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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09)화 (109/257)

109화

“바람이다. 아무리 작은 바람이라도 같은 방향으로 꾸준히 불면 막대한 물결을 일으킬 수 있지.”

“……태풍도 그렇고, 산사태도 그렇고. 전부 조그만 것들이 모이고 모여 크게 닥쳐오는 듯합니다.”

“인간사 대부분의 일 또한 그러하다. 중대한 선택보단 사소한 결정이 쌓여 더 큰 결과로 돌아온다. 당시에는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으니 그저 후회 없이 사는 수밖에.”

말을 하는 도중에도 해안가를 때리는 파도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날개 끝이 까만 갈매기들이 떼 지어 우짖고, 물 냄새 가득한 바람은 매무새를 흐트러트렸다. 근 15년 만의 바다에 무심코 시선을 빼앗겨 넋을 놓고 있다가, 옆을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멍하니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는 천오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잘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손을 뻗었다.

“불편하면 조금 자르는 것은 어떻더냐.”

“불편하지 않습니다만, 보기에 거슬리십니까?”

“그런 것은 아니다.”

잘 묶어 줘도 바람이 불면 엉켜서 그렇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삭발이라도 할 것 같은 결연한 대답이 돌아와 허겁지겁 부정했다. 초윤의 한 마디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면모는 여전히 바뀌지 않아서 그런가, 이제 귀밑머리를 넘겨 주려면 손을 뻗다 못해 올려야 할 정도로 자라 버렸지만 다 컸다는 느낌은 영 들지 않았다.

사람 성격은 스무 살이 넘어야 완전히 정착한다니까 지금부터라도 슬슬 나아졌으면 하는데 말이지. 내심 한숨을 폭 쉰 초윤은 주제도 바꿀 겸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과연 이걸 건네줘도 되나 고민이 되었지만 역시 당사자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소서(小暑)를 나흘 지나 태어났다고 했지. 마침 오늘로 네가 태어난 지 딱 19년이 되는 날이다. 알고 있었느냐.”

“……아, 아니요. 몰랐습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네 생세일에 그토록 무심해선 안 된다. 해마다 해 먹인 떡이며 탕국을 다 부질없는 짓으로 만들 셈이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매번 날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라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렇지만, 뭐, 모를 법도 한가. 지금은 핸드폰만 켜면 간단히 날짜를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해마다 황실에서 발표하는 달력을 보고 어렴풋이 짐작하거나 알아서 별과 날씨를 보고 가늠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날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베낀 달력이라도 사서 집에 둘 테지만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관심을 갖지 않던 ‘초윤’의 무심서에 그런 게 있을 리도 없었다.

그나마 몸에 남아 있는 지식으로 밤하늘을 보고 대충 24절기를 짚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초윤은 아이들의 생일을 챙겨 주기 위해 나름 노력해 왔다.

사영이와 사현이에게도 매년 조그맣게 축하를 해 주었다. 이곳의 풍습에 맞춘다면 장수하라는 의미로 국수를 먹여야 했지만, 약선의 제자인 이상 오래 살지 못할 리가 없으니 익숙한 대로 떡을 만들곤 했다. 미역국도 먹이고 싶었지만 내륙에 위치한 진령 산맥에서 건미역을 구하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다른 탕국으로 대신했으며 유학을 보낸 뒤로는 소소한 기물과 약도 꼬박꼬박 보냈다.

그리고 오늘은 네가 성인이 된 기념으로 멋들어진 검을 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초윤은 황추에게서 받아 온 이 마검인지 뭔지 모를 검을 풀어 천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솔직히 변명했다.

“지금 세기에 최고로 꼽히는 대장장이가 네 몸에 맞추어 만든 검이다. 이대로 쓰라고 말하고 싶다만…… 얽힌 사연을 직접 보고 나니 솔직히 조금 탐탁지 않구나. 그러니 네 판단에 맡기겠다. 가질지 말지 들어 보고 결정하거라.”

“……제게 진검을 하사하시기 위해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그럼 강호 초출에 목검을 들 것이냐.”

눈치가 빠른 애라서 대장장이를 찾아온 것만 보고도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생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천오의 눈이 약간 커졌다. 검집째로 내민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천오는 곧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초윤은 그 위에 백홍관일……을 올려 주며 제풀에 찔려 주절주절 설명을 읊었다.

“오래전 감숙성에 떨어진 운철(隕鐵)을 갖고 있던 모양이다. 수십 년 동안 어떻게 재단할지 궁리만 하다 최근 골격을 잡았는데, 계기가 된 일이 워낙 참혹한 탓인지 신철(神鐵)로 만든 검치고는 흉흉한 기운이 묻었더구나. 그러니 네가 직접 정하거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조금 늦는다 하여도 새로운 검을 구해 주겠다.”

