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니…… 근데 아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를 데려왔다고 고문 감금을 해?’
원작 <귀환영웅> 속에서는 초중반까지 알음알음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나오며 남궁세가와 작당해 무림을 집어삼키려는 흑막처럼 묘사되지만, 얌전한 줄로만 알았던 소교주 주천오가 쿠데타를 일으켜 스토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가짜 흑막 주패군.
애매한 역할답게 주패군의 성정이나 사고방식은 자세히 묘사된 적 없었다. 그래서 초윤 역시 주패군이 그저 평범하게 사악한 악당처럼 남궁세가에 극약과 강시를 공급하고, 보편적으로 탐욕스러운 마교 교주처럼 무림을 손에 넣어 마도천하(魔道天下)를 만들려고 한 것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단언컨대 주패군이 이렇게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가부장적 인간쓰레기 부친 타입일 줄은 몰랐다.
‘하긴…… 정상적인 인간이었다면 보통 애들을 동굴에 모아 넣고 잘난 놈만 살아남을 때까지 죽도록 굴리진 않지.’
초윤은 한숨을 푹 쉬며 서신을 다시 접어 약함의 구석에 넣었다.
묻어 두었던 걱정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4년 전 산에서 내려왔을 때 벌어졌던 일은 전부 초윤의 의지에 상관없이 알아서 우당탕쿵탕 돌아가며 초윤을 휩쓸었지만, 이번 나들이에서는 스스로 고민하고 고뇌해야 할 근심거리만 가득 껴안는 느낌이었다.
이걸 언제, 어떻게 천오에게 말해 주어야 하나……. 끝까지 함구할 순 없는데 애 반응이 어떨지 도저히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정원만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으로 해결책을 찾을 찰나, 문득 맞은편 방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초윤과 떨어져 홀로 자고 있는 천오였다.
‘뭐지?’
초윤은 닫힌 문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기감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다급한 움직임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 불안한 듯 조금 흐트러진 숨소리 같은 것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한 느낌은 언제 겪어도 신기했다.
자다가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킨 천오는 이불을 걷고 잠시 묵묵하게 앉아 있다가 한숨을 쉬는 듯했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며 고뇌에 찬 듯 짧게 앓는 신음을 내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또 설쳤나? 아까도 깊게 잠든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이리로 다시 오려나?’
베개와 이불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천오를 기억하는 초윤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신도 챙겨 넣었고, 누군가 들렀다 갔다는 흔적도 없으니 아이에게 괜한 불안을 안겨 주진 않을 것 같았다.
기다리던 사람은 이미 만났으니까 이쪽으로 들어와서 같이 자게 해 달라고 한 번 더 말하면 들어줘야지. 초윤은 속으로 다짐하며 아이의 작은 발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천오는 자신의 배낭에서 무언가 꺼낸 뒤 초윤의 방을 지나쳐 살금살금 어딘가로 향했다. 심지어 내공을 일으키지만 않았을 뿐 보법까지 써 가며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기의 변화에 민감한 초윤을 피하고 들키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초윤은 거기까지 생각한 뒤 제대로 충격을 받아 허둥지둥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왜? 뭐지?’
10년에 가까운 시간 내내 자신에게 숨기는 것 하나 없던 아이였다. 절경이 펼쳐진 천인단애 위에서 조곤조곤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때부터 천오는 초윤에게 한없이 솔직하기만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밀한 속내와 혼자만의 생각을 토로했고, 특이한 걸 보거나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서슴없이 초윤에게 말을 붙였다.
원래부터 말수가 잘 없는 아이였지만 둘 사이에 대화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사영이와 사현이를 보낸 후 아이들에게 일찍이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 초윤이 ‘초윤’의 무뚝뚝한 성정을 애써 이겨 가며 끈질기게 말을 붙인 덕분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뭘 숨기려고 하지?
‘아니, 그럴 수야 있지……. 그럴 수야 있는데.’
사춘기 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긴 한데……. 그렇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허망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천오에게 전해 줄 소식을 정리하며 착잡하던 기분이 싹 날아갔다. 초윤은 아이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존중해 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주섬주섬 일어났다.
‘별거 아닌 게 아니면 어떡해……. 진짜 큰일인데 차마 말을 못 하는 거면 알아야 하니까.’
모른 척 눈을 감아 주는 한이 있어도 무슨 일인지 조금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천오는 아직 초윤의 보호 안에 있었고, 초윤은 천오를 모든 방면에서 지켜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비밀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했지만 그게 아이의 안위에 해를 입힐 수 있다면 보호자가 반드시 알아야 했다.
