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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04)화 (104/257)

104화

진중한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영의 심각한 얼굴을 절대 가만두지 않는 희가 얄미운 말을 냉큼 뱉었다.

“하지만 대뜸 이렇게 말하면 막막하겠지요? 당신에게 압도적으로 출중한 면모가 생기려면 최소한 10년, 빨라도 8년이 걸릴 테니까요. 동년배 사이에선 따를 자가 없긴 하지만 겨우 이런 평가를 듣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딴 식으로 구니 4년을 꼬박 부대끼고 살아도 좋아질 리 없었다. 감탄을 할 만하면 대놓고 속을 긁어 대고, 진심으로 마음이 상하기 전에 귀신같이 알아채선 살살 달래 풀어 준다. 수많은 인간 군상을 겪어 온 사영에게도 이렇게나 사람을 쥐락펴락하며 장난질을 일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라서 더욱 짜증이 솟는다.

경계심이 강한 사영이 이토록 솔직하게 불쾌한 기분을 티 낼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속을 텄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간을 확 찌푸리기 무섭게 나열된 패물을 가리킨 희가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짠! 색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어요.”

“……뭡니까.”

“알다시피 우리 특기는 거짓말이잖아요? 진짜 여유가 생길 때까진 흉내라도 내 보도록 해요. 다른 건 다 익혔으니 이제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나 가질 법한 소양만 남았어요. 바로…… 낭비하기!”

“……낭비가 어떻게 기품이 되는 겁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말했잖아요. 당신은 과하게 빈틈이 없으니 딱 이 정도의 바보짓을 하는 게 좋다니까요? 자, 오늘부터는 근검절약과 절차탁마 같은 것도 다 금지예요. 배울 것도 없고, 일할 것도 없어요. 운동도 하루 한 시진 이상은 금물! 그동안 이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이 소모하는 게 유일한 숙제예요.”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난생처음 들어 보는 경악스러운 발언에 사영이 입을 떡 벌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희는 아주 짓궂은 얼굴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는 것도 금지. 하루 종일 다른 사람 돕는 것도 금지. 힘들고 지치는 건 다 금지! 무조건 광동성에 콕 박혀서 온갖 금은보화를 금침으로 삼아 빈둥거려야 해요. 알았지요?”

그렇게 말한 희는 출장을 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행선지와 목적을 알리지도 않고 훌쩍 도망쳐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연못의 잉어처럼 뻐끔거리는 동안 사영이 새로 받은 과제에 관한 소문은 하오문에 온통 다 퍼졌다. 키득키득 웃으며 소저도 슬슬 쉴 때가 되셨다고 말하는 하오문도들 사이에서, 사영은 결국 희의 괴상한 지시를 무시하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몇 날 며칠을 허랑방탕하게 보내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지금, 사영은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속은 것 같았다.

“진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늦은 오후,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광동의 햇볕은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소금기 묻어나는 바람에 잘 닦아 놓은 난초가 산들산들 흔들렸고 먼 곳에선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영은 책상에 볼을 기대고 엎드린 채 기운 없이 중얼거리며 넓은 방 한쪽에 있는 휘황찬란한 자리를 응시했다. 푹신한 비단 보료와 자단목 가구, 그리고 각종 수납장이 작은 반경 안에 전부 구비된 공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내는 사람을 위한 지정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층에서 일어난 소란이 귀에 들어왔다. 어시장 물고기처럼 혼탁하게 죽어 가던 눈이 단숨에 번쩍 뜨였다. 사영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유쾌한 웃음소리와 재잘대는 잡담 소리가 천천히 이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곧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벌컥 열리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왔어요! 많이 기다렸어요? 모처럼 갖는 휴식인데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나가지 그랬어요!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이런 곳에 있담.”

“……문주님.”

“사실 올라오면서 들었어요. 방에서 쫓겨났다면서요? 그러게 왜 오전 내내 힘들게 직접 청소를 해요. 일하지 말라니까. 당신 방은 이제 먼지 한 톨도 없이 깨끗하대요. 지금쯤이면 돌아가도 될 거예요.”

희의 발랄한 목소리가 나른한 평화를 화사하게 깨트렸다. 그를 안고 올라온 호위무사 여와는 무뚝뚝한 얼굴로 걸음을 옮겨 방을 가로질렀다. 익숙한 자세로 여와의 목에 팔을 감고 있던 희는 사영과 눈이 마주치자 기함을 했다.

“아니, 못 본 사이에 왜 더 초췌해진 거예요? 분명 다들 전력으로 당신을 쉬게 했을 텐데?”

“…….”

