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진법도 상당했지……. 그게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보자마자 제법이라는 생각은 확 들었어.’
세상의 이치와 인과를 비틀어 새로운 세계의 법칙을 만들어 내는 일을(이것도 사실 무슨 소리인지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열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해낸다니 대단하지 않을 리 없었다.
초윤은 제갈설린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빼곡하게 별채를 감싼 진법을 보고 감탄하며 한참을 고민했다. 방문을 걸어 잠가 놓고 ‘들어오지 마!’라는 종이를 걸어 둔 아이의 방에 벌컥 쳐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물론 제갈설린이 이토록 강박적으로 진법을 쳐 둔 이유는 원작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불쑥 나타나는 건 실례인 게 확실했다.
평소라면 아이의 사생활과 의지를 존중해 대뜸 발길을 들일 리 없는 초윤이 결국 신념을 꺾고 무모한 선택을 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동관을 벗어나야 한다. 웬만하면 최대한 빨리!’
지금 동관시에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오해를 풀어 주고 온 모용서였다.
‘나든, 천오든 회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주인공을 만나면 일이 제대로 꼬인다. 천오는 벌써부터 어른의 태가 나기 시작해서 위험해. 주인공은 회귀 전에도 염라군 주천오를 일방적으로 본 적이 있었단 말이야. 어쩌면 알아차릴지도 몰라.’
에이, 동관시가 얼마나 넓은데 설마 만나겠어? 이런 마음가짐으로 태평하게 놀다가 갑자기 마주치는 것보단 차라리 처음부터 경계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초윤은 동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귀를 쫑긋 세운 토끼처럼 주위를 살피고 또 살폈다. 주인공 모용서나 그 형 모용단,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이 행여나 주위에 있진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이미 원작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천오가 주인공 일행과 만나면 안 되는 이유는 꽤 사소하고 절박했다.
‘이미 죽었어야 할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정을 살린 이상 원작을 운운할 순 없게 됐지만 그래도 주인공의 행보는 비슷하단 말이지. 이때 주천오가 갑자기 순하고 착한 열다섯 꼬맹이가 되어서 나타나 봐. 주인공의 동선을 정말 예측할 수 없어진다고.’
회귀하기 전 우연히 보게 된 악의 수장. 주인공은 이번 생애에서는 절대 그에게 세상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어렸을 때부터 칼을 갈아 왔다. 반칙이나 다름없는 지식을 이용해 파죽지세로 성장하고 있는 주인공의 머릿속은 오로지 ‘마교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는 목적으로 가득 차 있을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미래의 마교 수장이 멀뚱히 나타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신검 같은 무기도, 영험한 능력의 신기도 없이 스승이 쓰던 검 하나만 달랑 들고 있는 서문천오를 본다면.
‘후환을 남기지 않는 주인공의 성격상 최소한 칼부림이야. 그리고 마교를 향해야 하는 칼날이 이쪽을 겨눌지도 몰라. 나와 마교를 연관 지을 수도 있고, 나도 회귀한 게 아닌지 의심할 수 있어.’
어느 쪽이든 골치 아파진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서둘러 동관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불귀 산맥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제갈설린과 이번 일의 배후에 관해 대화하던 중 초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줄기 의문 때문이었다.
‘명백히 의도를 가진 이들이 짐조를 불귀 산맥의 상류에 담갔다고 하면, 원작에서 그걸 꺼내 사건을 해결한 건 누구였을까?’
<귀환영웅> 속 짐조의 독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이 한 일은 오로지 ‘제갈설린에게 정화석을 넘기고 조언을 주는 것’뿐이었다. 제갈설린은 주인공의 말을 듣고 섬서성의 곳곳에 정화석을 박아 넣은 뒤 보름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를 회수하자 보인 것은 극악의 독을 흡수해 새까매진 돌이었다.
만일 이때 연파강에 여전히 짐조가 가라앉아 있었다면 정화석을 꺼내는 즉시 다시 강이 오염되어야 마땅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가 인면수사의 배 속에 있는 짐조의 시체를 치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초윤’이 아닐 터였다.
‘초윤이 했다면 진즉 했겠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야. 누군가가 불귀 산맥에 들어가서 시체를 회수한 게 확실해. 가능성은 두 가지야. 짐조를 풀어놓은 배후가 목적을 달성하고 거두어들였거나, 아니면 배후를 아는 또 다른 사람이 슬쩍 가져갔거나.’