방문을 닫고 틀어박히는 건 몰라도 자다가 몰래 바깥으로 나가는 건 역시 가만히 둘 수 없겠다. 초윤은 필사적으로 온갖 이유를 붙여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리고 끝내 소리 없이 방문을 열어 아이를 쫓아 나갔다.
◇
천오는 닫힌 문 너머로 일렁이는 불빛을 보다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스승과 함께 자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할 일이 있다 하시니 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이제 스승의 방에 베개와 이불을 들고 찾아갔던 열한 살 꼬맹이가 아니었다. 이젠 충분히 혼자 잘 수 있었다. ……아마도.
방은 호화롭고 고급스러우며 처음 보는 예술품이나 장식들이 많았지만 천오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무심서의 방이나 이곳이나 다를 바가 없게 느껴졌으며, 오히려 스승의 흔적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무심서를 훨씬 선호했다. 천오는 조금 울적한 기분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옆으로 누웠다. 푹신한 솜이나 부드러운 감촉 또한 별다르게 느껴지진 않았다.
정적 속에서 눈을 감자 스승의 방에서 항상 듣던 조그만 소음들이 환청으로 귓가에 들려왔다. 무명으로 지은 옷이 부드럽게 스치는 소리, 붓이 부드럽게 종이를 적시는 소리, 혹은 호롱불을 후 불어 끄는 스승의 숨소리.
천오는 많은 것을 기억했고, 단 하나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필요할 때만 기록을 꺼내 읽듯 재생할 수 있었다. 이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요 며칠 사이 섬서성에 도달하기까지의 기억뿐이었다.
사실은 당장에라도 앞방으로 넘어가 좀 더 매달리고 싶었다. 천오는 스승이 쓰러진 뒤 지난 사흘을 미친 짐승처럼 내달리며 보냈고, 희미한 목적성만이 간신히 광란을 잡아 눌렀다. 스승이 두 눈을 떠 연갈색 눈동자로 천오를 바라보았을 때가 되어서야 천오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스승과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이곳으로 와 잠에 들기 직전까지도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정신을 잃은 스승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믿어야 한다.’
천오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안정을 찾지 못하면 스승을 의심하는 꼴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무심서로 돌아가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터. 천오는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온갖 잡념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며 숨을 길게 쉬었다.
어느 순간 주위가 광막해졌다. 천오는 자신이 선잠에 들었다는 사실을 쉬이 깨달았다. 이대로 침잠하면 곧 아침이 밝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몸을 늘어트리려던 찰나.
퐁, 작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천오는 어째선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턴가 자신은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어렴풋한 빛이 보여 눈을 가늘게 뜨자 익숙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잔잔히 흐르는 맑은 물은 태양도 없는 어둠 속에서 기억의 빛으로 일렁였다. 물결이 작은 포말을 그리고 산산이 부스러지며 수면 위로 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천오에게 등을 돌리고 선 한 사람이 있었다.
젖어서 들러붙은 하얀 머리카락, 그것을 모아 앞으로 넘기는 창백한 손등, 우아한 목덜미와 섬세한 손톱, 얇은 허리와 곧은 등.
서문천오는 그가 누군지, 이것이 무슨 회상인지 알고 있었다. 이지를 잃고 그의 안위만을 바라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선 이 장면을 계속해 그리고 있었다. 다만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인정하고 마주한다면 자신은 정말 돌이킬 수 없이 추악해질 것 같아서 스스로 기억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문천오는 지금이 현실과 유리되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천오는 성큼성큼 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망설임 없이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어느새 천오의 육체는 그를 품에 가둘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났다. 천오는 그의 도드라진 어깨와 야윈 허리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자신을 돌아보려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물에 젖은 그에게선 풀을 짓이긴 듯한 향이 흘러나왔다.
흉곽 아래로 격하게 요동하는 심장이 그에게 전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천오를 가라앉히면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조그만 귀밑의 맥박 점에 입술을 문지르자 그가 고개를 기울여 천오에게 옆 목을 드러냈다. 섬세한 손끝이 천오의 손 위를 맴돌다 슬며시 감쌌다.
우습게도 서문천오는 그 작고 미약한 움직임에 짐승이 되고 싶었다. 그의 앞에 납작 엎드려 명령받고 싶었다. 아양을 떨고, 쓰다듬을 받으며 그의 손바닥을 핥고 싶었다. 동시에 사람 말 따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그의 위에 올라타 본능을 따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