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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92)화 (92/257)

92화

“너는 독립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예?”

늘상 내 곁에만 있을 생각이었더냐. 부드럽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지만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방금 전과 똑같은 얼빠진 대답을 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두 음절의 단어만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독립?

“이제 몸이 더욱 자라며 생리 현상도 종종 보게 될 텐데 그때마다 내게 면구스럽게 여겨서야 되겠느냐. 슬슬 버릇을 들여놓을 때도 되었다. 네 방에서 홀로 편히 자는 법도 익혀라.”

“그렇지만, 스승님…… 전 아직 깜깜한 곳이 두렵습니다.”

“등잔을 하나 사서 들어가야겠구나. 구석에 켜 놓으면 네가 잠들 즈음 알아서 꺼질 게다. 정 잠을 못 이루겠거든 언제든 내 방으로 와도 좋고.”

그냥 지금처럼만 지내면 안 되냐고, 자신이 잘하겠다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오는 초윤에게 면구스럽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꿈을 꾼다면 또다시 스승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며 꿈의 빈도도 점차 높아지리라 직감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암담하게 고개만 떨구고 있을 때, 초윤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네가 산을 내려가면 나는 널 도와줄 순 있을지언정 내내 쫓아다닐 수는 없다. 너의 인생은 어디까지나 너 홀로 일구어야 하는 것이고, 내게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독립하라는 소리가 아니니 지금부터 찬찬히 노력해 보자꾸나.”

“……예, 스승님.”

산을 내려가 홀로 해야 하는 것.

안락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깊은 곳에 닫아 두었던 기억이 척추를 타고 기어 올라와 뇌를 찔렀다. 천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천오는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밤 인사를 하고, 벽을 보며 자리에 누웠다. 스승에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잠시 눈을 돌렸던 기억이 눈꺼풀 안쪽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복수…… 그래, 복수해야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들었던 모든 소리가 이렇게 생생한데.

간만에 되짚어 본 과거의 기억은 어디 하나 바래지도 않은 채 선명하기만 했다. 이는 살아가기 위해 잊고 있었다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문천오를 옭아맸으며,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홀로 살아남아 누리는 모든 순간이 원죄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해가 지날수록 몸집을 불리는 증오 앞에 자신이 비교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스승 덕분이었다. 스승 덕분에 천오는 복수 이외의 일을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고, 복수 이후의 행보를 기대할 수 있었다.

만일 스승이 자신의 길을 올바르게 잡아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스스로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마도 불나방이 되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남궁세가, 마교, 그리고 연관된 모든 이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겠다며 길길이 날뛰다 보잘것없이 죽지 않았을까, 끝까지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속죄하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천오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있었고, 가 보고 싶은 곳도 있었으며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이건 정말 온전히 스승 덕분이었다. 초윤 덕분에, 지금도 천오의 낌새가 이상하자 조심히 옆에 앉아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어 주는 초윤 덕분에 천오는 감히 살아가도 되리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오는 복수를 해야 했다. 죄지은 자들의 피로 모든 죄책감을 씻어 버린 뒤 홀가분하게 초윤의 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저 환한 마음으로 스승에게 좀 더 가르쳐 달라고, 나를 데리고 가 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는 절대 초윤을 끌어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세가에 들이닥친 이들은 백협맹의 집행부라고 불리는 잠룡단과 와호단이다.

천오는 스승의 모든 발언을 기억했고, 그중에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곱 살 적의 대화도 있었다. 그 뒤로 8년이 지나는 동안 천오는 무림에서 백협맹이 가진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백협맹은 마교와 사파, 정파로 나뉜 무림의 세 세력 중 정파를 대표하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속내가 실상 어떻든 ‘백협맹’이라는 명패만 내밀면 대부분의 일이 해결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정파 무인이라면 마땅히 백협맹과 연관이 있어야 했다.

즉, 천오는 그날 세가를 습격했던 잠룡단과 와호단, 그리고 탐욕에 눈이 멀어 멸문 명령을 내린 수뇌부와 그들의 수족까지 죄다 죽여야 했다. 이 일이 끝나고 난 뒤 천오는 무림공적이 될 게 자명했다.

이에 스승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천오는 산을 내려가는 순간 자신이 약선의 제자라는 사실을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무공만 보고 알아차리는 이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스승의 조언을 따라 미무일식검을 개조한다면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알고 있는 하오문과 사천당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스승처럼 얼굴을 숨기면 될 듯했다. 혹은 스승이 언젠가 말씀해 주신 역용술(易容術)을 손에 넣어 생김새를 고치는 방법도 있었다.

