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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88)화 (88/257)

88화

미묘한 침묵 속에서 제갈설린은 허벅지 위에 모은 양손을 슬며시 주먹 쥐었다. 상대는 가늠할 수 없는 실력을 갖고 갑작스레 나타났으며, 미약한 호의가 느껴진다고는 해도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긴장감이 계속되는 와중에 그가 입을 열었다. 간략한 두 마디였지만 제갈설린을 털 세운 고양이처럼 만들기엔 충분했다.

“정화석을 회수한 것 같구나. 장담한 것치곤 아무런 변화도 없었겠지.”

“무슨……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네 뒤로 굴러떨어진 게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나직하게 떨어진 대답에 제갈설린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책상에서 떨어진 정화석 몇 개가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입으로 불평하던 것을 어떻게 알았냐며 묻다니 아직 이성을 되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설린은 정화석을 더듬더듬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뻣뻣하게 굳어 버린 사고력을 애써 깨웠다.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은 자연스럽게 예민해졌다.

“소녀가 이것을 어디에 왜 심어 두었는지도 알고 계신 것 같아 여쭙는 것이옵니다.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오셨다면 확실히 정체를 밝히고, 아무도 모를 정보를 입수한 경로도 함께 말씀해 주십시오.”

“…….”

잠시 아무 말도 없던 불청객은 천천히 면사 바깥으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죽립의 끄트머리를 잡아 망설임 없이 벗었다. 가장 먼저 올려 묶었던 새하얀 머리카락이 휘청휘청 풀어지며 허리께에서 흔들렸고, 다음으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단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음전하게 눈을 내리뜨고 있던 그가 시선을 올려 제갈설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떠한 동요나 일렁임 하나 없는 연갈색 눈을 마주한 설린은 이유 모를 충격으로 숨을 삼켰다.

죽립을 옆에 내려놓은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린을 다독였다. 설린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다시 말하지만, 위협으로 느껴질 만한 언행을 해서 미안하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안심이 된다면 얼마든지 알려 주마.”

“……대협께선 지금 제갈세가 수백 년의 정수가 담긴 진법을 파훼하고 소녀의 앞에 나타나셨사옵니다. 이것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소녀는 매일 밤을 불안에 떨며 잠들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러니 최소한 대협께서 어떤 위명을 갖고 계신지 새겨 두고 싶을 뿐이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어딘가에 말할 필요도, 생각도 없을뿐더러 알아도 들어올 수 없게끔 만들어 두지 않았느냐. 나와 같은 무공을 나와 같은 수준으로 익힌 게 아니라면 ‘알고 있는’ 정도로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제갈설린이 입을 꾹 다물고 분하다는 듯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불청객의 말마따나 설린의 침소를 빽빽이 두르고 있는 진법은 제갈세가의 수많은 진법가들이 긴 시간을 고민하며 만들어 낸 작품을 설린의 능력으로 정교하게 조립한 것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천재들도, 심지어 제갈세가의 일인자인 제갈소서마저도 혀를 내두르며 찬사를 건네고 설린이 세가 내에서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계기가 된, 의미 있는 역작이었다.

제갈설린은 화가 나면 주변을 분간하지 못하고 입으로 감정을 쏟아 내는 버릇이 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을 감추며 살아가야 하는 제갈세가의 인간에게 이는 상당한 약점이었다. 어떻게든 고치려던 시도는 결국 큰 결과를 보지 못했고, 다른 관점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설린의 말이 흘러 나갈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원천 차단하면 될 일이었다. 설린은 만나는 이를 철저히 제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철저히 선발하고, 병약한 몸을 핑계로 바깥에 얼굴도 잘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심어 놓은 사람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드문드문 전해 듣기만 할 뿐 그 밖에는 본인의 능력을 키우는 데에만 부단히 매진했다.

중요한 건 감추는 것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계획하는지 남이 알지 못하게 해야만 한발 앞서갈 수 있었다.

무공도 익힐 수 없는 몸이니 다른 이들보다 두 걸음은 멀리 봐야만 꼭두각시처럼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틈을 보이고 우수한 모습을 잃는다면 가축처럼 살다가 가문 사이의 회합을 위한 도구가 될 게 분명했다. 제갈설린은 본인의 인생이 그렇게 쓰이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노력했고, 또 노력했는데…….

그 첫걸음인 개인의 영역을 불쑥 침범해 놓고선 걱정하지 말라니.

저 불청객이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도 모르고, 그 무공이 진법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도 모르며 세상의 몇 명이 그것을 공유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제갈설린은 단호한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설린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불청객의 어깨가 살짝 내려갔다. 얼굴에 비치는 감정이 없으니 감히 예단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쩐지 한숨을 삼킨 것 같았다.

