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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95)화 (95/257)

95화

내지른 주먹이 소년의 몸에 닿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순간 갈려 버린 승패를 직감한 듯 모용서의 얼굴에도 짙은 패색이 스쳐 지나갔다. 손에 무언가 부드럽고 심지 있는 것이 닿았다. 천오는 이대로 그의 흉곽을 으스러뜨릴 생각이었다.

그때, 모용서의 몸이 천오의 생각보다 빠르게 뒤로 죽 밀려났다. 미처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골목 끝까지 날아간 모용서는 구석에 쌓여 있던 포대 자루에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파묻혔다. 충격을 흡수한 자루가 터지며 안에 들어 있던 밀가루를 우수수 뱉어 냈다. 새하얀 맥분이 미동도 하지 않는 모용서의 머리와 어깨를 뒤덮고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천오는 자신의 주먹을 감싼 하얀 손, 이어진 손목 위에 사분사분 내려앉는 얇은 면사, 그 안으로 윤곽이 흐린 어깨와 턱선, 익숙한 모양의 죽립으로 차근차근 시선을 옮겼다. 무명 옷자락이 부드럽게 나부끼며 미약한 바람을 일으키자 오래 달인 약재 냄새가 뒤늦게 코끝에 닿았다. 아, 무의식적인 신음을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기이할 정도로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입 밖으로 나간 얼빠진 소리를 들었는지, 모용서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고 있던 스승이 천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면사 너머로도 그의 동요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스승은 천오의 몰골을 가만히 살핀 뒤 간극을 두고 차분히 말했다.

“……아팠겠구나. 잘 버텼다. 심한 상처는 없어 보이지만 출혈이 심하고 흉이 질 수 있으니 서둘러야겠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하나도 괜찮지 않다.”

단호하게 자르는 스승의 목소리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훨씬 어린아이를 상대했을 뿐인데 여기저기 입은 부상이 많았다. 객잔 안에 있으라고 하신 말씀도 어겼고, 심지어 스승님이 직접 손을 쓰시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제대로 상대할걸. 자신이 다치는 것도 딱히 아무렇지 않아 설렁설렁 응대하다가 이 꼴이 되어 버렸다. 풀이 죽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있자 무언가가 문득 볼에 닿아 왔다. 물끄러미 시선을 올리니 스승이 옷소매로 자신의 뺨을 닦아 주고 있었다. 천오는 그제야 자신의 얼굴 반쪽을 척척히 적신 피를 눈치챘다.

스승의 손이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상처 주변을 맴돌았다. 더디게만 돌아가던 천오의 시간이 찬찬히 제자리를 찾았다. 괜찮지 않다 하셨으니 별로 아프지도 않다고,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미력한 제자라 죄송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둘 곳을 찾지 못한 눈동자가 스승의 어깨 너머를 이리저리 방황하자, 스승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자상하게 말했다.

“당장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니 안심하거라. 어찌 된 영문인지 짧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예, 스승님. 식사를 하던 도중 저 소년이 갑작스레 홀로 나타나 합석을 요구했습니다. 자리를 뜨려고 하자 알 수 없는 이유로 혼란스러워하더니 스승님의 존호를 언급했고,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 이를 추궁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냥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진검을 빼어 들고 뒤에서 덮쳐 오는 바람에 응전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을 요녕의 모용서라고 소개했으며 저를 주천오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랬구나.”

스승은 언제나와 같이 지혜로운 목소리로 짤막히 답했다. 마치 소년이 누구인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난데없는 일은 정말 우연일 수 있었다. 혹은 스승이 예상한 변수일 수도 있었고, 무언가의 전조거나 양분일 수도 있었다. 마냥 뜻밖의 일이라고 하기엔 소년이 내뱉은 말들이 마음에 걸렸고, 모두 계획된 일이라 하기에도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다.

스승의 언행에는 전부 깊은 뜻과 정교한 계획이 있다 믿는 천오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의 자신으로선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오로지 하나뿐.

‘더 강해야 한다. 더 현명해야 하고, 더 완벽해야 한다.’

스승의 옆에 서서 그의 머릿속에 있는 원대한 그림을 그와 같은 눈높이로 보려면 지금 같은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천오는 속으로 다짐하며 늘어트린 양손을 꾹 주먹 쥐었다. 반드시 따라잡고 싶은 상대가 눈앞에서 직접 길을 이끌어 주니 의욕이 식을 새가 없었다. 언젠가 이 등에 손이 닿을 날만을 고대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초윤에게 원대한 그림 같은 건 없었다. 초윤은 지금 그저 울고 싶을 뿐이었다.

‘왜? 왜? 왜 이렇게 다쳤어? 애 얼굴에 뭔 짓을 한 거야? 팔다리고 배고 할 것 없이 이게 다 뭐야. 조금만 더 깊게 베였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제정신이야? 피가 무슨…… 다 큰 어른이 사리 분별도 못 하고 애를 지금…….’

겉만 평온하지 속으로는 기겁을 한 터라 얼른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다친 건 아이인데 자신이 서러워 죽을 것 같았다. 몇 시간 자리를 비웠다고 그새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꽉 조이고 목이 턱 메었다.

