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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03)화 (103/257)

103화

“만일 그 사람이 제 어릴 적 기억 속에 있었다면 무언가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연유로 종적을 감추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습니다.”

아, 역시 그렇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괜한 말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확 들었다. 나쁜 기억은 무조건 묻어 둔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아니었지만, 전문 지식이 없는 초윤이 도와준답시고 함부로 들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영이와 사현이를 보낸 뒤 천오와 많은 대화를 나누자고 마음을 먹었어도 이 주제만큼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말조심을 해서 나쁠 게 없다고 마음먹자마자 실수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마다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제자를 가만히 둘 순 없었다. 속으로 아무리 식은땀이 흐르든 스승이 된 이상 그럴듯한 답을 해 주어야 했다.

“너는 일곱 살 남짓할 때도 세가에서 잡일을 하던 이들의 안부까지 물어보던 아이였다. 이어진 피보다 쌓아 온 정을 중시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참상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제자의 모습은 초윤의 기억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가족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과 별개로, 천오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처음 본 모용서를 해치려 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요소는 아무래도 관계인 것 같았다. 정을 준 사람은 나름 소중히 여기지만 그런 게 없다면 ‘죽이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오랫동안 받아 온 교육 덕분에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굳이 하지 않지만, 그런 것도 없다면 죽이지 않을 필요 자체를 못 느끼는 게 아닐까.

물론 모용서가 먼저 진검을 들고 천오를 공격했으니 이번의 일을 근거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초윤은 그저 여러 개의 가설을 세우며 조심조심 나아갈 뿐이었다.

‘꼬박 8년을 함께 살아왔는데도 어째 가면 갈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는 기분이네……. 아니, 성장하면서 애도 점차 변하는 건가.’

“네가 이 소식을 들으면 조바심을 내지 않을까 우려했다. 아끼는 이들을 잃은 경험이 있으니 혈육이 살아 있다는 말에 내내 속을 끓이게 되는 건 아닌지 말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에게 궁금한 건 몇 가지 떠오르지만 그리 절박하진 않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스승님.”

“그렇다면 됐다.”

아무래도 초윤의 제자는 평생 만난 적 없는 친부모를 찾아 여정을 시작하는 주인공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혈연은 가장 쉽고 질긴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있으니만 못하면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주박이 되기도 하니 이에 집착하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일 수 있었다.

단출하게 대답한 초윤은 한결 개운한 기분으로 이끼 낀 바위를 사뿐히 밟았다. 개인적인 감정을 직접 입 밖으로 낸 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산안개처럼 낮고 조용한 천오의 목소리가 초윤을 안심시키듯 그 뒤로 덧붙었다.

“저는 스승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스승님께서 저를 거두어 주신 이후로 접점도 없는 사람을 갈구할 정도의 결핍은 느껴 본 적 없습니다. 스승님 이외의 이유로 감정에 휩쓸려 경솔히 행동할 일은 없을 테니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를 이유로 해서도 안 되지. 네가 경거망동하는 원인이 된다면 스승으로 있을 면목도 없다.”

흘겨보듯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천오는 입을 다물었다. 나무라게 되어 버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항상 고민하던 부분의 확답을 받은 것 같아 은근히 흐뭇했다.

역시 자신에게는 분에 넘치게 기특한 제자였다. 가끔 곤란한 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 애 키우면서 마냥 편하기만을 바랄 수가 있나. 초윤이 천오를 위하는 만큼 천오 또한 초윤에게 수없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 낯설고 무서운 세상에서 굳건히 버티며 성장할 수 있도록 의지가 되어 준 것은 천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앞날을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 고민할 게 어디 있냐. 4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애들 앞에 꽃길 깔아 줄 생각만 하면 되지. 이제 와서 원작 걱정해 봤자 뭐 해. 원작 루트는 내가 천오를 데려왔을 때부터 끝났다고 봐야 해.

가벼운 걸음걸이만큼 기뻐진 초윤은 다소 편파적이고 책임감 없는 결론을 내렸다. 그 대견한 제자가 저도 모르게 일으킨 검풍(劍風)이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를 고치느라 팔자에 없던 DIY를 꼬박 일주일 동안 하며, 훗날 이런 사소한 일은 사건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충격을 받게 되리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에게 각인을 남기는 첫인상만큼 효율적인 거짓말은 없어요. 첫 만남부터 상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로 머리 좋고 자만하는 이라면 특히 더 속이기 쉽지요. 자신의 오감을 기반으로 한번 판단을 내리면 그 뒤로 모든 걸 제 결론에 맞춰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가 사영의 귀에 조곤조곤 교활한 이치를 밀어 넣었다. 냉랭한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사영은 찬찬히 시선을 들어 앞에 있는 물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란 문양으로 자개를 박아 넣은 보석함과 주석을 바른 청동 거울. 그 안으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주위를 메운 호화찬란한 사치품에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것이 싫어 손목과 발목,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끼우지 않았다. 복면을 쓸지언정 분과 연지는 찍어 바른 적 없었고,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하늘 나풀거리는 의복 대신 거추장스럽게 휘감기지 않는 무복을 입었으며 비녀만 없었다면 머리카락도 썩둑 잘라 냈을 터였다.

