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러다 보면 첫사랑은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날 터였다. 결과가 어찌 됐든 초윤은 이번의 일로 아이가 성장할 수 있길 바랐다. 때로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고, 때로는 내어 주어도 좋은 것과 아닌 것의 선을 그으며 건전하게 사랑하는 법을 체득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설렘과 고뇌와 좌절 같은 부가 감정도 아이에겐 자양분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껏 해 왔던 것과 별로 다른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첫사랑부터 영 어려운 길로만 가네……. 어느 쪽이든 전혀 쉽진 않을 거 아냐. 누군지 살짝만 물어볼까? 응원부터 하려는 건 아니지만 알고 있으면 맞춤 상담이 가능하지 않을까? 좋아하게 된 이유도 궁금한데…… 천오한테도 이상형이 있겠지?’
“밤이 깊었다. 슬슬 돌아가자꾸나.”
“……스승님.”
나름의 짝사랑 조언을 남긴 초윤이 조금 구질구질한 고민을 하며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가려 할 때, 뒤에서 들려온 천오의 목소리가 초윤을 붙잡았다. 돌아보니 평소처럼 고요한 얼굴을 한 천오가 보였다. 그새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고 의연하게 목표를 다잡은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열망을 가득 담은 아이의 두 눈은 기이한 흡인력이 있었다. 초윤은 단번에 아이의 목소리와 눈동자에 몰입해 뚫어져라 시선을 마주했다.
반듯하니 모양 좋은 입술이 열리며 조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오의 변성기가 어느새 끝나 가고 있었다.
“스승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
솔직히 이 순간 일이 살짝, 아주 살짝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직감이 초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몽정을 했다는 것을 들키자 사색이 되던 얼굴, 어떤 꿈을 꿨는지 한마디 말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던 표정, 천오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 그리고 천오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단편적인 정보가 모여 두루뭉술한 그림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정하윤은 그 이상으로는 생각을 뻗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초윤은 짧은 시간내에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합리화했다.
천오는 ‘보편적으로 호감을 받는 사람’의 특징을 알고 싶어 유일한 보호자인 초윤에게 물어보는 것뿐이다. 또는 까다로운 스승이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호감을 가질 테니 궁금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스승과 앞으로도 몇 년은 함께 있을 게 분명하니 착한 마음에 알아 두고 싶을 수도 있다. 그래, 이것뿐이다……라고.
어느 쪽이든 초윤이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초윤은 불현듯 피어오른 불안감을 기우로 치부한 뒤 돌아서며 단조롭게 말했다.
“올바르게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무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무공의 고강함과는 다르다. 함께 단련되는 정신의 단단함과도 다르지. 오로지 이타적이고 선한 행동만 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며 느리게 걸음을 옮기자 자박자박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종종걸음으로 쫓아와 손부터 잡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저렇게 컸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초윤은 수많은 대화와 고찰, 경험 끝에 성립된 자신의 이상형을 떠올리며 이를 묘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주관과 신념이 뚜렷하지만 타인의 의견을 고려해 반영할 줄 알고, 남을 함부로 대함으로써 자신을 드높이려 하지 않고, 가끔 상처를 입으면 온건하게 스스로를 치유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겠구나. 혹은 이런 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도중이어도 좋다.”
애한테는 너무 어려운 말인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아 보니 나이 차이, 외모, 성격의 궁합 같은 건 아무리 맞춰 봤자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으며 중요한 건 오직 인간의 됨됨이뿐이었다. 이것만 괜찮은 사람이라면 나머지는 차차 조율하면서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간단해 보이는 저 세 가지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초윤 자신도 알고 있었다. 혼자서 이런 사람이 좋다고 아무리 주절거려 봤자 인생에 단 한 명 만나기도 힘들다는 것 역시 뼈저리게 체감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현실 세계에서 겪었던 인간관계들을 떠올리며 한숨만 삼키던 찰나 들려온 천오의 목소리는 날벼락일 수밖에 없었다.
“성군을…… 좋아하시는 겁니까?”
“⎯⎯큽! 흠, 어,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이냐?”
