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06)화 (106/257)

106화

종이 위로 붓 끝이 유려하게 미끄러지며 누군가의 이름을 적었다. 제갈설린, 모르는 건 아니지만 무림 대회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칠성검 모용단은 섬서성에 오자마자 제갈세가로 갔어요. 겉으로 댄 이유는 친목과 교류였지만 실제 목적은 다를 거예요. 모용세가와 제갈세가 사이에는 요녕의 비동을 조사하면서 생긴 긴밀한 비밀이 있으니까요.”

모용세가는 기어코 4년이 넘도록 비동을 숨겼다. 제갈세가, 아미파, 소림사, 하북팽가, 그리고 개방 등 결코 적지 않은 수의 협력자에게 신물의 존재를 알렸으니 완전히 새어 나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순 없었지만, 최소한 남궁세가가 아무런 대응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에 가까웠다.

개개인의 능력은 걸출해도 야심이 없는 탓에 권력 싸움에선 언제나 거론되지 않던 모용세가가 명실상부 중원의 패권을 쥔 남궁세가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까닭은 모용세가 자체가 중원에서 멀리 벗어난 곳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 백협맹이 손을 뻗기 어렵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점차 거세지는 남궁세가의 폭거가 무림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합을 조직한 칠성검 모용단이 고지식한 성격과는 다르게 가끔 교활해지는 것도 한몫을 했지. 좋은 집 도련님에게 그런 걸 가르쳐 준 사람이 어디의 누군지는 몰라도…….’

그리고 하나를 더 꼽자면 바로 눈앞의 이 사람일 것이다.

사영은 희가 들고 있는 붓부터 손을 거쳐 그의 얼굴을 힐긋 올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희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모용세가가 제갈세가를 다녀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설린 소저의 의뢰가 들어왔어요. 의학 연구를 위해 섬서성 전역에서 발생하는 질병에 관한 통계를 실시간으로 얻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솔직히 아주 기특했지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왕정도 그냥 넘어갔거든요.”

“왕 지부장님이 말입니까?”

“네. 흠잡을 데 없는 이유잖아요. 학구열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어린 소저가 집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없는 자신 대신 시비를 보내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얻는다. 그것뿐이니까요.”

종이 위에 쓰인 ‘제갈설린’이라는 이름 옆에 ‘질병’과 ‘섬서성’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사실 사영 역시 제갈설린의 부탁에서 어색한 점을 찾을 순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수상한 구석은 딱히 없는 의뢰 아닌가. 제갈설린은 똑똑하지만 아직 꾀를 부리는 법은 모르는 어린아이이기도 하고.

왕정 지부장은 화산파와 종남파, 제갈세가가 한꺼번에 자리 잡은 섬서성을 능수능란하게 파악하는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가 껌뻑 속았다고 말하는 희는 중원 전체의 하오문을 총괄하고 있었다. 어느 쪽을 더 믿을지는 이미 명확했다.

“‘실시간으로’라는 조건에서 생각나는 게 없나요? 참고로 의뢰 기간은 석 달이고, 갱신 보고는 매일 아침이에요.”

“보고 간격이 상당히 짧군요. 급한 일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자주 연락을 받을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연구 목적이라고 하기엔 과거의 기록을 요청하지 않았고, 지금부터 자료를 모은다고 해도 전체 기간이 짧고, 더불어 수시로 내방해서 이변은 없는지 물어보고 갔어요. 찾고 있는 병이 있다고 했지만 증상은 명확히 말하지 않았고요. 처음에는 삼보대회 때문에 외지인이 다수 들어오게 된 일을 경계하나 싶었지만…….”

‘섬서성’이라고 쓰인 단어 밑에 ‘전역(全域)’이 적혔다.

“유입을 걱정했다면 사람들이 몰리는 도심에 집중했겠지요. 하지만 설린 소저는 산골 벽지까지 가리지 않고 섬서성 전역의 사정을 알고 싶어 했어요. 의뢰 기간이 애매하게 석 달에 그친 건 소저의 재물이 충분치 않아서 그럴 거예요. 섬서성은 생각보다 넓으니까요.”