애지중지 키워 놓은 아이가 어느 날 뜬금없이 다 큰 어른에게 심한 폭행을 당해 절뚝절뚝 집에 돌아온 꼴이었다. ‘초윤’의 몸과 이성이 아니었으면 주저앉아서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을 하고도 충분했다.

‘쟤는 그리고 왜 여기 있어? 이 넓은 동관에서 왜 콕 집어 여기 있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주인공은 원래 걸어 다니는 사건 사고다, 이런 전개의 연장선이야? 뒤에서 덮쳤다고? 미친 거 아니야?’

별생각 없었던 주인공 모용서에 대한 평가도 바닥을 뚫고 내려갔다.

경공으로 이곳에 도달하자마자 다급하게 천오를 막고 모용서를 밀쳐 충격을 완화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를 위한 판단이었다. 초윤은 아이의 성장이 끝나기 전까지 유해한 매체를 접하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타인을 살해하거나 최소한 중상을 입히게 되는 경험은 인격 발달에 명백히 해로웠다. 아이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하든, 그리고 상대가 누구며 무슨 잘못을 했든 이는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천오가 바로 곁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모용서가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초윤이 직접 손찌검을 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쓰러져 있는 모용서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아 흔들어 깨운 뒤 무슨 짓이냐고 마구 추궁하고 싶었다.

불뚝불뚝 치미는 섟을 참아 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앞의 아이 덕분이었다. 초윤은 짧은 시간 동안 정말 간신히 현 상황을 파악할 이성을 비틀어 짜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천오를 치료하는 거야. 그리고 모용서가 천오를 만난 이상 회귀 전의 세계와는 딴판으로 달라졌다는 걸 숨길 순 없어. 내 호를 언급했다고 했지? 그럼 모용정과 모용단을 치료한 약을 내가 만들었단 사실을 들켰거나, 아니면 내가 천오를 홀랑 데리고 나와서 키우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건데 아무래도 전자일 가능성이 더 크고…….’

<귀환영웅>의 주인공 모용서는 정도와 사도를 따지자면 명백한 사도(邪道)형 인물이었다.

회귀 전 생에서 모용서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세가를 전부 잃었다. 가주인 모용정이 세상을 뜨고, 장남인 모용단이 그 뒤를 이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던 칠성검 모용단이 가주 자리에 올라 벌인 일은 하나같이 터무니없었다.

결국 모용단이 마교와 결탁했단 증거가 튀어나왔고, 요녕의 모용세가는 순식간에 무림공적이 되어 천오의 서문세가가 그랬던 것처럼 불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그 지경이 되어서야 제정신을 차린 모용단은 모용서에게 까마귀 모양의 목걸이를 쥐여 준 뒤 비밀 통로를 통해 그를 내보내고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했다.

모든 것을 잃고 살아남은 모용서는 운 좋게 실력 있는 낭인을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 온 중원을 방랑했다. 하지만 그에게 전수받은 무공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실력을 갖추게 됐을 즈음 중원을 장악한 마교에게 새로 생긴 유일한 가족마저 살해당하고 말았다.

연이은 일로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된 모용서는 마교를 아예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단련했다. 그러나 거리를 전전하던 무사에게 배운 무공은 한계가 명확했고, 모용서는 결국 화경의 벽을 뚫지 못한 채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 뒤, 일곱 살 적으로 돌아온 모용서는 악행이 팽배한 무림이 잃어버린 정의를 되찾는다…… 같은 올바르고 갸륵한 소개글 속의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단단한 신념이나 강인한 정신력 같은 것도 딱히 없었다. 약자는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비틀린 좌우명 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지려 했고, 악한 사람을 그보다 더 악한 방식으로 이기고자 했다.

모용서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이번 생에서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겠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생에서 잃었던 자신의 사람, 즉 가족이나 친구를 위협하는 적이 나타나면 이성을 놓고 덤벼들어 미친 듯이 싸우는 장면이 작중에서도 종종 나오곤 했다. 눈이 회까닥 뒤집힌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적을 농락하거나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모습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꽤 많았다.

그 밖에도 모용서는 트라우마가 참 많은 캐릭터였다. 평소의 뻔뻔스럽고 잔악한 면모와 대비되는 약한 면이 매력적이기도 했다. 스스로도 그런 점을 알고 있어 일부러 정신이 나간 척을 하거나 의도적으로 연약하게 굴며 동정심을 자극할 때도 있었다.

물론 모용서의 시점에서 서술된 소설을 읽을 때나 그랬을 뿐, 이 상황에서 초윤이 그를 좋게 생각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악바리 같은 사람이 지금쯤 마교에 있어야 할 천오의 존재를 알게 됐어.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화근을 없애겠다며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추측은 맞아떨어졌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천오가 자신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정체불명의 무림 고수가 천오의 편에 서 있다는 것까지 보았다면?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모용서가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한 정신머리를 지닌 캐릭터인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초윤이 8년 동안 저지른 게 너무나도 많았다. 이제 앞날을 안다는 말도 꺼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슬슬 밀려들어 오기 시작한 거대한 업보를 느끼며, 초윤은 천오의 어깨를 한 손으로 꼬옥 잡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남의 사정이 몰아칠 때마다 초윤의 선택은 항상 똑같았다.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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