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사실 이건 어찌 보자면 당연했다. 무협지보다 훨씬 평화롭고 치안 좋은 현실 세계에서도 신변의 안전은 호언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은 아무리 조심한들 언제나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었고, 혹은 같잖은 이유로 남의 원한을 살 수도 있었다. 도처에 널린 위험은 혼자 주의한다고 해서 예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초윤은 언제부턴가 방심하고 있었다. 사람 목숨이 한없이 가벼운 세계관을 경계하는 것도 잠시,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자 ‘초윤’의 몸이 지닌 막강한 능력에 적응해 버렸다. 다가오는 위협에 태연히 대처할 수 있고 다친 것도 금방 낫게 할 수 있다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든 능히 해결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던 것 같았다.
‘안일했다……. 무협지는 뒤로 갈수록 강자 인플레이션이 심해진다는 걸 깜빡했어.’
판타지 요소가 있는 장편 소설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현상이었다. 특히 주인공이 점점 강해지는 성장물은 평생 한 번 보지도 못할 경지로 묘사되었던 강자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우후죽순 등장하곤 했다. 더 이상 원래의 세계관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다면 아예 기본 능력치부터 다른 이세계에 덩그러니 주인공을 떨어트리는 경우도 왕왕 있을 정도였다.
꼭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무협지는 이미 적의 실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가 많았다. 한 알만 먹으면 불나방처럼 선천지기를 태워 일시적으로 경지를 올려 주는 약도 있었고, 고수의 시체로 만들어 낸 강시도 있었다. 진법이나 기관, 기물, 영약과 비급 등 어떤 설정을 붙여도 ‘불리함을 타파하고 이겨 내는 주인공’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강한 주인공’만 있다면 용인되는 장르였다.
즉, ‘초윤’의 강함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었다. 완전한 현실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이곳이 소설 속이기에 가능했다. 마지막에 붙은 단 한 문장으로 몇만 자에 걸쳐 풀어 왔던 모든 설정을 무너트릴 수 있고, ‘이 전쟁이 끝나면 네게 할 말이 있어.’라는 희망적인 대사가 사망을 예견하는 복선인 세계이기에.
온 산맥에 걸쳐 펼쳐 둔 진법을 보강한 뒤 터덜터덜 걸어 귀환하던 초윤이 절망적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마음 같아선 좀 더 공을 들여 철통같은 보안을 완성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일단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늦으면 늦을수록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울 제자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천오한테는 당분간 낮마다 일이 있다고 얘기해 두고…… 침입자가 있었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낫겠지? 얘하고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진짜 뭐부터 해야 되냐. 애초에 섬서성 쪽으로 흐르는 강은 여기 말고도 많을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들어왔을까? 쉽게 손댈 수 없는 곳이면 대처도 늦어지니까? 배후는 역시 마교밖에 없나? 화산파는 이 일을 알고 있을까?’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얼굴과 조용한 걸음걸이와는 반대로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해야 하는 일과 알아야 하는 정보가 너무나도 많아 정리하기도 어려웠다. 와중에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기도 했지만 바쁘고 착잡하기 때문인지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심서와 가까워지면서 초윤의 고민은 점점 더 방대해졌다.
‘모용서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아봐야 하잖아. 역시 희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나? 이런 걸 맡기기엔 껄끄러운 상대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된 마당에 산을 내려가서 알아보러 다니기도 그렇고, 애초에 미래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오늘 밤에 편지를 쓰긴 해야겠다. 표국에 다녀올 정신은 없으니까 그때 들었던 직통 서비스를 써 보자. 거기 있는 애들한테 아무런 이상도 없는지도 알아야 안심이 좀 될 것 같고…….’
……그건 부정할 수도 없이 사영이와 사현이었지. 잊을 만하면 되살아나는 기억에 가슴이 남아나질 않는 기분이었다.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은 트라우마가 없어도 사람의 정신력을 갉아먹는다고 했던가. 하물며 소중하게 키운 아이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보았으니 쉽게 묻힐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꿈보다는…….
“스승님, 돌아오셨습니까!”
낯익은 목소리가 불어나던 상념을 깨트렸다. 초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들었다. 마중을 나온 듯 이쪽으로 뛰어오는 천오가 보였다. 스승이 없는 동안에도 홀로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 운동을 하고 난 직후처럼 혈색이 좋았다. 이제 와서 발을 헛디뎌 비탈길을 구를 제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초윤은 습관처럼 걱정부터 했다.
