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쇄도하는 칼날을 감지한 것은 순전히 천오의 본능이었다. 뒤돌아 상황을 눈에 담으면 이미 늦으리라 직감했다. 천오는 어깨를 비틀며 오른손을 뒤로 휘둘렀고, 칼끝이 몸을 꿰뚫기 전 아슬아슬하게 손등으로 검 옆면을 때렸다. 검이 세로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로로 누워 있었다면 손 절반이 단번에 날아갔을 정도로 단호한 수였다.
날 선 검이 천오의 등을 스치고 그대로 빗겨 나갔다. 썩둑 잘려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소년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천오가 한 발을 박차 매끄럽게 뒤로 물러나자,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검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모용서는 검격을 피하고 적정 거리를 벌리는 천오를 보며 변덕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무공을 배웠잖아! 이러면서 마교와 관련이 없다고?”
“…….”
그러니까 무공을 배운 것과 마교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말이다. 반드시 마교에서만 무공을 익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천오는 미치광이 앞에서 정론을 나열하면 제 입만 아프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소년이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한 채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하는 이상 천오가 무엇을 말하든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천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다리를 벌려 자세를 낮췄다. 경계하는 자세로 세운 손등에서 줄줄 흐른 피가 손목을 적셨다. 칼날을 쳐 내면서 피부가 깊게 베인 듯했지만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모용서는 껄렁한 자세로 선 채 검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열 살 남짓한 어린 몸에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권태롭고 염세적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객잔 안에서 보았던, 혹은 그가 보여 주었던 명랑하고 활기찬 모습보다 훨씬 더 잘 들어맞는 것을 보아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살면서 몇 가지 깨달은 게 있는데, 세상은 후환을 남겨 두면 꼭 후회하게 되더라고. 개 같은 자식들은 꼭 명줄도 질기고 뒤끝도 더럽다는 말이지.”
“…….”
“뭐가 어떻게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죽여 놔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아직 별일 안 벌였어도 너무 원망하지 마. 다 전생의 업보 같은 거야.”
의미 모를 말을 남긴 모용서가 단번에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발끝으로 가볍게 땅을 걷어찬 것치고는 폭발적인 속도였다. 검을 막을 방도가 맨손밖에 없는 천오는 자신을 반으로 가르려는 듯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라오는 검을 침착하게 옆으로 파고들어 피했다. 그대로 집요하게 따라붙는 공격에서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힐긋 아래를 내려다보자 허리 한쪽이 그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공격이 닿은 것 같았다.
분명 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천오가 멀뚱히 생각했다. 모용서 역시 생각과는 다른 느낌이었는지 인상을 쓴 채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안 꺼내? 검이 없어? 아직 위기감이 덜하시나?”
“…….”
말마따나 뽑을 검이 없었다. 천오가 단련하면서 사용하던 목검은 무심서에 있고, 스승의 취우검은 객잔의 방 안에 있었다. 하지만 천오는 자신에겐 무기가 없고 당신은 엉뚱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으니 그만해 달라는 말 대신 대뜸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진검으로 상처를 입힌 건…… 명백한 위협이 맞습니까?”
“뭐?”
“오랜 시간 함께 있을 관계도 아니고, 친밀하게 지낼 여지도 없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천오는 모용서의 신경질적인 대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오래전에 들었던, 그 뒤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기본이 되어 주었던 교리가 떠올랐다. 상처 입은 허리를 한 손으로 더듬어 제게 닥친 상황을 확인한 천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적대 행위라면 조목조목 따질 것도 없으니…… 어렵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손바닥에 묻어난 피를 잠시 내려다보다 하의에 슥 문질러 닦은 천오는 재차 기본자세를 취했다. 아무런 의욕도 없이 그저 학습된 것처럼 움직이는 천오를 보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모용서는 한순간 얼굴을 차갑게 굳히더니 검을 겨누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이지.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안 했을 것 같아?”
“비겁한 짓은 혼자 다 하고 계신 주제에 말이 많으십니다.”
“명예가 목숨 살려 주는 것도 아니더라고. 너한테 그런 거 따지고 싶지도 않고.”
또다시 거리가 좁아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맨손으로 검을 잡는 묘리까진 아직 배우지 못한 천오가 교묘하게 비켜나며 모용서의 손목을 매끄럽게 낚아챘다. 이대로 꺾어 집어 던지려고 했으나 손에서 팔을 거쳐 어깨로 전해지는 무게감에 몸이 경직됐다. 머리 하나 이상 차이 나는 체급의 소년이 가질 법한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예상 밖의 일에 희미한 당황을 느낀 찰나, 가까이 대치한 모용서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천오의 정체를 두 눈으로 파헤치기라도 할 것처럼 끈덕지게 들러붙는 시선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불투명한 편집증과 직선적인 욕망으로 가득했다.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탁하고 맹목적인 눈동자를 마주하고 직감하자마자 모용서의 입술이 웃음처럼 갈라졌다. 남의 비밀을 억지로 캐낸 뒤 약점으로 붙잡은 듯한, 혹은 상대를 압살하고 농락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듯한 저열한 기쁨이었다.
“너……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구나?”
가슴이 가로로 길게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이번에도 검이 닿는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몸을 비틀어 천오의 손을 뿌리친 모용서가 그대로 반 바퀴 돌며 천오의 얼굴을 향해 뒤돌려 차기를 날렸다. 고개를 조금 뒤로 빼서 피한 것도 잠시, 천오는 곧 산발적으로 들이닥치는 예리한 검날을 마주해야 했다. 몰아붙이는 공세 속에서 진심 어린 웃음을 터트린 모용서가 제멋대로 지껄였다.