“……뽑아 보아도 됩니까?”

“마음껏 살펴라.”

허락을 받은 천오가 몸을 조금 옆으로 돌린 채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가죽으로 감싼 검 자루는 한눈에 보아도 천오의 손아귀에 착 달라붙는 것 같았고, 검신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흘린 스르렁 소리가 예리하게 고막을 긁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백홍관일……이 바닷가에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태양을 꿰뚫는다는 이름에 걸맞게 검의 끄트머리에서 둥그스름한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새하얀 검의 몸통과는 다르게 물결무늬를 띤 양쪽 날은 영 시커멓게 보였다. 머리카락 한 올을 떨어트리면 두 동강이 날 정도로 잘 갈렸다는 건 알겠는데, 칼날을 따라 쨍한 반사광이 내달리자 저절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이게 신성한 철로 만든 검인지, 아니면 대장장이의 원한을 가득 담아 만든 검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둘 다 맞기도 했다.

대장간에서 한번 꺼내서 확인하긴 했지만…… 바깥에서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역시 이건 무르고 새것을 찾아다 주는 게 좋으려나.

초윤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천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곧장 난관에 부딪쳤다.

천오의 눈동자는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트리 아래 선물 상자를 뜯어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맞다! 얘 아직 열아홉 살 애지! 그것도 자기 거라고 명시한 진검은 처음 받아 보는 거지! 그럼 원한이 담겼다는 설정을 오히려 더 좋아하면 모를까 싫어할 리는 없잖아!’

초윤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혈기도 넘치고 감수성도 풍부할 나이에 진검이라니, 그것도 이토록 질 좋고 사연도 있는 검이라니 애초부터 거부할 가능성이 없었다. 어떻게든 천오가 객관적인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더듬더듬 설득해 보려고 했는데, 허공에 대고 미약한 움직임으로 검을 몇 번 흔들어 본 천오가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검은 이름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뭘 말하든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초윤이 말한다면 천오는 무조건 따르겠지만 저렇게 기분 좋아하는 제자에게 검을 줬다 뺏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초윤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푹 쉬고 찜찜한 기분을 애써 접었다. 완전한 마검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천오가 지금처럼만 자라 준다면 별문제는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거 이름이…….

“백홍……이다.”

천지를 뒤집어엎고도 남을 재앙의 전조를 두 개나 갖다 붙인 이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까. 다행스럽게도 천오는 초윤의 손에서 자란 덕분에 무지개가 흉조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2할 5푼에 불과한 검명을 들은 천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스승님, 저 이 검이 마음에 듭니다.”

“……처음 드는 진검치고는 예사로운 놈이 아닌데도?”

“저는 복수를 위해 검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의 원한을 가진 편이 동료로 삼기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나기 뒤에는 늘 무지개가 따르니 말입니다.”

파도 소리가 사그라질 일 없는 해변인데도 천오의 목소리만큼은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변성기가 끝난 뒤 듣는 이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무게가 된 저음. 여기서 냉랭한 무관심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오로지 초윤뿐일 터였다.

그나저나 정말 어쩔 수 없게 됐다. 이 정도로 들뜬 천오를 보는 것 자체가 오랜만인데 원한이 대수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선물 상자에 넣어 리본 포장도 근사하게 해서 건네줬을 텐데.

아무렴, 그치. 우리 애는 신무협 소설에서 마검에게 몸을 빼앗겨 이성을 잃고 학살을 자행하다 주인공에게 퇴장당하는 그저 그런 애가 아니었다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시원하게 털어 낸 초윤은 이만 몸을 돌렸다.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은 천오가 두말 않고 뒤를 따랐다.

“이대로 해안선을 따라 광동성까지 내려갈 예정이다. 복건성에는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요리와 약재용 버섯이 많다고 하니 일정이 길어지더라도 찬찬히 둘러보고 가 보자꾸나.”

“예, 스승님.”

광동성에 있을 사영이와 하북에 있을 사현이에겐 이미 몇 달 전에 서신을 보내 두었다. 사현이도 광동성으로 내려온다고 했으니 장장 8년 만에 모두가 재회하는 셈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서두를 법도 했지만, 초윤이 구태여 느긋한 장기 여행을 자처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초윤은 이제 천오를 독립시킬 생각이었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기도 하고, 이 이상 붙잡고 있다 보면 영영 때를 놓칠 것 같단 예감도 들었다.

천오가 산을 내려가서 기반을 잡는 동안 아이들을 위한 안배를 마무리하고 나면 초윤에게 남는 할 일은 하나뿐.

이건 초윤과 천오가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일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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