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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96)화 (96/257)

96화

아주 무책임한 결론인 것 같았지만(그리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무책임한 건 맞지만) 초윤은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있었다.

하나, 일단은 천오의 치료가 시급했다. 남의 집 어른인 모용서를 데려다 눕혀 놓고 보살필 시간에 우리 집 아이인 천오를 먼저 어떻게든 해야 했다. 그리고 애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을 심각하게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천오에게 맞기 전에 막아 주기도 했으니 최소한의 도리는 다한 것 같았다.

둘, 깨어난 모용서와 대면한다 생각하면 오히려 골치가 아팠다. 그에게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든 뭘 하든 먼저 초윤의 정체를 밝히고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설명해야 할 게 뻔한데, 그럼 필연적으로 원작의 이야기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초윤이 이것을 어쩌다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바꾸려 하는지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저 애를 그대로 가만둘 수 없어 홀라당 데려왔다고 솔직히 말할 순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계획을 있는 척 꾸며 낼 수도 없었다.

셋째, 북동쪽으로 한참 먼 곳에 있는 요녕에서 쑥쑥 자라고 있어야 할 모용세가의 주인공이 섬서성까지 오게 된 경위를 되짚어 보니 퍼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형을 따라 이곳에 왔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모용서의 형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던가.

‘무림 대회다! 이 시기에 화산파가 큰 대회를 열었어!’

비동이 발견된 뒤로, 백협맹의 일부 문파는 새롭게 발견한 신물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 위해 공을 들여 후기지수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남궁세가와 그들 산하의 세력에 발각되지 않도록 물밑으로 움직였으나 몇 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들키면 곤란해지는 목적은 수완 좋은 이들이 잘 포장해 숨기긴 했지만 차세대 육성 열풍은 이미 온 중원에 불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회귀 전 세계에서 이 인재 찾기 프로젝트를 망하게 한 원인을 하나하나 해결하며 자신의 편을 만들었다. 그 첫 번째 에피소드가 화산파의 주도로 도교 기반의 문파들이 함께 모여 개최한 ‘삼보대회(三寶大會)’였고, 이것이 짐조의 독 사태로 엉망이 된 채 흐지부지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용서는 참관을 이유로 섬서성까지 와서 제갈설린을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초윤의 개입이 초래한 변화는 너무나 많았다.

‘근데 화산파는 사천당문에게 약점을 잡혀서 좀 얌전해지지 않았나? 그런데도 이렇게 큰 이벤트를 벌인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었나? 같은 섬서성에 있는 종남파랑 사이가 안 좋아진 것도 원작에서는 없는 흐름이었고……. 그리고 여기서 구양선을 만났어야 하지 않나? 못 만나면 또 어떻게 되는 거야?’

“스승님?”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초윤이 천오를 붙잡은 채 잠시 넋을 잃고 서 있자 이상함을 느낀 천오가 스승을 불렀다. 초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도망치기로 했으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동관에 온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오히려 더 머물다간 더 복잡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분명했다. 원래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홀연히 사라질 예정이었던 초윤의 계획은 이미 대차게 어그러진 지 오래였으니 최소한 무탈하게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니까 일단 가자. 산에 틀어박혀서 몇 년 있다 보면 웬만한 건 정리되겠지. 그래, 이미 틀려먹은 것 같지만 이제 정말 더 간섭하지 말자. 주인공은 알아서 잘 할 거야.

애써 합리화를 마친 초윤이 말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동관을 나가야겠다. 네 상처부터 간단히 살핀 뒤 마차를 잡아 가자꾸나.”

“……서두르시는 것은 저 때문입니까? 제가 조심성 없이 저자와 마주쳐 응전한 것이 잘못이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 잘못은 일절 없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것뿐이다.”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그래도 수긍하는 아이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일러둔 초윤은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충격을 상쇄시킨 영향으로 정신을 잃은 모용서가 밀가루에 뒤덮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왕 도망가기로 한 거 확실히 하자. 초윤은 허리를 숙이고 손끝에 힘을 담아 모용서의 수혈(睡穴)을 정성 들여 꼭꼭 짚었다. 신체의 특정 부분을 정확히 자극해 마비시키거나 잠들게 하고, 심하면 죽일 수도 있는 점혈(點穴)은 여러모로 굉장히 유용했다.

어깨에 있는 거골혈과 견정혈, 팔에 있는 비유혈과 수오리혈, 허벅지에 있는 은문혈로도 모자라 가슴에 있는 영허혈과 옥예혈까지 내력을 담아 쿡 찌르고 나자 모용서가 한 차례 부르르 경련하더니 축 늘어졌다. 수혈을 짚는다고 한 것치고는 과한 처사였지만 주인공인 이상 운 좋게 일찍 일어날 수도 있으니 이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았다.