“섬서성이 아무리 넓다 한들 제갈세가의 재산이라면 충분히 오랜 기간 동안 살피고도 남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개인적인 자산을 썼다는 건…….”

“맞아요. 이 조사는 설린 소저가 무리하게 혼자 진행한 거예요. 세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값비싼 서적과 기물을 마음껏 구매할 수 있는 설린 소저가 어째서 이 일에 관해선 집안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을까요?”

희는 한 달 전 섬서성으로 향했고, 모용세가가 제갈세가에 방문한 시점은 그보다 이전이었다. 즉 희는 섬서성에 도착한 뒤 제갈설린의 의뢰를 뒤늦게 전해 듣고 그것만으로도 이만큼의 추론을 해냈다는 뜻이었다.

인물과 배경을 하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것뿐이라면 과대망상에 불과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리는 없었다. 사영이 언제쯤 따라잡을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대는 스승을 제외한다면 이 남자뿐이었다.

더 발전해야 한다. 시야를 넓히고, 경험을 쌓아야 한다. 사영이 종이 위의 글씨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머리를 굴렸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 들키면 안 되는 상대가 세가 내부에 있다. 둘, 조사를 진행하는 이유를 세가에도 밝힐 수 없다.”

“후자가 전자를 포함할 수 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뿐이에요. 어쨌든 집안에는 알릴 수 없는 거지요. 다만 이 경우에는 또 가능성의 가짓수가 많아지니 관점을 옮겨야 해요. 도대체 누가 설린 소저에게 이런 바람을 불어넣었을까요?”

희는 ‘제갈설린’이 적힌 종이의 반대쪽 끝으로 붓을 옮겨 스스로의 질문에 직접 답했다. 제갈설린과 대립하듯 적힌 이름은 이번에도 역시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었다.

“모용서……라면, 모용세가의 막내 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서 공자가 바로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에요.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새 사현 소협과 친해진 것 같더군요. 사현 소협이라면 그도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거예요.”

벌써부터 어린 한량 소리를 듣고 있는 모용서가 현아와 친해졌다고?

사영의 얼굴이 단번에 험악해졌다. 모용세가의 막내 공자 모용서라면 이미 온 무림에 소문이 자자했다. 가주인 모용정이 데리고 들어온 사생아, 배다른 형인 모용단과는 정반대로 특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능한 아이 등등 태반이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실제로는 모용서가 모용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중의 입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나쁜 쪽으로 과장되었을 뿐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희의 의미심장한 말과 이제껏 들어 온 모용서의 형편없는 평판, 동생을 향한 애정이 뒤섞이니 분노를 가장한 걱정이 불쑥 치밀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미심쩍다는 섬서성의 분위기는 무엇이고 모용서는 무슨 일을 벌인 것인가. 사영이 미처 묻기도 전에 희가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서 공자가 설린 소저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설린 소저는 이에 넘어가 비밀리에 섬서성을 감시했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 ‘무언가’가 무엇인가……. 분명 규모가 크고 위험하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정보를 얻은 것 같아서 삼보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지켜봤는데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거든요. 결국 실의에 차서 돌아왔는데…….”

“…….”

“오늘 아침에 우리 해부(海鳧)가 가져다준 새 소식이에요. 이걸 보자마자 눈이 확 뜨이더라고요.”

해부는 희가 돌보는 영수(靈獸)로, 속도가 빠르고 영리하지만 굉장히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어 하오문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몇 없었다. 까마귀처럼 온몸에 새카만 깃털을 둘렀지만 신장은 다섯 자에 가까웠고, 두상도 어린아이 정도로 굉장히 컸다. 부리 역시 한 자 다섯 치를 넘어가는 길이에 안구는 동공이 작은 사람의 눈과 비슷해서 보기만 해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을 매번 예쁘다는 듯이 쓰다듬고 먹이는 희가 신기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해부가 직접 전서구의 역할을 했다고? 자존심 높은 영수가 인간의 심부름을 했단 말이야?