그것 때문이야. 그것 때문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한 사영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심호흡을 하며 움켜쥐고 있던 책상을 놓았다. 하마터면 상사의 앞에서 모조리 뒤집어엎으며 패악을 부릴 뻔했다. 쉬기는 개뿔, 차라리 방에 돌아가지도 못할 정도로 일정에 치이는 게 훨씬 나았다. 매일이 절박하고 아쉬운 사영으로선 아까운 시간과 재산이 무의미하게 날아갈수록 정신적인 피로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함께 부대끼며 살고 있는 강서단의 단원들은 휴식기(말이 휴식이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전보다 예민하고 피폐해진 사영의 분위기에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사영은 생전 겪어 볼 틈도 없었던 우울을 느끼는 중이었다.

여와는 희를 보료에 앉히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준 뒤 원목 책상을 들어 그의 앞에 놓아 주었다. 가락지를 낀 희의 손이 충성스러운 호위 무사의 뺨을 자상하게 쓰다듬고 어깨를 도닥였다. 그대로 한껏 웃어 보인 희는 여와가 물러나 옆에 서자 곧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내 실수네요. 당신이 성취감과 향상심에 중독됐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어요.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한테 무작정 쉬라고 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요. 앞으로는 좀 더 자세하게 알려 줄게요.”

“……기품 연습의 일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나태의 맛을 가르쳐 주고 싶었거든요. 당신처럼 매일매일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허무감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어서요. 아니면 그런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해서 꾸역꾸역 계속하다가 천천히 말라 죽거나.”

약선 대협과 있을 땐 빡빡하게 산 것 같지 않아서 금세 적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더 중증이 됐담. 희가 들으라는 듯한 혼잣말을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불편한 심기를 한껏 나타내듯 팔짱을 끼고 있던 사영이 제 팔뚝을 꽉 붙잡았다.

물론 무심서에서 지낼 때는 동생들과 함께 노닥거려도 불안한 마음 따위 느낀 적 없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렸을 때 이야기였다. 스물을 넘은 지 예도옛적인 데다 할 게 산더미 같은 지금에 빗댈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따위 배부른 회의감에 사로잡힐 인간이 아닌데! 마치 업신여김을 당한 것 같은 느낌에 날카로워진 신경이 불쾌하게 출렁거렸다. 희는 바짝 가시를 세운 사영을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곤 다시금 밝게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소저. 이제 당분간은 쉴 틈도 없을 거예요. 소식은 들었어요? 끝나자마자 곧장 달려왔으니 여긴 아직 모르려나.”

“……무슨 소식 말입니까?”

“섬서성에서 열린 삼보대회요. 누가 최종 우승을 했는지 알아요?”

광동성 붙박이가 어딜 다녀왔나 했더니 섬서성인가. 화산파를 비롯한 도교 문파들이 이번에 연 삼보대회는 규모가 큰 만큼 준비 기간도 길어 공표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도 오랜 기간에 걸쳐 홍보와 섭외를 하고, 물밑으로는 도박까지 주도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강제 휴식기와 대회 시기가 딱 맞물린 탓에 실제 상황은 하나도 전해 듣지 못했다. 누가 예상을 뒤엎고 우세를 보였는지, 누가 허탈하게 떨어졌는지,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진 않았는지 등등 사소한 근황 하나까지도 사영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에 목이 마른 사영은 지난 한 달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각 문파에서 참가하는 후기지수들의 우승 확률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예상도까지 만들다 빼앗기기도 했다.

“누구입니까? 역시 화산파나 무당파에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청성파입니까?”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를 찾는다는 취지의 삼보대회는 참가할 수 있는 연령의 폭이 좁은 편이었다. 백협맹주의 혈육으로 이전부터 뛰어난 성장을 보여 온 남궁세가의 인물들과 천재로 손꼽히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나이 제한에 걸려 제외되자 남은 건 고만고만한 실력의 청소년뿐이었다.

별호는 거창해도 다른 이들을 압도할 역량은 못 되는 이들이 모여 치고받고 싸웠을 테니 관객들의 재미는 쏠쏠했겠지만, 우승자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속한 단체의 조력과 암수가 승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뜻이었다.

즉 이번 대회는 속한 문파의 세력이 클수록 유리했을 게 분명했다. 머릿속으로 적절히 후보를 추리던 사영은 희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희는 사영이 아주 대경실색을 하며 충격을 받길 바랄 때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절대 안 놀라야지. 지나가던 학사가 갑자기 난입해서 다 쓸어 버리고 이겼다고 해도 ‘그렇습니까.’ 한 마디만 해야지. 저 사람이 흡족하게 여길 일은 하지 말아야지.

사영은 비뚤어진 반항심으로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곧 한없이 기쁘다는 듯 튀어나온 희의 말은 사영의 어설픈 상상을 초월하다 못해 정신까지 아득하게 날려 버렸다.

“축하해요, 소저! 1차 삼보대회의 우승자는 바로 사현 소협이에요. 아니, 이제 천보도(天寶刀) 임사현 소협이라고 해야겠네요.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대견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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