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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08)화 (108/257)

108화

“이놈만 살려 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소이다. 이 뒤로 내가 만드는 모든 검을 달라 해도 드리겠소. 아니면 평생 구걸만 하며 빌어먹고 살라고 해도 그리하겠소. 그러니 부디…….”

“실없기는.”

황추의 결의를 단칼에 자른 건 남자의 평온한 목소리였다. 황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뒤로 해가 떠오르고, 햇빛이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불길이 타오르는 가마를 눈앞에 두고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던 황추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눈이 부셨다.

남자는 손을 뻗어 가볍게 휘저었다. 나비를 쫓는 것처럼 허공을 헤집는 손길이었지만 그에 맞추어 홍을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졌다. 하지만 그가 부리는 신기는 황추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호, 홍아야……. 홍아야. 이게 정말…….”

“이틀 내로 눈을 뜰 테니 옆에 붙어 있거라. 아이가 기운을 차리는 대로 절강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장간은 평소대로 나가야 이변이 일어났다는 걸 숨길 수 있겠지. 쾌차했다는 사실을 들켜 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 밖으로 내보내진 말거라.”

드러난 홍의 몸은 멍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부러진 뼈와 염증으로 퉁퉁 부어올랐던 팔다리도, 차마 손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비틀렸던 관절도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다신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온전한 육신, 아프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은 아이를 앞에 둔 채 황추는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눈물이 메마른 낯을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약함을 등에 둘러멨다. 그리고 머리를 틀어 올려 죽립을 쓴 뒤 황추를 스쳐 지나갔다. 작게 나부낀 하얀 옷자락이 황추의 어깨를 쓸었다.

“대장간에는 홀로 들어가겠다. 배웅은 나오지 말거라.”

“……백홍관일 역리일식.”

변함없이 평온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황추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조용히 말했다. 망설임 없이 나가려던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 게 느껴졌다.

황추의 억센 손이 홍의 이불을 움켜쥐었다.

“불길한 뜻이니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검의 이름으로 생각난 것이오. 난 그것이 백 가지 재앙을 불러오는 흰 무지개가 되고, 이치를 거슬러 태양을 가리게 되길 바랐소이다. 그럴 만한 힘을 능히 지니기도 했고 말이오.”

“…….”

“대협은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애병(愛兵)을 지니고 있으니…… 동행한 청년이 그것을 갖게 되겠지. 모쪼록 보탬이 되길 바라오.”

고맙소, 고맙소……. 황추는 한참을 중얼거렸다. 등 뒤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문이 열리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가 이미 떠나갔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깊게 잠든 아이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숨죽인 오열이 허름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중원에서 동쪽 끝, 본래의 운명을 빗겨 난 파란의 시작점이었다.

소금기가 짭짤하게 묻어나는 바닷바람을 한 몸에 맞으며 바닷가를 향해 걷고 있는 초윤은 굉장히 착잡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검 중 하나 때문이었다.

‘그냥 당장 만들 수 있는 엄청 좋은 검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어두운 사연이 있다는 사실은 안 가르쳐 줬잖아! 애가 쓸 검이 마검이면 어떡하냐고!’

천오의 나이도 이제 올해로 열아홉 살, 슬슬 진검을 주어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말이 더 알맞았다.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진검을 갖게 되다니 무림인으로선 아주 늦다 못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성년자인 천오에게 진짜 검을 주는 건 역시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성인으로 간주하는 나이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인 데다 여태껏 자기 소유의 진검 하나 없다는 사실은 천오의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진검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은 십 년도 전에 갖췄지만(그리고 4년 전에는 정말 죽일 뻔한 적도 있었지만)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몸이 자랄 때 그에 맞지 않는 검을 들면 나쁜 버릇이 생긴다는 둥, 무기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둥 온갖 핑계를 들어 가며 시기를 늦췄다. 착한 천오는 스승의 어설픈 변명에도 의구심을 갖거나 불만을 표하는 일 없이 따라 주었다.

그러나 천오는 이제 하윤이 본래 살았던 세계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초윤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초윤은 결심을 굳히자마자 곧장 다음 난관에 부딪혔다.

‘검은 어디서 구하지?’

아주 근본적인 문제였다.

‘초윤’의 취우(驟雨)를 만든 대장장이는 일찍이 이승을 하직한 지 오래였다. 거기다 세상 돌아가는 꼴에 관심이 없던 ‘초윤’이 지금 시대의 대장장이를 알 리도 없었고, 아무 번화가나 찾아가서 대충 검을 맞춰 주자니 이 또한 용납할 수 없었다. 현대로 치자면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온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노트북을 사 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초윤의 재정이 그리 빈곤한 것도 아닌데 아무거나 쥐여 줄 순 없었다. 기왕 주게 되었다면 최고의 검을 선물하고 싶었다.