믿기 힘들었지만 꼬치꼬치 캐물으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사영은 일단 제일 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얌전히 기다렸다. 흐뭇한 얼굴의 희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사영에게 내밀었다. 이를 받아 펼치자,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사영은 인상을 쓴 채 정갈한 글씨로 적힌 편지를 허겁지겁 읽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승자 소식에 버금갈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스승님께서 계신 불귀 산맥의 강에 누군가 짐조를……. 이게 정말입니까?”

“약선 대협께서 허언을 하실 분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거면 전부 설명이 돼요. 누군가가 섬서성을 독으로 물들이려 했고, 서 공자는 이 음모를 설린 소저에게 알렸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약선 대협께서 먼저 일을 해결해 주신 덕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설린 소저는 꽤 속을 끓였을 거예요.”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렇게 큰 규모로 중원에 해를 끼치고 싶어 하는 세력은 하나밖에 없잖아요?”

“……서 공자는 이걸 어떻게 안 겁니까?”

“그걸 도저히 모르겠지요? 그래서 천운이 따랐다는 거예요. 사현 소협이 이제부터 서 공자와 아주 친해진다면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현아가…….”

위험하지 않을까?

만약 모용서가 마교와 관련이 있다면, 아니면 아예 모용세가가 마교와 긴밀하게 내통을 하고 있어 모용서가 이를 엿들은 거라면 이들과 접촉하는 사현이가 큰 위험에 처하는 것 아닐까?

덜컥 겁부터 났다. 불안감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도 몰라 뻣뻣하게 굳어 있자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지켜보던 희가 명백히 다른 질감의 웃음을 지으며 안심시키듯 말했다. 조용히 배어 나오는 감탄, 그리고 미묘하게 섞인 패배감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괜찮아요, 사영 소저. 서 공자와 모용세가는 마교와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사실…… 4년 전 하오문에 요녕 지부를 세운 이후로 쭉 주시하고 있었거든요. 약선 대협이 그를 지켜보라고 조언을 남겨 주셨어요. 분명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것이겠지요. 정말이지…… 이길 수가 없는 분이네요.”

“예?”

4년 전이라면 사천에서 희를 처음 만났을 때다. 스승님 역시 희와 초면이신 것 같았는데 언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지? 늘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심계라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영은 탄복하는 와중에도 향상심 하나만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만일 정말로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하셨다면, 궁극적으로 무엇을 알려 주려고 하셨던 걸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의도를 파헤치고 고심한 끝에 희미한 결론이 보였다. 사영은 책상 위에 편지를 곱게 올려놓은 뒤 허벅지에 단정히 손을 올렸다.

“즉…… 모용서는 아군이며,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나 관계를 지니고 있을 수 있으니 더 깊게 파헤치고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까? 의도치 않게 자연스러운 접근을 해 버린 현아는 큰 역할을 떠안게 된 것이고요?”

“서 공자의 목적을 알 수 없는 이상 완벽한 아군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매우 중요한 포섭 대상이라는 건 확실해요. 당신의 말대로 사현 소협의 행보에 달려 있겠죠.”

“……알겠습니다. 현아에게 잘 전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안부 편지부터 보내고 와요. 자세한 건 그 뒤에 알려 줄게요.”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남긴 사영이 방을 나갔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희는 문이 닫히자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희는 품에서 사영에게 보여 주지 않은 서신의 두 번째 장을 꺼내 펼쳤다. 가지런한 글자의 나열을 지그시 바라보던 희는 옆에 서 있던 여와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여와, 광명교가 무엇인지 알아요?”

“모릅니다.”

“흐음…….”

내려놓았던 붓을 다시 든 희가 종이의 한가운데에 문장 하나를 적어 내렸다. 여와의 고요한 시선이 희의 붓 끝에 닿았다.

「짙은 어둠은 찬란한 빛을 낳는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