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비록 제갈설린이 모용서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도, 그 뒤로 모용서에 대한 이야기는 입도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래서 약선 초윤이 둘의 대화를 어떻게 알았는지 짐작 가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고 해도 절대 캐물어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제갈설린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솔직하게 수긍했다. 약선 초윤은 그에 그치지 않고 연이어 설린의 심중을 꿰뚫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무시하기에는 일이 너무 크고, 귀하다는 정화석까지 양손 가득 받게 됐고…… 하지만 세가의 모두에게 알리자니 겨우 그런 조그만 공자의 말을 듣냐며 비웃음을 당할 게 뻔하니 네 선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맞더냐.”
“맞…… 맞사옵니다.”
“정화석을 주고 대비하라고 한 의도를 파고들어 섬서성에 극독이 퍼질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장장 보름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비했으나 오늘 모아 온 정화석에 독기라고는 이만큼도 없으니 그리 노발대발 화를 낸 것일 테고.”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뛰던 일각 전의 자신을 떠올린 설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래서 화내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약선 초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온갖 욕을 다 쏟아 내며 집기를 뒤집어엎고 노성을 터트렸을 게 분명했다.
순식간에 기가 죽은 설린이 미약한 목소리로 웅얼웅얼 물었다.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불평과 미약한 치기가 섞인 질문이었다.
“어떻게…… 그리 잘 알고 계신 겁니까? 언제부터 지켜보신 것이옵니까?”
그 보름 내내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보고 있던 게 아니고서야 알 수가 없는데……. 단 한 명의 유능한 시비에게도 의도를 다 말해 준 적 없는 설린이 울적하게 물었다. 자신의 생각을 감추도록 교육받는 제갈세가에서도 특출하다는 말을 듣고 자란 설린에겐 꽤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설린의 예상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네 작은 머리가 생각했을 법한 내용이야 굳이 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농락당했다 생각하고 불쾌했겠지. 그렇지 않더냐.”
“……맞사옵니다.”
태연하고 평탄한 어조로 배를 갈라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속을 알 수 없다, 지력을 단정할 수 없다는 말만 늘 듣고 자란 제갈설린은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은 기분으로 멍하니 긍정했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패배감 사이로 기묘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왜 설렘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린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은 알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초윤이 대뜸 영문 모를 말을 던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용세가의 막내는 네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정화석을 새까맣게 물들이고도 남을 일은 이미 벌어졌다.”
“예? 하지만 섬서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내가 독의 원인을 전초제근 했으니 산 밑으로 퍼지지 않은 게지. 우연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이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기이할 정도로 피해가 없어 보았더니 정화석의 흔적이 보이더구나. 그를 따라 찾아본 끝에 네가 있었다.”
설린이 설핏 표정을 굳혔다. 설린 역시 독을 퍼트리는 세력이 있을 수 있다 가정하고 이를 잡아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헛짓거리를 한다는 오욕을 쓰게 될 것을 각오한 뒤 하오문과 개방을 끌어들여 지켜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설린에게 남은 건 빈약한 사유 재산과 허름해진 신경 줄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일 수 있었다. 만일 정말 무언가가 보였다면 이는 섬서성을 적대시해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 이들이 실재한다는 증명이 될 터였다. 그럼 다치는 사람과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큰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하니 모용 공자를 불같이 비난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차라리 잘됐다 싶었는데…….
약선 초윤이 그 원인을 제거했다니. 원인이 있었다니. 정말로 독이 풀릴 뻔했고, 여러 우연이 겹쳐 이를 피했을 뿐이라니.
‘……곧장 회수하지 말 걸 그랬다.’
설린은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본인의 과오를 다시 돌이켰다. 아무런 변화가 없고 속은 것 같다고 해서 냉큼 정화석을 회수하는 게 아니었다. 최소 보름은 더 유예 기간을 두고 지켜봐야 했다. 이번에는 약선 초윤이 끼어들어 섬서성을 도왔지만, 다음에도 이런 우연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유 없이 믿음이 간다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정보라고 해도 일축하지 말고 꼼꼼히 지켜보는 게 남는 장사인데, 하마터면 조급함에 큰일이 날 뻔했지 않았나.
빠르게 반성을 마치고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갱신한 설린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조금 절박하게 물었다.
“섬서성 전역이라면 세력이옵니까? 누구입니까?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한 건지 알아내셨사옵니까? 아니, 전부 정리하셨다면 본거지를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단서가 될 만한 것을 회수하고 쫓는 것은 제갈세가가 할 수 있사옵니다.”
“음.”
