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초윤의 곤란한 반응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깨달은 제갈설린의 가슴에 두려움이 번졌다. 하지만 영특한 설린은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사실을 다급히 말했다.
“어쩌면 약선 대협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익힌 무공의 특성이나 기물 때문일지도 모르옵니다. 종류에 상관없이 독을 중화시키는 정화석도 있는데, 기척을 숨겨 주는 기물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 않사옵니까.”
“……그래, 맞는 말이다.”
“기물은 상당히 종류가 많고 아직 무엇이 남아 있는지조차 모르니 분명 그중 하나일 것이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약선 대협. 대협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사옵니다.”
“알았다. 내가 직접 찾아볼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거라.”
신경 쓰지 마라, 딱 일축해 잡아 누르는 말에 열심히 약선을 위로하던 설린이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은 초윤을 위무할 주제도 되지 않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추켜세우면 도리어 불편하게 여길 것 같았다.
어떻게 얼버무려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자, 설상가상으로 초윤이 옆에 놓인 죽립에 손을 뻗었다.
“오해는 푼 것 같으니 이만 가겠다.”
“자, 잠깐만요!”
설린은 용건이 끝나자마자 칼같이 자리를 뜨려고 하는 초윤을 반쯤 무의식적으로 붙잡았다. 연갈색 눈이 무슨 일이냐는 듯 설린을 돌아보았고, 설린의 조그만 머리는 더할 나위 없이 빠르게 돌아갔다.
설린은 변명이 떠오르는 대로 더듬더듬 내뱉었다.
“감사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으니 차라도 한 잔 대접할 수 있도록…….”
“필요 없다.”
“지, 진법도 알고 싶사옵니다. 보완할 점이 있었사옵니까?”
“딱히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이시옵니까?”
“돌아가서 남은 흔적이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다.”
“그…….”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왜 그를 불러 세웠는지, 어째서 그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왜 더욱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지, 이 일과 하등 상관없는 것이 궁금한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웠다. 그래, 아무래도 자신은 아쉬운 것 같았다. 비상한 머리로 우쭐거리며 뽐내기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세가 사람들 틈에 끼어 살다가 더 뛰어난 능력을 갖고도 담백하게 행동하는 이를 마주하고 있자니 어딘가 숨통이 트였다.
굳이 찾아와 자신과 상관없는 오해를 해명해 주는 것부터 초윤이 지니고 있는 올바른 심성이 드러났다. 자신이 모르는 수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는 점도, 자신은 평생 하지 못할 경험을 이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 왔다는 점도 전부 신기했다.
불청객이라는 생각에 예민하게 경계하던 태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초윤은 설린의 불안을 훌륭히 종식시키다 못해 다른 감정을 피워 냈다.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을 어떻게 잡아야 좋을지 쭈뼛쭈뼛 고민하던 제갈설린이 이윽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하옵니다.”
“무엇이?”
“……짐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옵니다. 소녀가 읽은 서책에서 나온 짐조는 그저 커다란 새의 모습이었사옵니다. 깃털 하나만 스쳐도 사람을 죽이는 새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이옵니까?”
설린은 이번에도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부끄러움을 꾹 참고 눈도 못 마주친 채 머뭇머뭇 묻자, 일 장 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긴 숨을 다섯 번 쉴 동안에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설린은 모아 잡은 손을 울적하게 꼼지락거렸다. 역시 자신이 너무 뜬금없고 무례하게 군 것 같았다.
그때, 설린의 내리깐 시야에 하얀 옷자락이 천천히 들어왔다. 어느새 설린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와 앉은 초윤이었다.
“붓과 종이가 있느냐.”
“예? 예. 여기 있사옵니다.”
아무런 단장도 하지 않아 사르르 흐트러지는 하얀 머리카락, 표정을 찾진 못해도 냉정하다 단언할 수 없는 맑은 얼굴. 설린의 뒤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자 그의 모든 것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설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린 채 가까워진 초윤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허둥지둥 뒤를 돌아 책상에서 지필묵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초윤은 설린과 자신의 사이에 종이를 깔고 붓을 들어 유려하게 선을 그어 내렸다. 간결하고 부드러운 붓질이 모이고 모여 새 형태의 얼개를 잡았다.
“짐조(鴆鳥)는 얼핏 보면 선명한 녹색의 독수리처럼 생겼다. 부리는 구리색으로 빛나고, 눈은 붉다. 깃털을 전부 뽑으면 검은색 몸통이 보이는데, 깃에만 독기가 있는 것이 아니니 필히 조심해야 한다.”
“예, 예에…….”
