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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81)화 (81/257)

81화

천오는 가끔 상상도 못 한 돌발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으니 이를 대비해 미리 밑밥을 깔아 둬야 했다. 아주 당연한 사실이지만 무협지의 인물들은 종종 잊어버리는 ‘남의 집을 함부로 부수면 안 된다’라든지, ‘네 부하와 동료의 목숨을 충당 가능한 소모품처럼 써서는 안 된다’라든지…….

멍청한 무림인들을 보고 온 탓에 걱정만 늘어난 초윤은 거의 10년 전에 읽었던 무협지 속 등장인물들이 저지르던 온갖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모자란 공감 능력을 드러내는 일이 무엇이 있었나 가만히 떠올렸다.

그러는 사이 걸어가던 길은 점차 잘 닦인 듯 깨끗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가지에선 귀티가 흐르기 시작했다. 돈 바른 티를 내는 건물을 알음알음 찾아 당도한 서안의 부촌(富村)이었다.

‘어지간한 번화가의 저택이라면 하나씩 사 뒀다고 했는데…… 대문에 열쇠와 같은 세공의 자물쇠를 걸어 뒀다고도 했어. 그럼…….’

초윤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대로를 걸었다.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대문에 원목 자물쇠가 걸린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석류나무들이 담장 너머로 팔을 뻗은 저택이었다.

안쪽에서는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실수하는 게 아닐까 싶어 평소보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자물쇠를 풀었다. 천오는 스승이 생전 처음 보는 집의 대문을 태연히 열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철컥, 열리며 떨어지는 자물쇠를 손으로 받았다. 초윤은 내심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대문을 열었다. 사천의 붉은 자작나무 저택처럼 본채로 들어가는 길에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정원이 보였다. 초윤은 천오와 함께 안으로 발을 들인 뒤 문을 닫고, 대문 안쪽에서 다시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챙겼다. 남이 살고 있는 것 같은 생활감이 느껴진다면 바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사람이 없었고 저택 역시 깨끗했지만 생활감은 없었다. 하인이 딸려 있다고 하더니 청소와 정원 관리를 해 주는 모양이었다. 먼지도 손때도 묻지 않은 붉은색의 산호 장식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초윤이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은 하오문주의 별저다. 객잔거리는 온종일 시끄러울 것 같으니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 것이다. 어지르지 말고 조용히 있다 가자꾸나.”

“예, 스승님. 그런데…….”

천오가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무엇이 궁금하냐는 듯 가만히 바라보자 아이는 곧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짐을 놓으러 가겠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저걸 붙잡아 꼬치꼬치 캐물어야 할지, 아니면 넘어가야 할지 생각하던 초윤은 후자를 택했다.

천오도 슬슬 상념이 많아지고 비밀이 생기기 시작할 나이였다.

초윤은 무심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같은 방을 쓰고 싶어 하는 아이를 열심히 달래 혼자 재운 뒤 맞은편의 방에서 등불을 켰다. 할 일이 있다고 하니 돕겠다 하고, 혼자 해야만 한다고 하니 시무룩해하던 모습이 아른아른 떠올라 한숨이 폭 나왔다.

다른 건 다 조숙해도 왜 잠자리만큼은 열다섯 살이 되도록 독립하지 못하는 건지 의아했지만 아이의 트라우마를 생각해 보면 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천오가 직접적으로 그 일 때문이라 언급한 적은 없으니 초윤 혼자 조심해야 하는 일이었다.

등불을 켜 놓고 보료에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달이 중천에 걸렸을 때쯤 기다리던 기척이 느껴졌다. 뒷문을 통해 살금살금 들어온 사람은 곧 소리도 없이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천오가 잠들어 있는 곳에는 기웃거리지도 않고 곧장 호롱불이 일렁거리는 초윤의 방 앞으로 다가왔다.

서글서글하고 간드러진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야심한 밤에 죄송하지만 잠시 뵈어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집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금세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집안일은 하루만 미뤄 둬도 티가 나는 법이었다. 그래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내부를 보자마자 날에 한 번은 하오문의 사람이 이곳에 들르는구나 싶었다.

손님의 신분으로 사람을 누워서 맞이할 순 없으니 속는 셈치고 오늘은 밤을 새자 생각했는데, 이것이 정말 맞아떨어지자 살짝 떨떠름하기도 했다. 청소를 밤에 할 리는 없으니 이 시간에 만나러 왔다는 건 초윤이 서안에 당도했다는 것을 진즉 알고 있었거나 따로 은밀하게 전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초윤이 수면을 잘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됐다.

역시…… 좀 무섭다. 무협 세계의 이 편향된 기술이 상당히 무섭다. 여기서 광동성까지 편지를 보내는 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이 걸리는데, 하오문과 개방은 이상하게 정보가 빠르다는 이 격차가 이해 안 가고 무섭다.