짤막한 침음을 삼킨 초윤이 가라앉은 눈을 지그시 밑으로 내렸다. 왜 저러는 건지 모를 반응에 애가 타는 쪽은 제갈설린이었다. 설린은 당장이라도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빨리 알려 달라며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그의 생각이 다 정리되길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그가 고민 끝에 괴상한 말을 내뱉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누군가 뒤에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고, 들어온다 해도 내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데.”
“……들어오다니요?”
“독의 원인은 짐조였다. 진령 산맥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강에 잠긴 짐조의 시체가 극독을 물에 풀어 내고 있었지. 인면수사의 배 속에 있을 때 꺼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두었으면 상류 물이 고스란히 짐조의 독액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짐조와 인면수사요?”
순간 제갈설린은 약선 초윤이 사는 세상과 자신이 사는 세상이 같은 곳은 맞는 건지 고민했다. 평생 세가 밖을 나가 보지 못한 제갈설린에게 짐조와 인면수사는 장난 같은 요괴 모음집에서나 볼 수 있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그조차도 다섯 살을 넘기면서 다시 펴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것이 정말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쉬이 믿기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런데 설린의 의아한 반응을 본 초윤이 도리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한 방울만 먹어도 내공이 일 갑자는 증진되는 영약도 있고, 한 번만 발라도 패여 나간 살점이 다시 돋는 고약도 있는데 그깟 짐승 하나 없겠느냐. 사람 사는 곳에 쉬이 내려오지 않고 내려온다 해도 다른 이들이 암암리에 치울 뿐이지, 다 있다. 짐조가 아니면 더 무서운 일이지.”
“그…… 그렇군요. 예, 맞사옵니다.”
어머니는 이를 알고 계셨을까?
한참 전에 접어 둔 상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묘한 설렘이 설린을 감쌌다. 설린이 꿇어앉은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윤은 말을 이었다.
“시체는 잘 처리했으나 그 과정에서 약간의 독이 물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그것만으로도 산맥이 당분간 몸살을 앓게 되었으니 얼마나 극악한 독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급한 대로 이를 정화할 수 있는 약낭을 만들어 흩뿌리며 내려왔는데 다행스럽게도 독기가 퍼지지 않았더구나.”
“아…… 그렇다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마자 재깍 정화석을 회수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을 것 같사옵니다.”
“네 손으로 만들어 낸 우연이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만큼이나 철저히 들어 준 것도 네 복이다. 그러니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자책하는 짓은 관두어라.”
또다, 또! 자신의 아슬아슬한 실수가 드러날 때마다 자책부터 하고 있던 설린이 지레 찔리는 마음에 숨을 삼켰다. 정말 약선 초윤에게는 한낱 어린아이인 자신의 머릿속 따위 한눈에 보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미숙한 탓에 들키고 마는 건지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올려다보자 처음과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한 초윤이 부드럽게 설린을 달랬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말투도 딱딱하기 그지없었으나 설린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네 판단은 옳았다. 너는 농락을 당한 것도, 서툴게 속아 넘어간 것도 아니다. 그저 중간에 나쁘지 않은 방향의 변수가 생겼을 뿐이니 모용의 막내를 너무 미워하지도, 스스로를 타박하며 화를 내지도 말거라. 이미 얘기했지만 네 몸에 좋을 것 하나 없다.”
“……예, 약선 대협.”
“그럼 이제 배후에 관한 이야기다만.”
초윤이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느릿한 눈짓 하나, 느긋한 손짓 하나에서 기품이 묻어 나왔다. 경계하던 게 언제냐는 듯 초윤의 언행에 감화된 설린의 눈에 그의 모든 것이 가감 없이 비쳤다. 설린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령 산맥의 깊숙한 골짜기를 흐르는 강에 짐조의 시체가 잠겼다고 말했지. 정확히는 진령 산맥 깊숙한 곳에 있는 불귀 산맥의 강이다. 여섯 개의 산 중 원익산과 천궤산 사이에 있는 연파강에 짐조가 있었다. 문제는, 내가 불귀 산맥에서 머무른 몇십 년 동안 한 번도 짐조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짐조를 잡아다 불귀 산맥에 풀어놨다고 보아야 적합하다만, 이게 정말이라면 더욱 난처해진다. 그 짐조를 잡아서 불귀 산맥에 들어와 내 눈을 피해 누볐다는 소리 아니더냐.”
불귀 산맥에 관한 이야기는 요괴 모음집을 읽었을 시기에 조모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한 번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의 불귀(不歸)로, 자연적인 진법이 둘러싸고 있어 찾는 것부터가 어려울뿐더러 온갖 요괴와 악귀들이 가득한 전설 속의 장소. 온갖 영약과 보물로 가득하지만 목숨을 내버리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찾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 곳.
약선 초윤은 그런 곳에서 수십 년 동안 유유자적 살아왔으며, 만일 이 일의 주동자가 있다면 그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심성에 고강한 실력까지 갖추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