눈을 내리깔며 입을 꾹 다물자 스승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곧 고개를 숙인 천오의 머리에 초윤의 손이 살며시 닿았다.
“서둘러 끝내고 돌아가자꾸나.”
“……예, 스승님.”
손길 한 번에 설운 감정이 녹아내리는 건 그저 당신이 대단해서일까.
초윤은 한결 누그러지고, 약간은 시무룩한 천오의 어깨를 한 번 꾹 짚은 뒤 강변으로 내려갔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스승의 뜻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천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초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검 손잡이를 몇 번 매만지던 초윤이 이윽고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맑고 서슬 퍼런 쇳소리가 천오에게도 들렸다. 초윤의 취우검은 지난 10년 가까이 한 번도 손질한 적이 없음에도 여전히 날이 선 채 깨끗하고 새하얀 검신을 뽐냈다.
어색한 듯이, 혹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을 되살리려는 것처럼 검파를 고쳐 잡은 초윤이 곧 강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첨예한 검 끝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흔들림 없는 일직선을 그렸다. 미무와 일식으로 나뉜 검법 중 기본에 해당하는 미무검의 제1초식, 운하수석비(雲霞收夕霏)였다.
분명 모든 움직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리다. 휘두르면서 힘을 얻는 검의 특성상 속도가 붙지 않으면 위력을 낼 수 없다고 배웠다. 특별한 패기나 압박감이 느껴지지도 않고, 공기를 베려는 것처럼 평이하다.
하지만 같은 동작을 수만 번 복습해 온 천오는 그 안에 녹아 있는 정적인 변화를 알아채고 단숨에 몰입했다.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검법의 끝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취우검에 하얀 안개 같은 검기가 서리고, 내쉰 숨결에는 형태 없는 기운이 일렁였다.
마침내 변하지 않는 지평선이 검 끝에서 완성되었을 때.
콰아아앙!
별안간 터진 굉음이 하늘을 찢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들자 강 한가운데가 치명적인 검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쭉 갈라진 채 솟구치고 있었다. 높게 솟아오른 강물이 장벽을 이루며 하늘을 가렸고, 주먹만 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며 무성한 나뭇잎을 때려 시끄러운 소란을 일으켰다.
그사이에 초윤은 자세를 가다듬더니 검을 길게 뻗어 둥그렇게 흔들다가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미무검의 제3초식 백운포유석(白雲抱幽石)과 제8초식 조산여화락(鳥散餘花落)의 혼합이었다.
스승이 체화한 검법의 묘리는 단정하고 담백했다. 산을 쓸어 버리고 바다를 가를 것 같은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데 모인 가랑비가 둑을 무너트리는 것처럼, 작은 땅울림이 산사태를 부르는 것처럼 자연과 일체한 검이 가져온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강의 밑바닥에서 용이 날아올랐다. 지름은 이 장, 길이는 강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닿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녹색 용이었다.
소용돌이 같은 초윤의 내공에 휩싸인 용은 오색구름을 몸에 두른 것처럼 보여 지독하게 상서로웠다. 스승에게 들은 것이 있어 채홍(彩虹)이란 그저 물 알갱이에 비친 햇빛이라는 것도 알았고, 진짜 용에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얼굴까지도 똑똑히 두 눈으로 목도했다. 그럼에도 천오에게 이 용 오름은 웅장하고 신비로운 장면으로 다가왔다.
하늘의 구름층을 뚫고 올라간 용은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던 강은 빠르게 잠잠해졌다. 천오는 뒤늦게 비처럼 내리는 강물에 얼굴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멀거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검을 늘어트리고 오연한 듯 서 있던 초윤이 한순간 앞으로 휘청거렸다.
“스승님!”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천오가 단걸음에 땅을 박차고 다가가 초윤을 지탱했다. 고꾸라지려던 몸을 끌어안자 초윤의 무릎이 힘을 잃고 픽 꺾였다. 천오는 스승과 함께 모래 바닥에 주저앉아 허둥지둥 그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보는 스승의 약한 모습에 발치가 젖는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스승님……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무심서로, 무심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쉬셔야 합니다. 정양하셔야 합니다.”
버석하게 마른 초윤의 입술은 그새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과 고통스러운 듯 찡그린 미간,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쿵쿵 뛰는 심박이 느껴졌다. 스승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천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됐다. 지금은 한시가 중하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린 초윤은 천오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만들어 온 약낭 너덧 개를 꺼내 둥그런 자갈에 휘휘 감아 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천오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려는 듯, 조금 까끌해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방금 네가 본 그것은 이 연파강의 바닥에 사는 인면수사다. 짐조를 삼키고 죽어 있더구나. 내장이 이미 독으로 전부 녹은 상태라, 그대로 놓아두면 계속 독기를 흘릴 것 같아 산 위로 보내 두었다. 내가 무슨 초식을 썼는지는 보았느냐.”
“……예, 전부 보았습니다.”
“지금은 본 것을 목표로 따르되, 벽을 한번 넘으면 너만의 절경을 찾아야 한다. 자연은 감상하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과 날씨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니 이를 모방한 초식 역시 모두에게 같지 않다.”
천오는 스승을 따라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처음으로 그 목소리의 내용이 와닿지 않았다. 천오의 머릿속은 오로지 스승의 용태로 가득했다. 얼마나 극악한 독이기에 따를 자 없는 스승을 이리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지 궁금했고, 저 몸이 또 언제 쓰러질지 몰라 불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강 밑에 사는 인간들의 안위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불우하게 죽는 일쯤이야 흔하디흔한데 편찮으신 몸을 이끌고 굳이 내려가야 하나 싶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저 허리를 낚아채 무심서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하지 않은 건 오로지 초윤이 학습시킨 ‘인정’ 때문이었다. 없던 인정이 생긴 것이 아니라, 스승에겐 인간답지 않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다는 일념이었다.
초윤이 잔잔해진 강의 이곳저곳에 약낭이 묶인 자갈을 던졌다. 약낭은 강의 바닥으로 저항 없이 가라앉았고, 초윤은 그를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강을 따라 내려가며 정화를 해야 한다. 다시 한번 달릴 수 있겠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허락만 받는다면 자신이 저 모든 약낭을 건네받아 정화 작업을 도맡아 하고 싶었다. 스승은 무심서에 모셔 놓고 해독제의 조제법을 전수받아 홀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 부족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그래, 도와주어서 고맙구나.”
때마침 솔바람 같은 스승의 한마디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다시금 자신을 다그치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도 초윤은 천오의 부정적 사고를 미연에 끊었고, 천오는 별안간 듣게 된 스승의 희귀한 표현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휙 멀어지는 등을 다급히 쫓았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잠깐씩 비치는 귀 끝과 목덜미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