거리에 있는 일반인의 절반이 하오문도고, 노숙자의 대부분은 개방인 것 같은데 이쯤 되면 어느 정도 이름 있는 무림인은 아예 사생활이 없는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초윤처럼 산속에 틀어박혀 살아도 속세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무림인 누구누구가 산을 내려왔다!’ 하고 동네방네 소식이 다 퍼지고 있는 것 아닐까.

‘무슨 지명 수배자도 아니고…….’

초윤은 찝찝한 기분으로 들어오는 이를 맞이했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에 아이가 깰까 봐 차음막도 스멀스멀 둘렀다. 작은 키에 웃는 상을 하고, 졸부가 입을 법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이 곧 문을 열고 들어오며 나부죽이 허리를 숙였다.

“왕정이라고 합니다, 손님. 이 별저의 관리를 맡고 있습죠. 몇 년이 다 되도록 문주님은커녕 외부인도 한 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본분을 다할 기회가 생겨 영광일 따름입니다.”

“……조용히 머물다 갈 참이었는데, 용케 알았구나.”

“어이쿠, 부디 곱게 봐 주십시오. 무언가 부탁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문주님의 별저를 처음 방문하신 것 같아 안내차 찾아온 것뿐입니다. 불편을 끼쳐 드렸다면 마음 깊이 죄송합니다, 손님.”

초윤의 짤막한 말에 담긴 시원찮은 감정을 눈치챘는지, 왕정이 혀에 기름칠을 한 듯 말하며 굽신거렸다. 이렇게까지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었던 초윤이 뻣뻣하게 고개를 젓자 왕정은 냉큼 다가와 빠르고 정확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손님께선 오로지 편하게, 그저 편하게 있어 주시면 됩니다. 지필묵부터 이부자리까지 다 손님의 것입니다.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나 다른 게 필요하시다면 처마에 매달린 은종만 울려 주십시오.”

“……거리가 소란스러워 이리로 들어왔을 뿐이다. 한 밤만 머물고 떠날 것이니 과하게 굴지 마라.”

“요 몇 년 사이 섬서성이 시끄럽긴 했습죠. 문주님도 이곳의 동태를 눈여겨보시는 중입니다. 득세해서 날뛰던 화산파가 갑자기 잠잠해지더니, 이번엔 종남파가 말썽을 부리지 뭡니까. 오늘은 객잔에서 두 무리가 부딪혀 난동을 피웠다 하더니 그 모습을 보셨나 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왕정은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주제를 바꾸어 매끄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던 초윤은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신경이 쏠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산파가 조용한 건 아마 사천당문에 약점을 잡혀서 그런 거겠지. 그래도 그렇게 눈치만 보면서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니 조만간 뭔가 터질 것 같은데…… 갑자기 종남파라고? 종남파가 원작에서 다뤄졌었나?’

제갈세가, 화산파와 함께 섬서성 안에 자리 잡은 종남파는 남쪽의 종남산에 위치해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의 모습을 본뜬 유운검법(流雲劍法)을 주로 썼으며, 무당파나 화산파처럼 도교 계열 문파였지만 묵직한 중검을 썼다.

하지만 중검을 쓴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 한국의 무협 소설에서는 비중 있게 다뤄진 적이 거의 없었고, 이는 <귀환영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종남파가 유운검법을 쓴다는 지식도 정하윤의 것이 아니라 ‘초윤’의 것일 만큼 원작에서는 엑스트라 취급을 받던 세력이었다.

‘정파에서 대놓고 악의 무리로 묘사되던 건 남궁세가와 화산파뿐이었고…… 나머지 문파들은 적당한 선역이거나 밑바닥 악역이었는데 왜지? 또 뭔가 비틀어졌나?’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적극적으로 원작을 바꾼 초윤은 살짝 불안했지만 애써 신경을 돌렸다. 나중에 천오가 자라서 복수를 할 때 조금씩 도와줄 생각은 있어도 정치 싸움에 개입하고 싶진 않았고, 아이들이 훌쩍 자라 독립을 하고 나면 원래의 세계로 갈 방도를 찾을 예정이었으니 자신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다 잘 크고 천오가 무사히 목표를 달성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긴 해야 할 텐데. 애 키우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무협지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고 있어서 위기감이 들지 않는 건지. 내 귀환도 분명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왜 이리 태평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돌아가는 방법은 감조차 잡히지 않는데 왜 여태껏 고민할 틈도 못 냈는지, 만일 돌아가지 못하고 영영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초윤이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지려고 하는 순간, 친절하게 웃은 왕정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실 이놈은 부업으로 작은 표국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데, 마침 오늘 아침 손님께 당도한 서신이 있습니다. 손님께서 이곳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다면 지급(至急)으로 보내 드렸을 것을 이리 직접 전해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깍듯이 말한 왕정이 양손으로 공손히 내민 것은 곱게 접어 봉인한 한 장의 서신이었다.

붉은 끈으로 만든 모란 매듭이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산뜻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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