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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82)화 (82/257)

82화

“……작은 표국이라.”

초윤은 몇 년 사이 조금 익숙해진 모양의 매듭을 바라보며 간신히 중얼거렸다. 모란을 문장으로 쓰는 희가 아무 곳에나 자신의 서간을 보낼 리는 없으니, 아마 왕정의 말은 겸손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왕정은 초윤의 말끝을 야무지게 받아 대답했다.

“손님의 넓은 식견에 비하면 모란 표국은 장사치들의 작은 모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손님을 직접 상알할 수 있게 되다니, 이 번잡하고 좁은 섬서성에 배정된 이후 가장 큰 영광입니다.”

“…….”

섬서성은 거대한 문파가 여럿 모여 있어 하남성에 버금가도록 번화한 도시였다. 그런 곳을 번잡하고 좁다 하는 것을 보면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초윤의 시점에 맞추어 말한 것 같았다.

초윤은 그렇게까지 굽힐 필요가 없다며 한 마디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편지를 건네받았다. 그러자 왕정이 다시금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혹여 보낼 서신이 있으시다면 번거로이 표국을 오가지 마시고 지금 제게 주십시오, 손님. 이놈이 모든 책임을 지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안전하게 송부하겠습니다.”

“……기다려라.”

마침 표국에 들러 아이들에게 답신을 보내야겠다 생각한 게 오늘 오후였다. 그리고 섬서성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서둘러 불귀 산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계획을 고친 것 역시 오늘 저녁이었다.

초윤이 약함을 뒤져 자신의 필기도구와 종이를 꺼내려 하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왕정이 조심스레 방 한편에 있는 자개 서랍에서 지필묵을 꺼내 내밀었다. 이 별저를 관리하고 있다 말한 게 허언은 아닌 듯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남의 집에 이어 남의 물건까지 제 것처럼 쓰게 되자 부담감이 엄청났다. 하지만 보내고 싶은 내용을 담으려면 가지고 온 처방전용 종이로는 턱도 없을 테니 스스로를 설득하며 겨우 붓을 받아 들었다.

초윤은 몸에 밴 정결하고 고상한 필체로 지체 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고급스러운 종이 위로 쥐 수염을 모아 만든 서모필(鼠毛筆)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 순 없었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밤을 새워 편지를 쓴 뒤 내일 직접 표국에 가자니 괜한 시비에 휘말릴까 봐 걱정스러웠고, 왕정이 말한 대로 종을 울려 허드렛일을 해 줄 사람을 부르자니 이름값을 앞세워 사람을 부리는 것 같아 찝찝했다. 현대에서도 식당 벨을 누르는 것보다 직접 주방에 찾아가 필요한 것을 공손히 부탁하던 사람이었던 탓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본 같은 글씨가 종이 두 장을 나란히 채웠고, 초윤은 이를 따로 접어 겉봉에 각각 현(賢)과 영(英)을 적었다. 이를 받아 든 왕정은 종이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품에 집어넣은 뒤 초윤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곳에서 보내신 시간이 근심을 덜어 드릴 수 있길 간곡히 바라옵니다. 오늘처럼 한밤중에 번거로움을 끼쳐 드릴 일은 다시 없을 테니 앞으로도 편히 이용해 주십시오. 손님을 만나 뵌 것을 일생의 광영으로 여기겠습니다.”

“…….”

어휴, 아니라고. 말도 말라고. 오히려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줘서 감사하다고 마주 말하고 싶었지만 ‘초윤’의 몸으로 가능할 리 없었다. 도리어 입을 열었다가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붙이지 말라는 면박만 주게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초윤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고, 왕정은 공손하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왕정의 기척이 사라지자 초윤은 내심 한숨을 쉰 뒤 차음막을 걷었다. 그리고 바로 앞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희의 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걸로 네 번째네.’

초윤은 희와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첫 서신을 기억했다. 방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재운 뒤 펼쳤을 때의 충격이 강렬해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희가 선물이라며 주었던 서신에 적혀 있던 내용은 간결했다.

「강을 거슬러 오르던 검은 이무기는 하늘의 역정을 사 땅 밑에 갇힌 듯합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손으로 만지는 날에 다시금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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