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천오는 이를 세워 그의 목을 감싼 살갗을 잘근잘근 씹었다. 파리한 허리를 손으로 더듬고 내리깐 눈을 광괴하게 번뜩였다. 속으로는 문장이 되지 못한 욕정만 광인처럼 중얼거렸다. 씹고 싶다, 삼키고 싶다, 뜯어 먹고 싶다, 해치고 싶다, 잡아 누르고 싶다.
그리고 어루만지고 싶다, 다정하고 싶다, 무릎 꿇고 싶다, 올려다보고 싶다, 발치에 엎드려 구걸하고 싶다, 입 맞추고 싶다…….
그때, 그가 한 손을 들어 천오의 머리 위에 올렸다.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고 쓸어 넘겼다. 천오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천오가 바라 마지않는 만큼 다정하게, 온전하게.
“⎯⎯헉!”
천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숨을 헐떡이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두운 새벽, 낯선 가구, 부드러운 이불, 그리고 홀로 남은 방.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어렵지 않게 상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감히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천오는 해쓱해진 낯짝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천천히 덮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설마 싶었던 순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꼬락서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천오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자신의 바지춤을 슬쩍 들췄다. 그런 뒤 좌절에 젖어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어느새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었다.
아…….
큰일 났다.
◇
깜깜한 밤중에 발소리를 죽여 방을 빠져나온 천오는 조용히 욕탕이 구비된 욕실로 들어갔다. 한창 혼란스러울 열다섯 살, 안 그래도 며칠 사이에 겪은 일이 많은데 거기에 더해 거대한 폭렬탄을 맞아 버린 천오의 머리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혹시라도 스승과 마주칠 경우를 생각한다면 변명하기 더 용이한 뒷간으로 가는 게 좋다는 점, 발소리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의심스럽다는 점 등등 평소라면 충분히 고려했을 만한 요소들을 모조리 배제한 채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따랐다.
천오는 당장 이 흔적을 지우고 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쁜 짓을 한 것처럼(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짓을 한 게 맞는 것 같지만) 가슴이 불안하게 술렁이고 조급했다. 당장에라도 뒤에서 스승이 기척 없이 나타나 고아하게 내려다보며 무얼 하고 있냐고 물을 것 같았다. 더러워진 옷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왜 이리 되었냐며 추궁하고, 무슨 꿈을 꾸었냐고 파고들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천오는 도저히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욕탕 물에 머리를 박아 기절하고 싶을 것 같았다. 천오는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욕실에 불을 밝히지도 않은 채 차갑게 식은 물에 옷부터 처박았다. 스승의 가사를 몇 년 도와 온 연륜으로 조물조물 애벌빨래를 했다.
손에 닿는 물의 감촉이 자꾸만 꿈을 떠올리게 만들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난처한 와중에도 그 장면만 계속 생각하는 자신이 정말 이상한 것 같았다. 천오는 다소 거친 손길로 빨래를 끝내고 젖은 옷을 비틀어 물을 짰다. 그리고 욕탕 물도 시원하게 버렸다.
흔적을 지우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듯싶었다. 천오의 예민한 후각에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아 수습은 다 마친 듯했다. 천오는 차가워진 손을 뺨과 귀에 대고 식히며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런 뒤 아닌 밤중에 벅벅 세탁된 옷을 펄럭 털어 구김을 없애고, 걷어 올렸던 소매도 내렸다.
이대로 돌아가 방에 옷을 널어놓고 잔다면 아침에는 다 마르겠지. 차곡차곡 개어 집어넣기만 하면 끝이다…… 라고 생각하며 닫아 둔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오금이 저려 주저앉을 뻔했다.
“스, 스승님.”
막 문을 열려고 했었는지 반쯤 손을 올린 스승이 문 앞에 대뜸 서 있었다. 식겁을 넘어 기겁을 한 천오의 손에서 기껏 깨끗하게 만든 옷이 스륵 빠져나갔다. 젖은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 이를 낚아채 올린 것은 초윤이었다.
