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러니까…… 주인공이 회귀하기 전의 원래 세계에선 섬서성의 주민들이 짐조의 독을 먹고 죽었다는 거잖아. <귀환영웅> 본편에서도 주인공이 개입해 정화석을 곳곳에 넣어 두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죽었을 거고. 그런데…….’
독의 원인인 짐조의 시체는 불귀 산맥의 깊숙한 곳에 있었다. 불귀 산맥은 ‘약선 초윤’의 보금자리였고, ‘초윤’은 물에 섞인 희미한 독기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 명제가 알려 주는 사실은 하나밖에 없었다.
‘초윤!!! 뒷산의 강에 독 요괴가 빤히 가라앉아 있는데 건지지도 않은 거냐고!!!’
나도 밥 한 숟가락 떠먹고 알게 된 것을 진짜 ‘초윤’이 몰랐을 리가 없잖아! 요괴 헹군 물이 강 하류로 흘러 들어가면 막대한 인명 피해가 생길 게 분명한데 이걸 알면서도 가만히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거냐고!
급한 마음에 홀라당 날고기를 먹어 버린 나보단 더 괜찮은 선택을 할 수 있었잖아. 이백 년 넘게 살아서 신선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야 할 거 아냐!
하여간 운한산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알았지만 본래의 ‘초윤’은 정말 끔찍하게 무심한 성격인 것 같았다.
천오가 지하의 금고에서 막 빠져나온 날에 초윤이 운한산 밑 청명 여관에 있었다는 것은 즉 무슨 뜻인가.
정하윤이 굳이 빙의되지 않았어도 ‘초윤’이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천오를 데리고 내려와 보호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천오의 미숙한 기척을 가려 준 것도 ‘초윤’의 진법이었고, 그날 마침 산 밑을 지나가던 것도 ‘초윤’이었다. 하지만 ‘초윤’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기 때문에 천오는 마교의 끄나풀에게 잡혀가 생지옥에 빠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저 비약일 수 있었다. 작품의 스토리는 온전히 작가에게 달려 있으니 ‘초윤’의 잘못은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아이를 키우며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 보니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 주지. 한 번만 도와주지…… 하고.
‘사영이랑 사현이도 봐. 원작에서 주인공이 중독된 당운금을 데리고 두망산에 왔을 때 무심서에 남매가 있었다는 묘사는 하나도 없었잖아. 무책임하게 데려와서 방치하고 있던 처음의 모습을 보면…… 결국 산을 내려갔거나 한 거겠지. 그렇게 영특한 아이들인데 원작에서는 언급된 적도 없고.’
명색이 약선의 제자인데 말이야. 우리 애들은 이대로만 크면 정말 대단한 인물이 될 사람이라고. 얼마나 똑똑하고 기특하고 배려 깊은데, 어? 천오도 노력하고 있어. 적어도 나한테는 아주 대견하게 군다니까?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마음껏 아이들을 예뻐하던 초윤은 팔불출처럼 튀는 생각을 애써 정리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일방적인 죄책감을 해결할 방법이지 졸업한 아이들의 이전 모습을 회상하며 홀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원작대로라면 주인공은 이복형이랑 같이 섬서성에 와 있겠지? 제갈세가는 서안의 위에 있는 동관 시에 있으니까…… 와, 진법 고수인 제갈설린이랑 기관진식의 달인인 모용단이랑 주인공 모용서가 한 도시에 같이 있겠네. 제갈설린의 하렘 탈출은 그렇다 쳐도 주인공의 신뢰도는 어떡하냐. 주인공도 자기를 불신하게 되는 거 아냐?’
초윤이 막막한 기분으로 혼잡할 섬서성을 생각했을 때.
덜컹!
몸이 흔들렸다. 초윤은 그제야 본인에게 육체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초윤에게는 딱딱한 바닥에서 흔들리는 등도 있었고, 축 늘어트린 두 팔도 있었다. 어쩐지 생소한 느낌에 힘을 줘 보자 손끝이 움찔거렸다. 깨끗한 피와 정갈한 기운이 전신의 혈맥과 기맥을 막힘없이 돌기 시작한 것도 느껴졌다.
초윤은 허벅지와 종아리의 근육에 힘을 주어 보고, 발끝도 한 번 움츠린 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일렁이는 한 쌍의 새까만 눈동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놀란 것처럼 보이던 하얀 얼굴은 차츰차츰 일그러졌다. 차가운 눈물이 초윤의 뺨을 적시고 미끄러졌다. 천오는 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않고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스승님, 다신 못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두…… 두려웠습니다.”
