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동안 위화감이 느껴진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맨 처음부터 이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다. 수십, 수만 번을 반복해 온 동작을 몸이 기억하는 건 그다지 미심쩍은 일이 아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초윤이 이 몸에 제대로 정착한 거라면 원주인인 ‘초윤’이 쓰던 말투에 얽매여 있었을까?
노력 하나 없이 얻은 힘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것도, 사기적으로 건강한 무림인의 육체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이 몸에 들어온 덕분이었다. 그러나 뇌를 거쳐 입으로 나오는 언어만큼은 한 사람의 인격을 고스란히 담을 수밖에 없었다. 남을 완전히 흉내 낼 수도 없고, 자신을 완전히 숨길 수도 없는 게 바로 자기표현이었다.
이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계기는 8년 전 사천에서 느꼈던 괴리감이었다. 분명 대답하려고 한 말이 있었는데 입이 멋대로 전혀 다른 요구를 해 버린 일은 아직까지도 초윤에게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겁이 많고 신중한 정하윤은 그 뒤로 오랜 시간에 걸쳐 궁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초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게 확실했다.
그러나 명확한 결론을 내린 후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초윤’이 남아 있다면 왜 빙의 이후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개입도 없는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 정말 중요한 건 무엇 하나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는, 정하윤이 엄연히 임자 있는 몸을 차지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사실 이제 와선 그렇게 기를 쓰고 원래 세계에 돌아갈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애착을 가진 사람이야 있었어도 그 사람에게 반드시 정하윤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돌봐야 하는 반려동물도 없었고, 천오처럼 복수심을 불태울 상대도 없었다.
이곳에 온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땐 무협 세계가 무서워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10년이 훌쩍 지나니 완전히 적응해 버렸다. 무엇보다 불귀 산맥에 독을 풀어 두었던 마교의 무리 때문에 제자들의 안전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아이 셋 다 제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초윤은 현경의 경지에 이른 몸이 아닌가. 여차할 때 애들을 대신해 칼을 받을 몸이라면 이만큼 적합한 게 없었다.
원래 세계를 향한 열망이 희석되는 와중에도 남은 미련이라면 온갖 개고생을 하며 따낸 초등 교사 자격증뿐인데…… 이마저도 애 셋을 하드코어 하게 키우다 보니 어느 정도 충족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 이 몸이 온전히 정하윤의 것이었다면, 이대로 이곳에서 살아가도 좋다고 생각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정하윤은 스스로에게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본 주인이 멀쩡히 남아 있는 몸을 훔쳐 쓰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마주하려 들지 않는 삶이 마냥 즐거울 리도 없었다.
그런고로 정하윤은 최소한 ‘초윤’의 행방과 자신이 이 몸에 빙의하게 된 연유를 알아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해 보아야 했다. 지금까지는 미성년자를 보호하느라 바쁘단 핑계라도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제자 천오를 독립시키는 순간부턴 어떠한 변명도 내세울 수 없었다. 곧 붕 떠 버릴 시간을 모조리 진상 규명에 쏟아부어야 했다.
젖은 신발은 한 톨의 내력으로 금세 바싹 말랐다. 달라붙었던 모래가 우수수 떨어지며 백사장에 섞여 들었다. 잘 닦인 길로 올라선 초윤은 천오를 돌아보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익숙하게 마주쳐 오는 시선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건 어째서인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이 맹목적이고 의존적인 아이에게 앞으로의 모든 계획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다, 천오야.
자신과 바다 너머의 나라까지 오래도록 함께 다니고 싶다 말하던 어린 얼굴을 어렴풋이 기억하기에, 그에 대책 없이 맺은 약속을 술주정 탓으로 돌렸으면서도 희미하게 간직해 왔기에 아직까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산을 내려와 중원을 횡단하면서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말해야지, 기필코 말해야지 연거푸 다짐하면서도 여태 질질 끌고 있었다. 이건 절대 도망칠 수 없는 우리 집 아이 일이란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어째 입이 열리질 않았다.
정말 큰일 났다. 첩첩산중이 이런 거구나.
한숨을 폭 내쉰 초윤은 짐을 둔 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생일 선물은 좋아해 줘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느라 뒷덜미에 꽂히는 새까만 시선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
백협맹주 남궁영(南宮營)의 직계 자손 중 촉망 받던 두 명의 아들, 남궁호관과 남궁옥리가 어느 날 갑자기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젊은 무인이 폐관수련으로 보내는 시간은 기껏해야 석 달 남짓. 길어 봤자 일 년에 불과할 것이라 여겼던 수련이 삼 년을 지나도 끝나지 않자 수많은 의혹이 생겨났다. 그들이 죽었다든가, 미쳤다든가, 혹은 정말 인생의 대부분을 걸고 이겨야만 하는 상대가 생겼다든가. 지저분한 연못가의 개구리밥처럼 매일같이 새로운 소문이 태어나고 사라졌다.
