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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85)화 (85/257)

85화

동화를 읊어 주려고 하면 격언이 되어 나오고, 장난을 치려고 하면 협박이 되어 나오고. ‘초윤’은 인풋과 아웃풋이 영 이상한 몸이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살면 이렇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잘 만든 영상 매체나 교과서도 없이 오로지 정하윤의 지식에만 기대서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니 초윤은 울고 싶은 마음으로도 어떻게든 열심히 떠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가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분명 성교육도 꾸준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이론에만 치중했나? 초윤의 입으로 동화 구연처럼 살가운 분위기로 수업이 가능할 리 없잖아…….’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중대한 고민일 터였다. 초윤은 자신의 앞에서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천오를 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천오에게 몽정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안겨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았다.

“내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구나. 마지막이다. 네 잘못이 아니며,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두어라.”

초윤!!! 이딴 식으로 말을 하니까 애가 조금만 낌새가 바뀌어도 겁부터 먹지!!!

마음 같아선 제 머리채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이따위 말을 들은 천오의 표정이 한결 차분해졌다는 게 오히려 안타까웠다. 초윤은 한숨을 삼키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꾸나.”

“예, 스승님.”

“네가 아는 사람이더냐?”

“…….”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지더니 귀까지 확 달아올랐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덜컥 숨을 집어삼키며 어깨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빤했다.

초윤은 이번엔 자신의 안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마음껏 헤벌쭉 웃었다. 무표정만큼은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유지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마 첫사랑인가? 열다섯 살이면 누군가를 좋아할 시기가 되기도 했지. 누구지? 설마…… 사형제 중에 하나인가?’

천오가 알 법한 사람이 누가 있더라?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던 것도 그렇고……. 설마 희? 아니야, 희는 4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그 이후로 별다르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진 않았어. 처음 봤을 때도 혼자서만 태연해 보였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사영이나 사현이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그 둘한테는 가끔 편지를 보내기도 했잖아. 설마 매일 보고 싶고 편지하고 싶은데 나한테 폐가 될까 봐 참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어. 천오는 배려 깊고 조숙한 애라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윤의 망상이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쭉 펼쳐졌다. 나름의 설득력과 개연성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일곱 살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을 끌어안고 입 맞추는 꿈을 꾸며 몽정을 했다면 이렇게 부끄러워할 수 있었다. 심지어 둘 중에 누굴 상대로 했든 사형제 사이니 죄악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고, 스승에게 말하길 꺼리는 이유도 충분했다.

‘그럼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

무작정 천오 입장에서 밀어주는 건 절대 안 될 짓이고…… 그렇다고 해서 첫사랑이 시들시들 말라 죽도록 가만히 놔둘 수도 없고.

초윤이 지대한 착각 속에서 자신의 행동 방향을 고민하고 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넘치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천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우물쭈물 조그맣게 말했다.

“……저를 많이 도와주신 분인데 감히 이런 생각과 감정을 품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께선 이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지만…… 저는 제가 잘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많이 도와줬다고 하는 걸 보니 사형제가 맞구나!

초윤은 잠시 상황을 잊고 뿌듯한 충만감을 느꼈다. 그 조그맣던 일곱 살 꼬마 아이가 벌써 이렇게나 커서 사랑을 알게 되다니! 게다가 무작정 들이대지도 않고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며 홀로 고뇌하고 있다니!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첫사랑을 건강하게 이끌어 주고 싶었다. 결과가 어떻든 이를 통해 천오가 성장하길 바랐다. 그렇기에 초윤은 더 캐묻지 않고 잡은 손을 이끌어 바깥으로 나왔다. 곧장 본채로 가지 않고 조금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눈 뒤 들여보낼 생각이었다.

휘영청 뜬 달이 잘 조성된 후원을 은은하게 밝혔다. 탐스럽게 키워 둔 과실수와 고개 숙인 꽃봉오리들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초윤은 흐뭇한 마음으로 말을 고르다 운을 뗐다. 제 입으로 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가만히 듣고 새겨 두어라.”

