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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93)화 (93/257)

93화

체구와 목소리를 봐선 많아 봤자 열셋, 적으면 열하나. 입고 있는 옷은 꽤 고급스러운 비단. 피부는 햇볕에 조금 그을렸으나 머리카락이 더럽지 않으니 좋은 집의 자제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거는 것을 보아선 금지옥엽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거나, 아니면…….

“배 안 불러? 우리 형님도 많이 먹는 편인데 이만큼은 아니거든. 넌 그보다도 어린데 진짜 많이 들어가네. 이거 다 너 혼자 먹은 거 맞지?”

사영 사저와 마찬가지로 믿는 구석이 있거나.

종알종알 발랄하게 말하는 모습이 본능적으로 미심쩍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스승이 없는 곳에서 남과 사담을 나눠 본 적이 없는 천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철저히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스승이 바라는 방향은 아닐 것 같았다.

“혼자 먹었습니다. 배는 부르지 않고, 매일 이렇게 먹는 건 아닙니다. 더불어 합석할 생각은 없으니 일행에게 돌아가십시오.”

“와, 너 엄청 딱딱하게 말한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의미심장한 말에 그릇으로 내려왔던 천오의 눈이 다시 그를 향했다. 아이는 한차례 깔깔 소리 높여 웃은 뒤 천오를 바라보며 탁자 위에서 손깍지를 꼈다. 천오는 그가 자신을 다른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간단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만난 적 없습니다.”

“아, 맞아. 나도 너 처음 봐. 그냥 좀 의외라서 그런 거야. 너는 생긴 것만 보면 완전 거만하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말할 것 같거든.”

어처구니없는 편견에 답해 줄 이유는 딱히 없었다. 천오는 그에게서 신경을 끄고 새로 나온 음식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새우 껍질과 고수, 고추기름을 넣고 푹 끓인 국물에 물만두를 넣은 요리는 그럭저럭 향긋해서 먹을 만했다.

천오의 무관심한 대응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건지, 소년은 천오에게 어김없이 말을 걸었다.

“나는 모용서라고 해. 요녕에서 여기까지 왔어. 너는 이름이 뭐야?”

“말할 생각 없습니다.”

“내가 맞춰 볼게.”

요녕의 모용씨라면 설마 모용세가인가. 스승에게 무림의 정세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어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큰 세가의 직계 자손이라고 해서 태도를 달리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왜 이리 성가시게 들러붙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름을 맞춰 본다는 말도 실없는 농지거리려니 생각하며 붙잡은 음식을 반쯤 흡입했을 때, 대뜸 들려온 말은 천오를 흠칫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천오, 주천오 맞지?”

“…….”

그릇 너머로 눈을 마주치자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소년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밝은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이 불길한 감정이 가득 묻어 있었고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는 흉포했으며 무엇보다 두 눈동자에 비치는 광택이 심상치 않았다. 천오의 본능과 기감이 동시에 알렸다. 소년은 지금 천오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모용서라는 인간을 오늘 처음 만나는데. 설마 이 아이가 속한 모용세가도 운한 서문씨를 멸족시키는 데에 일조한 걸까?

“아닙니다.”

“웃기지 마. 내가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담백하게 부정하자 명랑한 소년의 겉껍데기가 단번에 벗겨졌다. 모용서는 쾌활한 어린아이의 탈을 순식간에 벗어던지고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처음 보는 사이라고 시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모순적인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을 보면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이들에겐 아무리 논리적인 말을 해 봤자 통하지 않으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비가 ‘주’씨인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천오는 스승이 없는 곳에서 이런 상황에 휘말린 것 자체가 상당히 성가셨다. 아무래도 대충 뿌리치고 올라간 뒤 스승이 돌아오면 이런 일이 있었다며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듯했다.

천오는 그릇을 마저 비운 뒤 주방을 향해 한 손을 들었다. 더는 음식을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사양이었다. 천오가 더 먹기만을 기다리며 힐끔거리던 점소이가 아쉬운 기색으로 자리를 떴다. 천오는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아니기에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서문씨를 주씨라고 우길 작정입니까. 댁의 형님은 이딴 막무가내 응석도 다 받아 주나 봅니다.”

“……하?”

어이가 털린 것은 천오 쪽인데, 어쩐지 모용서가 더욱 믿을 수 없단 반응을 보였다. 순식간에 공허해진 모용서의 눈이 천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더 할 얘기가 없는 천오는 숟가락을 거꾸로 뒤집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해진 모용서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이름자는, 이름은 맞췄지?”