초윤은 모용서의 옆 바닥에 손가락 끝으로 몇 글자를 적고 빈 자루를 집어 그의 몸을 덮었다. 아무리 밉상에 탐탁지 않은 사람이어도 치안을 장담할 수 없는 으슥한 골목에서 초윤 때문에 실신한 동안 괜한 일이라도 당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나름 가려 준 것이었다.

할 일을 마친 초윤은 손에 묻은 밀가루를 탁탁 털며 발걸음을 서둘러 천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 아이의 어깨에 둘러 준 뒤 성한 손을 맞잡고 시가지를 향해 나갔다.

옷깃을 여며 너덜너덜한 몸을 숨긴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분고분 초윤을 쫓았다. 다리에도 상처를 입었으니 마음 같아선 걷게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눈높이가 거의 비슷해질 정도로 훌쩍 큰 아이를 안아 드는 것도 괜한 눈길을 끌게 될 것 같았다.

막힘없이 객잔으로 돌아온 초윤은 한가한 점소이에게 깨끗한 물 한 동이와 면포를 가져다 달라 말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3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이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 뒤 구석에 고이 놓아둔 약함을 뒤졌다. 그 안에서 간장 종지만 한 용기에 소분해 둔 금창약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당귀와 자근초, 석회, 돈지, 백납, 백선피와 황련, 황백을 집어넣어 졸이고 천궤산에서 뜯어 온 지균도 약간 첨가한 자색의 연고는 독특한 냄새를 풍겼다.

‘젠장, 다음부터는 상백피 실도 뽑아서 갖고 다녀야겠어. 판매용으로 만든 거라 흉터가 조금은 남을 것 같은데…… 응급 처치가 시급하니까 일단은 이걸 쓰자. 나머지는 돌아가서 노력해 보고, 정 안 되면 환골탈태에 걸어 보자고. 그거 한 번 거치면 온몸의 흉터가 다 없어지고 새로 태어난다잖아. 우리 애가 그 경지에 못 오를 리 없으니까!’

가위와 주정(酒精)을 비롯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들고 뒤를 돌아보자, 천오가 등을 보인 채 웃옷을 벗고 있었다. 스승에게 맨몸을 보이기도 부끄러울 때가 됐는지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물과 천을 가져온 점소이가 때맞추어 문을 두드렸다. 초윤은 이를 받아 탁자 위에 올리고 죽립을 벗어 침상 위로 던졌다. 그대로 아이를 부르자 웃옷을 벗어 곱게 개어 둔 천오가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초윤은 먼저 물로 면포를 적셔 천오의 상처를 세척했다.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아이와 약간의 실랑이가 오갔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자 금세 조용해졌다. 얌전해진 아이의 손을 잡아 올린 초윤은 피가 말라붙은 손등부터 조심스레 훔쳐 냈다. 손가락 사이와 손끝까지 꼼꼼히 닦는 동안 말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

가까이서 보니 더욱 속상했다. 가슴과 허리, 복부와 팔다리에 선명한 검상도 그렇지만 흉터가 겹겹이 늘어나고 있는 손이 가장 마음 아팠다. 정말 살이라도 낀 건지, 천오는 다치기만 하면 꼭 손이 성하질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무기를 조우했을 때도 아이는 항상 손에 상처를 입었다.

몸을 맡긴 채 다른 곳만 응시하고 있던 천오가 심상찮은 스승의 기분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초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미간에, 두 눈에, 입술과 턱선에 새삼스럽다는 듯 와 닿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말도 아닌 표정을 하고 있나 보지. 제 얼굴을 알 리 없는 초윤이 속으로 자조했다. 천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

초윤은 피가 묻은 면포를 가볍게 빨아 비틀어 짠 뒤 팔뚝의 상처로 올라가며 넌지시 물었다.

“아프지 않다는 건 네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냐, 아니면 고통은 느끼되 견딜 수 있다는 뜻이더냐.”

“고통은 느껴지지만 견딜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보다 심한 부상을 입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저 부족한 모습을 보여 드리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먼저, 너는 하나도 부족하지 않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분명 자기보다 어린애를 상대하는 데에 이만큼이나 상처 입은 자신을 탓하고 있겠지. 이번만큼은 자신의 예상을 확신할 수 있었다.

초윤은 속이 상하다 못해 아주 약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름 잘 키웠다 생각한 아이가 왜 이렇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자존감 낮은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오의 속에 과도한 선망과 비정상적인 맹목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스승의 앞에서만 이렇게 낮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 그저 모든 게 다 자신의 탓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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