고른 흙바닥을 소리 없이 걸으며 아이의 손을 놓아주었다. 젖은 옷을 든 채 뒷짐을 지고 곁에 따라붙은 천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초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두 눈동자는 달빛을 담아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윤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다. 어쩌면 연정일 수 있고, 어쩌면 우정일 수 있으며 어쩌면 동경이거나 친애일 수도 있다. 사람의 언어로는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호감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예, 스승님.”

“그 셀 수도 없이 많은 호감이 상대방에게 죄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동공과 홍채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 천오는 언제나 그랬듯이 초윤을 올려다보며 답을 구했다. 모든 해답이 그곳에 있으리라 믿고 제 주관을 맡겼다.

아무리 눈치 없는 초윤이라도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은 꽤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천오는 스승인 자신에게 과할 정도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초윤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아직 덜 자란 것도 모자라 큰 상처를 입은 아이라면 자신을 보듬어 주고 지켜 주는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초윤은 천오에게 마냥 기대지 말라 말하는 대신 이 기회를 정말 잘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훗날 모든 게 준비된 아이가 자신을 떠나 건강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천오의 자아를 탄탄하게 쌓아 올려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이의 안에 꾸준히 도덕심과 윤리관을 심어 주어야만 했다.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도록 태어난 아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원만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성이라는 개념이 꼭 필요했다.

초윤은 젖은 옷을 털어 내공으로 물기를 날려 버린 뒤 아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호감이 무례가 되는 일을 막아 주는 것은 오로지 존중밖에 없다.”

“……존중 말입니까?”

“그래. 상대방의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네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고려한 뒤 반영하는 것이다. 네가 일곱 살 때 절벽 위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그리 다르지 않구나. 실제로도 그의 연장선이다.”

그때도 천오에게 ‘존중’을 잘 풀어서 가르쳐 줬었지. 얌전히 앉아선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도끼 얘기를 하던 천오를 기억해 낸 초윤이 속으로 픽 웃었다. 그때에 비하면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지금은 정말 많이 발전한 것 같았다.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죄가 될 수 없지만, 면죄부 또한 될 수 없다. 호감은 변명이 되어선 안 되는 법이다. 너는 네 꿈속의 그 상대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

“…….”

아이가 비수에 찔린 것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거리다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꿈속에서 했던 대로……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입 맞추고, 손을 잡고…….”

“그래, 그럼 이제 반대로 생각해 보려무나. 네가 지금 상대에게 그러기를 요구하면, 그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줄 것 같으냐?”

“……아니요.”

그렇긴 하겠지……. 사영이는 본능적인 감이 좋고 경계심이 높아서 그런지 천오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적이 없었고, 사현이는 누나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바라기였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무언가 변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천오는 모를 게 분명했으며, 어느 쪽이든 천오의 마음을 받아 줄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천오의 첫사랑이 사형제 중 한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초윤은 진지하게 물었다.

“거기까지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턴 잘 생각해야 한다. 상대가 너를 거절한다면, 너는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이냐?”

“아니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아직 죄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네가 네 감정을 강요할 생각이 아니라면, 혹은 상대방이 네게 똑같은 마음으로 보답하지 않았다고 앙심을 품지 않는다면 문제 될 점은 없다는 뜻이다.”

초윤은 아이의 앞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 다부지게 각이 잡히기 시작하는 어깨를 쓰다듬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나온 탓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도 뒤로 넘겨 주었다. 천오는 스승의 내리깐 눈에 가득한 자애를 정신없이 엿보았다.

“좋아하는 쪽이 진다는 말이 있지. 이 패배감에 짓눌려 무너지거나 엇나간다면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

“그러니 네게 그럴 의지만 있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노력하거라. 타인의 감정을 뜻대로 휘두르려 하지 말고 네 진심을 내보이며 그저 정진하거라. 먼저 좋아하게 된 이상 상대방을 파악하고 너를 가꾸어 돌아보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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