“……천오구나. 어째서…….”
왜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니.
멀거니 천오를 올려다보며 묻는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어째선지 사포처럼 거칠었다. 덜컹, 바닥이 한 번 더 흔들렸다. 두 마리 말의 발굽 소리가 박자를 맞추어 들려오고 있었다.
초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어나서 보니 자신은 천오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으며, 이곳은 지붕이 있는 짐마차의 내부였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지만 아직 어안이 벙벙했다. 초윤은 가만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약함과 천오의 짐, 천에 둘둘 말려 비스듬히 서 있는 취우검, 텅텅 비어 있는 마차 내부와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본 뒤 천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아이에게 다가갔다.
천오는 초윤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예 펑펑 울며 손바닥으로 우악스럽게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역시 편찮으셨던 거지요. 제가 요리를 할 때 좀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아님 스승님께 무례하게 같이 동행할 수 있게 해 달라 억지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무리하시지 않으셨을 텐데…….”
“쉿, 천오야. 아가. 나는 네게 그런 말이라곤 하등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리 스스로를 구박하고 있느냐. 그만하거라.”
초윤은 잠긴 목소리로 다급하게 천오의 자학을 막으며 눈물을 닦는 두 손을 잡았다. 아이는 순순히 손을 내렸지만 여전히 뚝뚝 울고 있었다. 이렇게 속절없이 눈물짓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자신이 결국 독의 부작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듯했는데, 아이의 창백한 낯빛을 보아하니 정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칼칼한 목을 헛기침 몇 번으로 다스린 초윤이 아이의 손을 모아 잡고 눈을 마주쳤다. 천오는 스승이 자신의 손등을 도닥거리자 훌쩍거리면서도 시선을 들었다. 초윤은 아이가 내뱉은 속마음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먼저, 너는 약을 배운 지 아직 십 년도 되지 않았다. 독이라고는 접한 적도 없는데 단박에 알아차릴 리가 없지. 아니면 네게 일찍이 독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은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아, 아니요. 아닙니다. 독과 약은 물극필반(物極必反)의 법칙을 따르니 하나를 먼저 대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 그리고 네가 그 물을 길어 올 시점에는 흘러들어 온 독이 지극히 미약했을 것이다. 이를 알아차린 건 단순히 내가 뛰어난 덕분이지 네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천오가 천천히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 없는 대성통곡을 한 여파로 딸꾹거리기 시작했다. 초윤은 품에 한가득 들어차는 아이를 가볍게 감싸 안고 깃털처럼 등을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함께 가게 해 달라는 네 부탁에 조금 당황하긴 했을지언정 이를 무례하다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무작정 내려가라 했으니 너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지. 이해한다.”
“저…… 정말입니까? 저 때문에 힘겨운 선택을 하신 것이 정녕 아닙니까?”
“전혀 아니다. 나는 네가 내 말을 따라 산 밑으로 내려갔다 하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애가 눈에 안 보이니 불안한 마음에 더욱 서둘렀으면 모를까.
초윤이 짐조의 시체를 날것 그대로 덥석 집어 먹은 것은 그저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기 중에 놓자니 계속 독을 내뿜을 테고, 땅에 파묻자니 흙을 오염시킬 테고, 일정 수준 이상 더러워진 산은 자정 작용을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할 테니 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독에 강하다고 알려진 몸의 소화력과 해독력을 믿고 냉큼 배 속에 짐조를 봉인한 것은 오로지 초윤 본인의 선택이었다. 생각보다 꽤 고생을 하긴 했다만 가진 능력상 절대 죽진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고 물이라도 마시거라. 눈이 다 붓게 생겼다.”
“……예, 스승님.”
잡은 손에 힘을 꼭 준 뒤 놓아주자 얌전한 대답이 돌아왔다. 천오는 새빨개진 눈을 깜빡거리며 주섬주섬 배낭을 뒤져 호리병을 꺼냈다.
아이가 마개를 퐁 열어 잃어버린 수분을 보충할 동안, 초윤은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짐마차의 바깥 동태를 가늠했다. 머지않은 곳에 와글와글 밀집해 있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생활 소음이 쟁쟁하게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는 어디선가 들어 본 듯 익숙했다.
결국 초윤은 천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
“아,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스승님께서 혼절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천오가 서둘러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자세를 바로 해 앉았다. 이어진 다소곳한 대답에 초윤은 이마를 팍 짚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섬서성을 계속 찾으시기에 혹여 스승님의 용태를 볼 수 있는 이라도 있는 것일까 싶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서안 시입니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