“주관이 뚜렷하고 쉽게 휘둘리지 않으나 다른 이들의 의견 또한 묵살하지 않고…… 아랫것들을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통제하며 권력을 세우려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하기보다 현명한 방식을 택하는 것은 어진 통치자의 요건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특히 남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는 그리 말하면 안 된다. 무심서에서는 괜찮지만, 쉬이 말하는 것이 입버릇으로 붙을 수 있으니 필히 조심해야 해. 최소한 네가 황실의 눈과 귀에서 자유로워진 다음에야 군(君)과 통치자를 입에 담거라.”
더군다나 이 저택은 황실에 한 발을 걸친 하오문의 재산이었으니 괜히 겁이 났다. 초윤은 먼저 아이의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까딱하면 황실 모욕이 됐을 법한 말을 들은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비정한 마교 교주 염라군 주천오로 자라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종 언급한 것 같기도 했다. 단언컨대 사이비 교주보다는 성공적인 리더가 되렴!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다.
‘하지만 그냥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성인으로 키워 내는 게 낫지, 기억도 안 나는 군주론을 줄줄 읊어 줄 순 없잖아! 잠깐만, 그보다 난 그럼 애를 내 이상형으로 키우려 한 사람이 되는 거야? 이런 미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향을 받는다면 당연히 다들 좋아하지 않겠느냐.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자세에 불과하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알아챈 초윤이 허둥지둥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잘 뜯어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또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등 뒤로 식은땀이 쭉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애한테 인생 얘기 좀 그만해야겠다. 애를 독립적으로 키워 내려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내 사상만 주입하게 되면 어떡해. 설령 본인은 순수한 노파심에 건네는 말이라고 해도 아이에겐 다를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했다.
일상처럼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이토록 역동적이고 아슬아슬한 걸 보면 역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육아가 맞는 것 같았다. 초윤은 실수했다는 생각에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천오를 놓아준 뒤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인간 된 도리와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너는 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째서입니까?”
“이미 너를 귀애하고 있으니 애써 내 눈에 들 생각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천오의 인성 교육은 8년째 노력하는 중이고, 이에 나름의 성과도 보았다고 자부했다. 애가 원작 속의 염라군 주천오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산뜻한 첫사랑을 시작했는데 아무렴! 이쯤 되면 뭔가 해내긴 한 것 같았다.
초윤은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스스로의 노고를 애써 칭찬하며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그런데 초윤의 말을 들은 천오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시선을 내리고 갈팡질팡 땅바닥을 훑으며 입술을 여닫는 것이 아무래도 못다 한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제가 궁금한 것은…….”
“…….”
“……아닙니다, 스승님. 스스로 조금 더 고민한 뒤에 여쭙겠습니다. 새벽바람이 차니 이만 들어가십시오. 쾌차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내일도 먼 길을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무언가 말하려던 천오는 곧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이고 뒤돌아 본채로 돌아갔다.
초윤은 어안이 벙벙한 채 홀로 남겨져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결국 연애 조언은 하나도 못 했잖아?’
가만 생각을 해 보니 그놈의 도리 얘기만 또 줄기차게 해 버렸다. 애는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알고 싶었을 게 뻔한데, 거기에 대고 올바르게 강한 사람에 대한 일장 연설만 했으니 궁금증이 풀렸을 리가 없었다. 잘 말하다가 갑자기 딴 길로 새다니. 이건 명백한 초윤의 실수였다.
‘……그리고 아버지 얘기도 못 했잖아?’
흑망검 주역이 마교 지하에 갇혀 있다는 얘기도 틈을 봐서 꺼냈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착잡한 마음으로 깨어 있다가 아이의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몰래 보러 나간 게 전말이었건만 건진 거라고는 애가 벌써 이만큼이나 컸다는 새삼스러운 기분밖에 없었다. 몽정이 당연한 생리 현상이라는 사실도 잘 전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초윤은 결국 달빛 드는 후원에 덩그러니 남은 채 착잡한 마음으로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주저앉아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체면 중시 육체에 들어와 있다는 것까지 다 서러웠다.
‘애는 쑥쑥 자라고 있는데 내가 덜 자라서 정말 어떡하냐…….’
육아는 정말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 같았다.
약간의 뿌듯함과 맞바꾸어 앞날만 막막해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