“날개를 펄럭이며 날기만 해도 그 밑에 있는 식물이 시들어 죽을 정도로 독기가 강하며 주식은 살모사와 칡이다. 주로 광동성에 살고 있다. 짐조의 독은 무미무취에 물에 잘 녹고, 섭취하면 오장육부를 순식간에 썩게 만든다. 눈을 까뒤집고 죽는 것은 한순간이다. 인면수사나 다른 요괴도 궁금하더냐?”
“예? 예. 궁금하옵니다.”
상세한 설명을 줄줄 토해 내며 그림을 다 그린 초윤이 종이 한 귀퉁이에 짐조라는 한자를 정갈히 적은 뒤 다른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단 뱀을 그리며 이번에도 그에 대한 해설을 막힘없이 일렀다.
이 사람은 사실 가르치는 데에 굉장히 익숙한 것 아닐까. 설린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요괴 수업을 쫓아가면서 문득 생각했다. 물론 정말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이렇게나 자세하게 알려 줄 줄은 몰랐다. 자신의 스승과 비교해도 어디 하나 뒤지지 않는, 오히려 더 친절하게 들리는 강의였다. 내용은 상상의 동물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요괴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불귀 산맥에서만 찾을 수 있는 영험한 식물들로 바뀌었다. 초윤은 약선이라는 위명에 걸맞게 불귀 산맥에만 있는 수많은 영약을 알고 있었다. 흠잡을 곳 없는 그림 실력을 발휘해 알아듣기 좋게 설명을 곁들였고, 지력이라면 뒤지지 않는 제갈설린은 이를 전부 흡수했다.
설린은 반 시진 만에 평생 가 본 적도 없고 갈 일도 없는 불귀 산맥의 이름 모를 영약 수십 가지를 알게 되었다. 쓰지 못할 지식이지만 쓸모없다 여겨지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에 설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이만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초윤의 옷자락을 손 내밀어 붙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은 눈치만 보던 때와는 다르게 편안한 친밀감과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초윤이 그려 준 많은 그림을 손에 쥔 채,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설린이 말했다.
“염치없으나 대협께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사옵니다. 부족한 몸이니 무공은 바라지 않사옵니다. 그저 대협의 도움을 받아 견문을 넓히는 경험을 하게 되어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소녀는 다음번에 다시 대협을 만나 뵐 수 있는 것이옵니까?”
“…….”
소박한 무명천이 스르륵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약선은 아무런 대답도, 기척도 없이 왔을 때처럼 조용히 방을 나가 사라졌다.
하지만 홀로 남은 제갈설린은 조금 허전할지언정 전혀 우울하지 않았다. 짧게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간 온기가 오래도록 남아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설린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매만지고 그림이 그려진 종이 뭉치를 곱게 모아 수납장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책상과 바닥에 널브러진 정화석도 주머니에 다시 담아 바닥 밑 금고에 보관했다. 일련의 정리가 이어지는 내내 설린은 얼굴 가득 들뜬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명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는 제갈설린의 가슴에 동경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싹을 틔웠다.
본래의 운명대로라면 태양을 향했을 떡잎은 고요히 뜬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
요즘 애들은 굉장히 똑똑하구나…….
초윤은 제갈세가를 벗어나며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 대책 없이 ‘얘! 이건 내가 개입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모용 공자를 미워하지 말렴!’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불쑥 들어갔다가 밑천만 탈탈 털리고 나온 것 같았다.
천오의 영특함은 원작의 최종 보스이자 공인된 천고기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런 천재의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꽤 두려웠지만 어쨌든 이해할 수 있었다.
사영이도 만만찮게 똘똘했지만 스승의 앞에서는 모자란 점을 감추려 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상하다고 느끼진 못했다.
그런데 오늘 제갈설린까지 만나 보고 나니 영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열세 살 때 뭘 했더라?’
열세 살이면 초등학교 6학년 아닌가? 아무 생각 없이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방과 후에는 태권도 학원이랑 피아노 학원을 갔던 것 같은데…….
무협지 아이들은 열세 살쯤 되면 자신의 사람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도시 하나의 정보를 다 모으고 감시하는구나……. 설린이 유난히 조숙하고 영리한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벌써부터 뭔가 모사를 하는구나.
자신이 키운 아이들은 열세 살에 요괴가 득시글거리는 산을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성인을 월등히 능가하는 내력을 쌓고 방대한 약학을 익히고 있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초윤은 얼떨떨하게 감탄했다.
무협지를 읽을 때에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다들 현대라면 매스컴을 타고도 남았을 천재라는 사실이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