초윤은 뻣뻣하게 굳어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천오를 앞에 두고 시선을 들어 찬찬히 욕실을 훑었다. 천오에겐 그 짧은 시간이 무엇보다도 길고 막막하게 느껴졌다. 천오는 결국 차게 언 손을 벌벌 떨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박차고 나가기에 무슨 일인가 했건만.”
그러나 천오의 나약한 목소리를 중간에서 끊은 스승은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천오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 입술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윤은 당황한 천오의 머리 위에 자신의 빈손을 올렸다. 아이의 키가 훌쩍 자란 탓에 이전처럼 작은 동물을 쓰다듬듯 하진 못했지만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헤집고 흐트러트리는 손길은 여전히 따스했다.
“당혹스러워할 필요 없다. 네 나이에 당연한 일이며, 누구든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 안심하거라.”
“예, 예?”
“열셋을 넘으면 네 몸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 말해 주지 않았더냐. 네가 이를 기억 못 하진 않을 텐데.”
천오는 아연한 상태로도 팽팽히 머리를 돌렸다.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스승의 어록과 지식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내 자신의 상황과 비교했다. 그리고 그나마, 정말 그나마 자신의 상황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는 증상을 골라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렇다면 제가 지금 한 것이…….”
“그래, 몽정이다.”
스승은 이에 또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천오는 슬슬 정말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말 당연한가? 누구든 다 겪는 일인가?
자신은 흐트러진 스승을 계속해 떠올리며, 그 등을 끌어안고 목에 이를 박아 넣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 또한 당연한가? 정말 스승을 가진 제자라면 다들 이러는가?
천오는 혼란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제가 꾼 꿈은…….”
“꿈은?”
말끝을 흐리자 스승이 되물었다. 천오는 차마 상세히 꿈의 상황을 말할 수가 없어 자신이 아주 나쁜 생각을 한 사실만이라도 전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골랐다.
“굉장히…… 파렴치하고 불경한 꿈을 꾸었습니다. 정말이지 무, 문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좋다고 느껴 버려서 면목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정말……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지 걱정됩니다.”
“음.”
스승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되지도 않는 비밀을 만들 생각으로 이곳까지 숨어 왔건만 결국 다 털어놓아 버렸다. 불안한 침묵이 길어졌다. 천오는 찬물에 식은 손을 모아 잡고 손끝을 매만지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떨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스승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매정하게 떨어질 꾸중을 생각하고 숨이 거칠어질 찰나, 천오의 양손을 감싸는 온기가 있었다.
초윤은 천오의 손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이번에는 제대로 된 확신을 담아 단단히 일렀다.
“무서워할 것 없다. 말하지 않았느냐. 이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네 몸이 자라며 마땅히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 너도 이제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고, 그에 신체가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예, 스승님.”
“너는 아직 너만의 기준이 다 잡히지 않았으니 네 꿈이 파렴치하고 불경한지는 내가 판단해 주겠다. 수치를 안겨 줄 수 있어 미안하지만 네 고뇌를 해소해 주고 싶을 뿐이니, 내키지 않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요, 아닙니다, 스승님.”
천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실내에서도 조금만 적응하면 주위를 볼 수 있는 시야 따위 몇 년 전부터 갖추고 있었으며, 하물며 자신을 바라보는 스승의 두 눈이야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스승의 연갈색 눈이 천오와 직선으로 마주쳤다. 천오는 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스승을 조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과…… 아주 달랐다.
“네 꿈에 나온 대상이 너보다 많이 어렸느냐?”
“예?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천오가 기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리냐고? 천오는 스승의 춘추를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가 자신보다 적어도 몇십 배는 광대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그 대상을 힘으로 잡아 눌렀느냐? 또는 대상이 네게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이었느냐?”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꿈속의 자신은 스승보다 기골이 장대할지언정 감히 그보다 강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대체로 스승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감정이 섞여 시커멓게 일렁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천오는 그저 그의 신경과 관심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빈틈없이 닿고 싶고, 알고 싶고, 그리고…….
천오가 볼과 귀 끝,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초윤은 아이의 반응을 영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보다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대체…… 그 대상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리 말한 것이냐.”
“……끄, 끌어안았습니다. 끌어안고…… 이, 입맞춤을 한 것 같습니다.”
“…….”
초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애를 너무 순진하고 착하게 키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