하물며 표정조차 불쾌함을 감추지 않은 날것 그대로였으니, 사영은 이 방에서 홀로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와 눈싸움을 하던 사영의 턱에 누군가의 섬세한 손끝이 닿았다. 사영을 이리로 불러 거울 앞에 앉힌 장본인, 하오문주 희였다.

“그리고 기품은 백이면 백 이득을 남기는 강렬한 첫인상이지요. 고상한 품위, 드높은 품격,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 것 같아요?”

턱선을 그리듯 미끄러지는 호갑투에 소름이 돋아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서 간사한 가르침을 속삭이던 남자는 사영의 예민한 반응에 작은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람의 밑에서 배우고 일한 지 몇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사영은 그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축축한 바닥에 배를 깔고 기어가는 뱀, 혹은 비단옷 아래 꼬리를 숨긴 여우와 함께 사는 기분이었다.

사영은 인상을 쓴 채 착실히 대답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언행과는 별개로, 희가 알려 주는 염세적인 지식들은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자세와 말투 아닙니까. 사용하는 어휘, 눈짓과 손짓, 흔들림 없는 머리와 어깨, 규칙적인 발걸음과 차분한 목소리처럼 지난 몇 달간 제가 교육받은 것 말입니다.”

“맞아요. ‘타고난 기품’ 같은 건 전부 허상이에요. 이런 걸 타고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들을 수 있는 말이지요. 기품은 교육으로 몸에 익힐 수 있는 분야고, 이제 마지막 하나만 배우면 완성될 거예요.”

그렇게 말한 희는 보석함의 서랍을 줄줄이 열어 사영의 앞에 늘어놓았다. 귀금속과 보옥, 진주와 상아로 만든 온갖 패물이 종류별로 나뉘어 자태를 드러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희의 물건이었으니 그리 놀랍진 않았다. 광동에 있는 하오문의 본거지에 머물게 된 지 4년, 희의 호사스러운 생활이 익숙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걸 꺼내는 저의는 여전히 모르겠다. 이제 와서 몸단장을 하라고 말할 사람은 아닌데. 사영은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장신구에서 눈을 돌려 희를 바라보았다. 절세의 미인이 생긋 웃는다고 유야무야 넘어갈 정신력이라면 여태껏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

“기품은 여유예요. 재력, 권력, 지력, 무력, 어떤 것이든 좋아요. 이것만큼은 내가 제일이라는 확신에서 배어 나오는 태도가 바로 기품이에요. 남을 얕잡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는 거지요.”

인간은 보기보다 훨씬 더 짐승에 가까워서…… 상대가 자신보다 우월한 것 같다면 본능적으로 눈치부터 보거든요.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 희가 덧붙였다. 태어날 때부터 황족이었던 사람이 제일과 우월을 입에 담다니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지 않나. 억센 반골 성향이 속으로 빈정거렸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희는 사영의 불만스러운 기색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는 약선 대협이라는 좋은 예시가 있어요. 그만한 사람을 오랫동안 지척에서 볼 기회는 드물지요. 물론 약선 대협의 달관한 분위기는 아직 닮으면 안 되지만, 당신은 지나치게 여유가 없는 편이니 이 정도가 딱 좋을 거예요.”

약선, 사영이 유일하게 인정하고 따르는 스승님. 희와는 다른 의미로 인간 같지 않던 사람. 그를 떠올리면 오감에 새겨진 기억이 습관적으로 떠올랐다. 시원하고 습했던 숲의 공기와 저녁마다 들어가던 약탕의 냄새, 정갈한 맛의 식사와 결코 변할 것 같지 않던 선인의 모습. 약선 초윤과 함께 보냈던 시간만큼은 치열할 필요가 없었다. 불행을 겪어 본 적 없는 평범한 아이처럼 어른을 믿고 의지하며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었다.

날 섰던 기분이 저도 모르게 누그러졌다. 희가 말하는 여유와 기품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를 습득하는 것이 왜 이득인지도, 사람에게 각인을 남기는 첫인상이 무엇인지도 납득이 갔다.

그렇지만 사영은 마땅히 내세울 만한 능력이 없었다. 자신의 역량을 확실히 알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는 스승의 조언에 따라 이전부터 스스로를 가늠해 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사영은 스승의 무공과 약학처럼 무언가를 통달하지도 않았고, 희의 금력과 모략처럼 특출한 재주도 없었다. 기껏해야 선천적인 지능과 순발력이 남들보다 우수하고 집요할 뿐인데. 열심히 가꾸고 있긴 하지만 빛을 보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과연 어떤 점에 확신을 가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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