그리고 이 사안 또한 어느 쪽이든 상당히 골머리를 썩일 게 분명했다. 일단은 ‘누군가 이 일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다’는 사실이 확정되는 것부터 앞날 생각에 정신이 아득했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복잡해지는 머리에 한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초윤은 점차 울적해지는 기분을 애써 감추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땅을 박찼다.
‘천오를 데리고 나온 뒤에 천천히 생각해 보자. 먼저 불귀 산맥으로 가야 뭔가 할 수 있겠지. 온 산을 다 뒤집어엎게 생겼네. 초윤이 추적이나 추리에도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동관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희의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랐던 터라, 천오는 객잔에서 초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번화가에 도착해 인파 사이에 자연스레 끼어드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윤은 죽립을 고쳐 쓰고 기척 없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이윽고 객잔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초윤은 느껴지는 기척에 설핏 얼굴을 굳혔다.
정확히는 있어야만 할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객잔 내부, 분명 짐을 풀었던 3층의 방 하나가 텅 비어 있었다. 조금만 예민하게 세워도 안을 돌아다니는 일반인의 기운까지 느낄 수 있는 몸이다 보니 천오의 부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사색이 된 초윤이 허둥지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초윤을 중심으로 파동 같은 기운이 퍼져 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초윤은 아이를 찾는 데에만 정신없이 몰두했다.
다행스럽게도 초윤과 비슷한 성질의 기운을 가진 천오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동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천오의 곁에 있는 한 사람이 느껴졌다. 얼핏 보기엔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평범하고 미약한 정기였지만 ‘초윤’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천오를 감지하기 위해 퍼트린 기운으로 그 작은 인물을 감싸 공명할수록 내부에 꽁꽁 감춰 놓은 막대한 양기가 느껴졌다. 마치 영롱하고 환한 빛을 내는 작은 태양을 한입에 삼킨 것 같았다.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주로 어디에서 사용되던 묘사인지를 떠올린 초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차례 돌풍처럼 후폭풍이 생길 정도로 재빠르게 신형을 날린 초윤은 진심으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계속 상정해 둔 최악의 사태만, 상상도 못 한 최저의 형태로 나타나는 거지?
◇
스승의 말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어 하는 서문천오가 왜 초윤의 분부를 어기고 객잔 밖에 나가 있었는지 의문이라면, 천오가 스승과 함께 서안에서 동관으로 길을 떠난 날부터 되짚어야 했다.
몽정 사건이 일단락되고 선잠을 자고 일어난 천오는 스승의 용무를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었고, 깜깜한 시간에 동관에 다다른 스승은 객잔을 잡아 짐부터 풀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가르칠 때 말고는 말수가 적어 내내 조용했던 스승이 천오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무심서로 돌아가면 네 방에서 자거라.”
“……예?”
열한 살, 처음으로 홀로 자기를 시도했을 때 천오는 결국 적막한 밤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을 들고 나왔다. 자작을 하고 있던 초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다시 그의 방에 몸을 뉘였다. 그 뒤로는 스승도 딱히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천오도 자연스레 스승과 같은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눈꺼풀 너머로 일렁이는 호롱불의 옅은 빛과 작은 인기척이 천오에겐 숙면을 돕는 목근이며 유백피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방을 나가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자는 도중 스승님께 무언가 결례를 저지른 것입니까? 죄송합니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스승이 단정한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하지만 천오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초윤이 신경 쓰지 말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려 하던 일을 더듬더듬 내뱉었다.
“혹시 모, 몽정 때문입니까? 불쾌감을 끼쳐 드린 겁니까? 다시는 자는 중에도 풀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스승님.”
“그런 것이 아니래도. 내 말을 허투루 듣는구나.”
그렇지만 이 변화를 불러일으킨 원인은 분명 존재할 터였고, 최근 들어 있었던 일 중에 짐작이 가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스승이 누차 당부한 것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직까지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천오는 여태껏 스승을 상대로 그런 꿈을 꾼 것이 당연한 일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나를 고민하면 또 다른 반박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애써 꽉 눌러 담아 둔 혼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머릿속을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 스승의 손이 천오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아 음울한 감정에서 빠지지 않도록 건져 올렸다. 천오는 그의 온기에 언제나처럼 쉽게 들뜨고 쉽게 선망했다.
맹세컨대, 그 뒤에 이어진 한 마디로 단번에 곤두박질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