초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두 번 나오기 어려운 불세출의 천재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진령 산맥에서 절강성까지 중원을 횡단했다. 산을 내려오기만 하면 사건이 터진다는 징크스를 감수하고 떠난 오랜만의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동쪽 끝에서 초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믿음직한 대장장이가 아니라 폐인이었다.

‘매번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만한 실력의 장인이라면 자존심이 엄청 강하리라 예상하고 준비한 게 많았다. 돈으로 회유하려 들면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르니 약도 듬뿍 챙겼고, 여차하면 영약까지 꺼낼 생각이었다.

치료로 퉁치게 된다면 싸게 먹히는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게 설마 이렇게 되다니.

‘그래도 아까 보니까 완전히 어두침침한 검은 아니던데…… 하지만 흉흉하기 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천오가 드는 첫 진검이 과연 이런 거여도 괜찮은 건가? 재앙에 일식이라니 말이 되냐고…….’

고대의 중국에서 무지개는 불길한 징조 취급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하얀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지나는 모습’의 천문 현상인 백홍관일(白虹貫日)은 나라가 통째로 뒤집힐 만한 재난의 전조라고 여겨졌다.

고작해야 무지개가 이 정도인데, 태양이 달에 아예 가려지는 일식은 말할 것도 없이 흉조였다.

그리고 천오에게 주려고 받아 온 검은 이 두 가지의 이름을 모조리 받게 되었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걸까…….’

얘는 그냥 내가 소장하고 천오에게는 다른 걸 찾아 주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꼭 지금 받고 싶었던 이유가 있는데…….

마땅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채 파도 소리만 가까워졌다. 저 멀리, 사람 없는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초윤은 한숨을 삼키고 모래밭에 발을 들였다. 밑창 아래로 햇볕을 받아 따듯하게 익은 모래가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얕은 파도에 발을 담근 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천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곧장 이쪽으로 오려 하는 천오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이곤 백사장을 가로질러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천오의 시선은 초윤을 벗어나지 않았다. 종종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천오에게 익숙해진 초윤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자신의 제자를 한눈에 담았다.

매일같이 보다 보면 달라진 점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지만, 가끔은 기억 속 아이의 모습과 눈에 보이는 천오의 모습이 달라 생소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엊그제만 해도 이만했는데.’라는 대사에 절실히 공감하게 되었다.

정말 아기였는데. 정수리가 허리춤에야 간신히 올까 말까 하던, 상처 입고 아파하던 죽은 눈의 어린아이였는데.

“스승님, 기다렸습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눈높이가 비슷해졌다고 생각한 지 몇 년이 지나, 천오는 육 척을 넘은 지 오래였다. 균형 잡힌 팔다리는 시원하게 길었고, 타고난 골격 위에 자리 잡은 탄탄한 근육은 옷 위로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넓게 벌어진 어깨에 비해 둔중해 보이지 않는 건 비교적 얇은 듯한 허리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맹수처럼 탄력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만.

그리고 무엇보다 뿌듯한 건 말할 필요도 없이 천오의 얼굴이었다. 젖살이 빠지고 아이 티를 벗게 된 천오는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대로 완벽하게 훤칠한 미인이었다. 맹세컨대 이는 초윤의 콩깍지 때문이 아니었다.

따로 손대지 않아도 잘 뻗은 눈썹과 그 아래 깊고 고요한 눈, 흠잡을 데 없는 코와 턱선, 공들여 빚은 듯한 입술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역시 가끔 삽화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독자들이 계속 100원을 결제하게 만들었던 신무협 소설의 매력적인 악역다웠다.

덕분에 초윤은 천오를 볼 때마다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웃고 있었다.

‘척과영거, 모사반안, 미여송옥, 간살위개가 따로 있냐. 내 새끼지.’

오랜만에 산을 내려올 때는 천오의 얼굴도 가려 줘야 하는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초윤의 무공을 물려받은 덕분에 주위와 능숙하게 동화할 수 있어 다행일 따름이었다.

초윤은 천오의 곁에 나란히 선 채 바다를 응시했다. 밀려온 바닷물이 발을 적시고, 옆얼굴에 꽂히는 제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바다는 처음 본다고 했지. 어떻더냐.”

“……물이 많고, 짠 것도 그렇지만…… 파도가 제일 신기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많은 물에 한꺼번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그걸 설명하려면 달과 중력과 행성과 위성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데 말이지……. 지구가 구체인 것과 중력 정도는 가르쳐 주었지만 나머지는 나도 자세히 알진 못하는데.

곧장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도 없는 환경에서 전문성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난처해졌다. 잠깐 고민하던 초윤은 제일 무난하고 정확한 대답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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