“내리막에서는 뛰지 말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마음이 앞서 버렸습니다.”
스승의 앞에 도착해서야 멈췄으면서 말은 잘했다. 초윤은 땀에 젖어 들러붙은 천오의 머리카락을 깨끗한 손으로 무심히 넘겨 주곤 지나쳐 사분사분 걸어갔다. 스승의 귀환에 마냥 기뻐 보이던 천오는 곧 초윤의 곁에 따라붙어 보조를 맞추며 우물쭈물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저절로 눈이 갔다.
“저…… 스승님, 무심서에 들어가시기 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괜히 망설일 필요는 없다.”
“미무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하다가 마당의 울타리를 조금…… 망가트리고 말았습니다. 혼자서 고쳐 보려고 했지만 미처 수습할 새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바꿀 때가 되기도 했지. 신경 쓰지 말거라.”
아, 뭔가 했네! 그런 거였어? 뭐 이런 걸로 그렇게 걱정을 하니?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 신경이 탁 풀리다 못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애가 큰 사고를 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작은 일에 더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간만에 귀여운 면모를 보자 오늘 들어 처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맞이하러 나온 천오를 만났을 때부터 역시 내 새끼만큼 대견하고 착한 애는 없다는 생각에 울적함이 가시고 있기도 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무뚝뚝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지만 초윤의 화법에 익숙해진 천오는 꽤 안도한 기색이었다.
현대로 치자면 신나게 놀다가 유리창을 깨 먹었다고 솔직하게 토로하는 거나 마찬가지인가. 천오라면 분명 학교를 다녀도 인기가 많겠지. 흐뭇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초윤은 문득 천오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소식을 떠올렸다. 내용의 심각성에 어울리는 상황과 분위기를 기다리자니 또 때를 놓치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대뜸 네 아빠가 살아서 마교에 있다, 하고 말할 순 없잖아. 어떻게 운을 떼냐. 짧은 침묵의 틈새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의 흔들림이 잦아들 때쯤 초윤은 걸음걸이를 늦추며 입을 열었다.
“흑망검 주역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느냐.”
“마교의 소교주이며 제 아버지라고 알려 주셨던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자가 살아 있는 모양이다.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교주의 분노를 사서 본산 깊은 곳에 구금되어 있는 것 같더구나.”
“그렇습니까.”
“…….”
좋게 돌려 말하려던 초윤의 노력을 늘 배신하는 주둥이는 이제 이상할 게 없었다. 이번에도 저질렀구나 싶어 눈앞이 깜깜해지고 식은땀이 흘러도 의외는 아니었다.
전혀 뜻밖이었던 건 천오의 담백한 반응이었다. 깔끔하고 담담하다 못해 별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한 마디 이후로 정적이 이어졌다. 당황한 초윤은 뻣뻣하게 발걸음을 멈추고 천오를 돌아보았다. 올곧게 마주쳐 오는 천오의 새까만 눈은 갑작스러운 스승의 행동에 의아할지언정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초윤은 얼떨떨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만나고 싶거나, 구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것이냐?”
“……들어야 하는 겁니까?”
아…….
나도 참…… 일반적이지 않은 걸로 치자면 네가 제일이었지…….
인성을 많이 채우긴 했지만 넌 기본부터 남다른 애였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갛기만 한 얼굴이 며칠에 걸친 고민을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제 옆에서 기특하게 구는 모습만 한참 봐 온 탓에 천오의 독특한 정서를 염두에 두지 않은 초윤의 실수였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성격이 무던하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러다간 언젠가 정말 크게 말실수를 하고 말 테니까.
천오를 위해 근심하던 시간이 부질없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도 배려 없는 입을 갖고 있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초윤은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앞을 향했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다. 그래도 조금은 의외구나. 살아 있는 혈육이 있다는 것을 알면 좋아하리라 생각했다만.”
좋아하는 것뿐인가. 일족의 복수를 인생의 목표로 내건 행보로 봐선 당장 구하러 가겠다며 폭주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며 상식과 도덕이 모자란 구석이 있긴 해도 가족만큼은 끔찍이 여기는 게 아닐까 했는데,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은 역시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걸까.
천오의 대답을 기다리며 묵묵히 걷자 짧은 산책의 끝이 보였다. 이대로 무심서에 돌아가면 대화의 흐름이 끊길 것 같았다. 날이 저물기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들어가도 괜찮겠지. 방향을 틀어 길을 벗어나자 군말 없이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천오의 신중한 목소리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