혈기를 누리다 못해 잔인하게 즐겼던 형제는 그렇게 오랫동안 질긴 안줏거리가 되었다. 열 손가락을 넘는 이들이 현장을 들켜 보복을 당했어도 뒷말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 가장 민감해야 마땅한 남궁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남궁영은 수년의 세월을 얼굴조차 보지 못한 아들 둘을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그들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하다못해 그들의 폐관수련이 끝난 뒤를 기대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렇다 보니 점차 호관과 옥리 형제의 이야기는 차츰차츰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긴, 남궁영은 그 둘 말고도 자식이 많았지. 손주는 또 어떤데. 아들 둘이 사라진 것쯤이야 아무런 타격도 아니었을 거야.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이들은 찜찜한 납득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남궁영은 그렇게 남궁호관과 남궁옥리를 잊은 듯했다.
하지만 이십 년이 지나 형제가 정말 죽은 사람 취급을 받게 된 지금, 남궁영은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두 아들을 양옆에 대동한 채 주렴 너머에 자리한 누군가에게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삐쩍 마른 병자의 안색을 한 호관과 옥리 역시 아버지를 따라 쥐며느리처럼 부복했다. 성성한 백발을 단정히 빗어 넘긴 남궁영이 곧 바닥에 이마를 쿵 짓이기며 또렷하게 말했다.
“암중비광(暗中飛光), 명명휘강(冥冥輝强). 혼세(混世)에 다시 한번 현현하심을 감축드리옵니다. 하신(下臣)은 존제께서 침면하실 적 새로이 광명에 눈을 뜨게 된 남궁 아무개라고 하옵니다. 하신이 바친 그릇을 운용해 주신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온데, 혼미하고 우둔하기 그지없는 하신의 혈속까지 보살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부디 이 한평생을 바쳐 모실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명실상부 정파의 일인자. 무림에서도 옳음을 추구하는 이들을 한데 모아 이끈다는 백협맹주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호관과 옥리마저도 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세를 낮추고 있어 존제(尊帝)라는 이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둘 중 영리한 축에 속하는 옥리는 그나마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좀 더 납작하게 엎드렸다. 차가운 냉기가 약해진 뼈에 사무치든, 고운 비단옷이 엉망으로 구겨지든 상관없었다. 그 아버지가 이런 태도를 취하다니, 저 너머에 있는 이는 최소한 황제에 버금가는 위치일 게 분명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단단히 주의를 들은 탓에 윤곽도 보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백협맹주 남궁영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만들까.
하지만 옥리의 예상은 곧 들려온 목소리에 산산조각이 났다.
“피차 불편하게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맹주 어르신. 애초에 누가 되살려 달라고 했던가요? 정말이지 집요하다니까…….”
남궁영의 비장하고 절요한 인사에 돌아온 건 기껏해야 열댓 살 남짓한 꼬맹이가 빈정거리는 대답이었다. 어린 음성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지만 그 나이의 아이들은 원래 어설프게 어른의 말을 흉내 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상대는 내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 정말 생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애새끼라는 뜻이었다.
어째서 이런 보잘것없는 애송이한테 이렇게까지? 옥리가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궁영은 몸을 낮춘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존제의 본체(本體)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할 그릇을 드려 송구스러울 따름이옵니다. 파편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어린아이를 쓸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하루빨리 본체를 되찾으실 수 있도록…….”
“아, 그러니까 그거 정말 낯간지럽다니까요.”
차르락, 작은 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옥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주렴을 걷어 낸 작은 손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틈새로 빠끔히 고개를 내민 앳된 얼굴이었고, 눈가와 뺨을 덮은 새하얀 머리카락이었다. 나이를 먹어 새어 버렸다고 하기엔 눈부시게 빛나는 결이 정말이지 선인과 같아서…….
“남궁옥리!!”
순간 벼락처럼 떨어진 불호령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남궁옥리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다급히 박은 이마가 멍이 들 것처럼 욱신거렸다. 남궁영은 옥리를 꾸짖은 것에 그치지 않고 결사의 각오라도 다진 것처럼 어절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옥리는 그제야 바닥을 짚은 남궁영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