“움직임은 괜찮아. 눈도 쓸 만해. 그런데 그게 전부네? 마교와 관련이 없다는 말 하나쯤은 믿어 줘야겠어. 그 새끼들이 너를 이딴 식으로 키울 리가 없지! 하하!”
“…….”
이딴 식으로 키울 리가 없다?
온몸에 상처가 쌓여도 변화 하나 없던 천오의 미간에 선명한 금이 서리자마자, 단단한 파열음이 콰앙! 하고 좁은 골목에 울렸다. 정돈되지 않은 바닥의 먼지가 일제히 뒤집어지며 시야를 흐렸다. 느닷없이 덮쳐 온 발경(發勁)을 검의 측면으로 아슬아슬하게 막은 모용서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무식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힘을 고스란히 받아 낸 손목은 한 박자 늦게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가라앉는 흙먼지 속에서 천오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누군가와 ‘싸워’ 보는 것이 처음입니다. 무공을 배웠다고 한들 사람을 향해 살수(殺手)를 펼쳐 본 적은 없으며 기껏해야 몇 년 전 사형제들과 대련을 한 게 전부입니다. 그 뒤로는 스승님께서 친히 상대가 되어 주셨지만 이는 겨루는 것보단 일방적으로 받아 주시는 것에 가까워서 말입니다.”
“……하?”
“당신이 내 스승님께 터무니없이 불경한 오해를 품는 것 같아 설명하자면.”
솔직히 스승님께서 내게 해 주신 말씀을 왜 당신에게 들려줘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만. 사이에 작게 중얼거린 천오가 오른손을 탈탈 털었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손끝에 맺혀 벽으로 튀었다. 단전에 웅크리고 있던 광대한 내력이 천천히 똬리를 풀며 온몸에 녹아들었다.
근육 한 올 한 올이 맥동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길게 내쉬는 숨에 하얀 안개가 섞여 나왔다. 자연과 동화하는 스승의 무공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미약하게만 보이던 천오의 존재감이 천천히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스승처럼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이렇게 튀고 마는 것은 자신의 미력함 때문이었다. 이 순간에도 스스로의 약함을 탓하며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 천오와는 다르게, 그 앞에 선 모용서는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고쳐 쥐었다. 인간 모양의 허물을 벗는 요괴를 목도한 기분이 이것과 비슷할까.
“스승님께선 내가 무분별한 폭력에 익숙해지지 않길 바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에 적응하지 못하면 무공을 단련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나 싶었지만 당신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과도한 폭력에 노출된 채 자란 결과가 바로 당신 아닙니까. 당신처럼 무례하고 경우 없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하핫, 살다 살다 주천오한테 이딴 소리를 다 듣네.”
말 몇 마디로 모용서의 속을 왈딱 뒤엎은 천오는 득달같이 뒤따르는 예리한 검의 궤적에 한발 빠르게 몸을 밀어 넣었다. 어깨를 젖혀 팔꿈치를 한껏 뒤로 빼고 새끼손가락부터 차곡차곡 말아 넣으며 주먹을 쥐었다.
일방적인 공격에 무수한 상처를 입을 때 살갗을 베던 감촉은 서늘한 금속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검을 감싸는 공기의 밀도가 높은 느낌, 완전히 피했음에도 마치 검신이 늘어난 것처럼 상처를 남기는 공격.
천오는 이것이 언젠가 스승에게 들었던 ‘검기’라고 확신했다. 내공이 일정량 쌓이면 이를 발출해 검의 외부를 감싸서 강도를 공고히 하고 사정거리를 늘이는 기술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자를 절정 고수라고 칭하며, 이보다 발전한 기술인 검강을 만들어 내는 자는 초절정 고수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다 소용없는 짓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검에 내공을 얼마나 길고 크게 씌우든 결국 껍데기에 불과하다. 좀 더 강하게, 좀 더 멀리 닿길 바란다면 검이 아니라 공격 그 자체에 힘이 담겨야 한다. 산사태와 해일이 두려운 이유가 무엇이더냐. 그것을 이루는 흙과 물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포한 파괴적인 기세 때문이 아니더냐.
-무기를 단단히 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네 공격을 무기가 감당할 수 없을 때, 그제야 약간의 내력을 덜어 균형을 맞춰 주거라.
-검은 고작해야 손발의 연장선이다. 중요한 것은 네 몸이 얼마나 너의 통제를 잘 따르는지, 너는 네 몸을 어디까지 제어할 수 있는지, 이 둘뿐이다.
그러니 익혀야 하는 것은 온몸의 힘을 한곳으로 끌어모아 단숨에 방출하는 법. 팔다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뼈를 견고히 굳히고 근육은 유연하게 당기는 법.
감히 피할 수 없도록 소년의 팔을 반대쪽 팔로 옥죄여 움켰다. 짧은 순간 발밑에서 미풍이 몰아쳤다. 탄탄한 하체를 휘감은 소용돌이가 허리를 타고 올라와 권골 끝에 고였다. 꽉 조인 등과 어깨의 탄력으로 튕겨 내듯 주먹을 내뻗었다. 자신의 손과 소년의 복장뼈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 너무나도 느리게 느껴졌다.
아니…… 내가 빠른 것이다. 빠져나가기 위해 힘을 주려다 내력의 크기부터 밀린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에 경악하며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도, 붙잡은 몸뚱이가 뻣뻣하게 굳는 것도, 뒤늦게라도 방어하기 위해 가슴 한가운데에 간신히 기운을 모으는 것도 전부 보인다. 가당찮고 가소로워 도리어 개운해진다. 이대로 가슴우리를 부수어 놓으면 최소한 돼먹지 못한 말을 입에 담을 순 없겠지.
소년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서문천오는 선명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