“안녕히 가십시오. 다시 만날 일은 없길 바랍니다.”

[이런 곳에 다 나오다니 마교에서 나들이라도 보내 줬나 봐? 누굴 죽이러 온 건데. 제갈설린?]

담담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찰나 신랄한 전음이 날아와 고막에 꽂혔다.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전음의 묘리를 깨우쳤다니 놀라운 일이었지만 열한 살에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곧장 전음을 하게 된 것도 모자라 입술을 읽고 남의 목소리까지 흉내 낼 수 있게 된 천오는 그다지 경악하지 않았다.

도리어 모용서가 내공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전음을 해낸다는 점이 더 흥미로웠다. 천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모용서를 돌아보며 그의 평범한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래도 이 애늙은이 미치광이는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한 것 같았다.

[첫째, 나는 마교와 별다른 관련이 없습니다. 둘째, 제갈설린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무슨 옛날이야기를 듣고 와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망상은 혼자 조용히 하고, 민폐는 집에 가서 끼치십시오.]

“……말도 안 돼.”

천오의 무감정한 전음을 들은 모용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단숨에 안색이 하얘진 소년이 덜덜 떨리는 손의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오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위층의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천오는 오감이 예민했다.

그렇기에 모용서가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줄줄 내뱉는 말을 놓칠 수 없었고,

“그럼 주천오는? 교주는 누가 되는 거지? 아예 틀어진 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영민한 두뇌로 본인의 아버지가 마교의 소교주 주역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으며,

“약…… 아버지를 살린 약인가? 지난번에는 그런 적이 없었어. 아버지도 누가 그 약을 보냈는지 끝까지 알려 주시지 않았다고. 형님을 살린 약도…… 제기랄, 고독을 죽이는 약이 때마침 세상에 나올 리가 없잖아. 이걸 왜 여태껏 생각하지 못한 거지?”

아는 사람의 이름과 ‘약’이라는 단어를 흘려듣지 못해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그만한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어. 빌어먹을, 약선이다.”

마침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시끌벅적한 객잔 한가운데, 빈 그릇만 가득한 자리에 앉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음량으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던 모용서가 벌떡 일어났다. 자신을 보는 천오와 나가는 문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한 점이나, 연신 마른침을 삼키고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 단단히 틀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천오는 모용서의 마지막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간 천오가 모용서의 팔을 억세게 틀어쥐고 물었다.

“약선이라니?”

“……왜 그 단어에 관심을 보이는 거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데…….”

미치광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란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천오도 알고 싶었다.

한창 사람이 많을 시간의 객잔에 우두커니 서 있자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천오는 이 자식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갈지, 아니면 바깥으로 나갈지 고민하다가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스승님의 방에 이딴 광인을 들이고 싶진 않았다.

객잔을 나선 천오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망설임 없이 어딘가로 향했다. 아직 안색이 돌아오지 않은 모용서는 생각보다 순순히 천오를 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없는 골목에 들어선 천오가 그의 팔을 내팽개치듯 놓으며 말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뜬금없이 약선이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궁금해? 다른 것도 아니고, 약선이 궁금하다고?”

고개를 든 그는 이제 완전히 정신 줄을 놓은 것 같았다. 단정히 빗었던 머리는 스스로 쥐어뜯어 헝클어져 있었고, 혼탁한 눈동자는 도저히 그 나이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섬뜩했다. 천오를 보며 히죽거리던 모용서는 한순간 표정을 싹 지우더니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알 수도 있겠어. 주천오, 너 지금 어디서 뭘 하면서 살고 있는 거야? 무공을 익히긴 했어?”

“…….”

틀려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려 한 내가 멍청했지.

당신이 말한 약선 초윤과 함께 사제 관계를 맺고 불귀 산맥에서 매일같이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무공은 꽤 열심히 익히고 있습니다, 하고 고분고분 알려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연이어 던진 질문이 계속 무산되고, 주고받는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천오의 의욕이 빠르게 식었다. 이 소년은 명성 높은 무림인들의 일대기를 전해 듣고 영 이상한 착각에 빠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천의 콧대 높은 인물들도 하나같이 굽신거리지 못해 안달이었던 스승의 존호를 이따위로 쉽게 부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정작 자신도 모용서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건 딱히 없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천오가 냉랭하게 돌아섰다. 이번에야말로 이대로 돌아가 객잔에 콕 처박힐 작정이었다. 여기서 나가지 말라는 스승의 지시를 어긴 것도 심히 마음에 걸렸다. 스승이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고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망설임 없는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예리하고 차가운 기운이 어느새 천오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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