“네 입의 무게를 믿겠다. 다른 이에게 알려 봤자 터무니없다는 말만 들을 테니 스스로 자중하거라.”

“소녀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아 확언을 드릴 순 없지만 가능한 한 노력하겠사옵니다.”

“……허명이지만 약선이라 불리고 있다. 이름자는 초윤이다.”

“……예?”

초윤, 약선 초윤.

약선 초윤?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 제갈설린의 몸이 쩡 얼어붙었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지만 약선 초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갈세가는 비상한 머리를 주력으로 하는 가문이었고, 이 머리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충분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주요한 무림인의 이름과 특징은 정보를 취급하는 개방과 하오문에 못지않게 제갈세가도 중요하게 취급했으며, 제갈씨의 어린아이들은 아무리 늦어도 다섯 살쯤 되면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수백 년 역사와 현재에 이르는 인물들을 달달 외우게 되었다.

그리고 약선 초윤은 그중에서도 초반부에 배우는 인물이었다. 이백 년이 넘도록 살아왔고 현경을 넘겼으리라 추정되며 백오십 년 전 광천마제, 즉 암존을 봉인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 숨 한 번으로 수백의 절정고수를 죽이고 손길 한 번으로 삼도천 너머의 이를 데려오는 사람.

독과 약을 새로이 정립해 살아 숨 쉬는 전설이 된 사람, 진법으로도 능히 제갈세가를 뛰어넘는 사람, 언감생심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고 요구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절대로 척을 져서는 안 되는 사람.

현명했던 증조모의 말씀을 떠올린 제갈설린의 고개가 느릿느릿 밑으로 툭 떨어졌다. 크게 뜬 눈은 초점 없이 흔들리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듣고 자란 약선 초윤의 행적이 떠오를수록 이제껏 자신이 보인 행동만 상기됐다. 제갈설린은 동경에 앞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항상 되짚는 성격이었으며, 이에 따라 머릿속을 왕왕 맴도는 건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큰일 났다.’

정말 큰일 났다. 저 말대로라면 제갈설린은 방금까지 그 약선 초윤에게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부리며 이해와 변명을 요구한 것이었다. 상대가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제갈설린의 집안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미처 고려하지 않은 채!

제갈설린의 안색이 점차 하얗게 질렸다. 저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설린의 본능과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하얗게 새었으나 노인처럼 푸석거리진 않는 머리카락, 주름 한 줄 없으나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 독하지 않으나 제갈설린이 앉아 있는 곳까지 은은하게 퍼지는 약 향, 위협적이지 않으나 고강한 무공.

모든 게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약선 초윤이어야 했다. 약선 초윤이 아니라면 그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갈설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가장 좋은 것은 약선 초윤의 방문이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실례임을 조심스럽게 강조해 자신의 무례를 마땅하다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린은 아직 충분히 교활하지 못했다. 무력한 자신을 드러내며 새살거리고 동정심을 자극하기엔 본연의 정직함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을 만나 본 경험부터 많지 않았고 가식투성이 사람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결국 설린이 선택한 것은 정공법이었다. 설린은 공손히 모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나부죽이 몸을 숙여 엎드렸다.

“무례를……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약선 대협. 부족한 식견으로 말미암아 한눈에 알아 뵙지 못하고 주제 넘는 소리를 지껄였사옵니다.”

“다시 말하지만 언질도 없이 함부로 네 방에 들어온 쪽은 나다. 사과라면 이쪽이 해야지. 이 일로 너와 네 주변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할 생각은 일절 없으니 일어나거라. 그리 구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

설린은 초윤의 말을 듣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예의랍시고 미적거리며 두어 번 더 권유를 무르기엔 약선 초윤의 불편하다는 말이 너무나 진심처럼 들렸다. 그러고 보니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 것 같기도 했다. 속세와 동떨어져 사는 은거 기인들은 대부분 번거로운 말장난을 싫어했다.

설린이 차마 그를 마주 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떨어트린 채 가만히 앉아만 있을 때, 초윤의 말이 다시 한번 설린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정화석 이야기를 마저 하자꾸나.”

“……예, 약선 대협.”

“모용세가의 막내 공자가 네게 정화석 한 뭉치를 주며 이것을 섬서성에 심으라 하더냐? 그러지 않으면 참변이 일어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느냐?”

그것을 또 어떻게……. 제갈설린은 습관적으로 되물으려던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약선 초윤이라면, 이자가 정말 그 사람이 맞는다면 한낱 어린 진법가에 불과한 제갈설린에게 이를 물어볼 자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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