모든 일을 끝내면 불귀 산맥으로 돌아가자. 다신 속세에 나올 수 없을 테니 스승과 해동이나 동영을 돌아다니자. 복수를 해도 좋다 말씀하셨으니 내치진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 독립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스승이 곁에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어야, 눈을 감고 무던히 잠들 수 있어야 빠르게 내 할 일을 마칠 수 있다.

천오는 스승이 없는 곳에서 자는 데 익숙해질 필요성을 체감하고 납득했다. 단순히 ‘혼자 자라’는 말을 들은 것치고는 심히 깊은 상념에 빠져 버렸지만 어쨌든 심정을 추스르는 데엔 성공적이었다.

어느새 자신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는 손길 말고는 주위의 모든 자극이 아득했다. 이윽고 스승의 손마저 옅은 온기를 남기며 사라졌다. 아직 같은 방 안에 있는데도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렇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자고 일어났으니 천오의 정신적 피로가 풀릴 리도 없었다.

“…….”

천오는 활짝 열린 창문의 창틀에 팔을 걸친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새까맣게 죽은 두 눈이 활기찬 거리를 살폈다. 음식을 파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하얀 김이 올라왔고, 짐을 한가득 든 사람들이 길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꾸준히 지나갔다. 가끔 앞니 빠진 어린아이들이 와르르 웃으며 뛰어가기도 했다.

방에는 천오 혼자뿐이었다. 스승은 해결할 일이 있다며 일찍이 외출한 지 오래였다. 얌전히 있을 테니 동행하면 안 되냐고 여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잘 모르는 도시를 함부로 돌아다닐 생각 말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씀만 들었다.

천오는 한 손에 든 금전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어수선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며칠간 몰아치듯 일어났던 일은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청소년의 마음을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론이 대부분 명료하게 나왔는데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었다.

“꿈이 다 뭔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천오는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스승님은 늦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뭔가를 먹고 운기조식을 하며 기다리면 금방 돌아오실 터였다.

방을 나가기 전, 무감각한 눈이 마지막으로 창밖을 향했다. 점심때가 되어서 그런지 마차와 사람들이 거리에 모이고 있었다.

달그락, 천오의 앞에 빈 그릇이 하나 더 쌓였다. 알음알음 지켜보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사를 터트렸다. 천오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새로 나온 국수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기름에 볶은 이전 그릇과 다르게 이번 것은 뜨거운 국물이 있었다.

무심서에는 쌀만 있었으니 밀가루 음식은 산 밑으로 내려와야만 접할 수 있었다. 스승을 따라 식자재를 사거나 표국을 방문하기 위해 마을에 들를 때 종종 먹었으니 거부감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식이 스승이나 자신이 한 요리처럼 쉽게 배를 채워 주진 못했다.

스승은 이를 두고 ‘기가 충만한 환경에서 영양의 함량부터 월등한 것만 먹고 자라 몸이 그에 익숙해졌다’고 하셨는데, 산 밑으로만 내려오면 당장 숨 쉬는 공기부터 황량하고 텁텁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충분히 그럴 법했다.

어쨌든 천오가 할 수 있는 것은 물량 공세밖에 없었다. 초윤도 이를 알고 있어 넉넉한 식비를 남기고 갔다.

달걀과 양배추를 볶은 요리, 버섯을 간장과 식초에 볶은 요리, 민물고기 요리, 식초에 찍어 먹는 돼지머리 고기 요리, 탄 맛을 살짝 입힌 두부 요리, 돼지 대창 요리, 소고기 만두 등 어림잡아 열 명은 먹고도 남을 음식이 쉴 틈 없이 천오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많은 음식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겉보기엔 멀쩡했고, 실제로 천오는 포만감이나 더부룩함 따위도 느끼지 못했다.

뭘 더 먹어야 할까. 맛도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새 국수 그릇까지 비운 천오가 그릇으로 쌓은 탑을 한 층 더 올렸을 때, 누군가가 갑작스레 불쑥 들어와 비어 있던 천오의 앞자리를 태연하게 꿰차고 앉았다.

시선을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명랑하게 생긴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너 엄청 잘 먹는다. 매일 이렇게 많이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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