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어리석은 혈속이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사옵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관용을 베풀어…….”
“아, 괜찮아요, 괜찮아. 내 것도 아닌 얼굴 좀 보이게 되었다고 화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툭하면 살해당할 것처럼 구는 게 더 불쾌해요. 어울리지도 않는 신하 놀이는 이쯤 하고 고개 좀 들어 주십시오, 어르신. 대화는 정수리가 아니라 눈을 보며 하고 싶습니다.”
“…….”
남궁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세우긴 했지만 바닥에 꿇어앉은 자세는 그대로였다. 옥리는 아버지의 반대편에 부복하고 있는 자신의 형, 호관을 힐긋 바라보았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호관은 옥리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통해 온갖 의혹을 토해 냈다. 하지만 옥리 역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 위로 아버지와 존제라는 이의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궁금한 건 단 두 가지뿐입니다. 일단 거기 둘.”
하얀 머리를 한 소년이 검지 끝으로 옥리와 호관을 번갈아 가리켰다.
“내 난생 저런 식으로 기승을 부리는 독이라곤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진즉 장기를 망가뜨렸거나 몸을 부식시켰을 게 당연한데, 장장 이십 년 동안 산목숨이 아니도록 사람을 괴롭혀 놓고서 낫고 보니 못 쓰게 된 내장은 없다? 솔직히 저 둘도 편법으로 일으켜 세웠을 뿐 어떻게 만든 독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독이라니 참 신기하지요?”
“…….”
“이에 대해 아는 것은?”
옥리는 막 눈을 떴을 때 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녹슨 몸에 경악했다. 기억으로부터 이십 년에 달하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상황 설명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억센 손으로 이끌려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여기서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남궁 형제였다. 아는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나저나 저 하얀 머리 타래를 보니 무언가가 생각이 날락 말락 했다. 분명 마지막으로 본 게 있는 것 같은데……. 분명히 무언가를…….
옥리가 흐리멍덩한 머릿속을 열심히 되짚을 때, 남궁영은 착실히 존제의 물음에 답했다.
“이십 년 전, 하신은 중원의 여러 곳으로 혈속을 파견해 존제께서 사용하실 그릇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이 둘도 명을 받아 광동성으로 갔다가 객잔에서 정체 모를 흉수에게 암습을 당했습니다. 함께 있던 무사들은 전부 죽었으나 그나마 재주가 있던 제 혈속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뒤 광명교의 은혜로 온갖 약재를 받아 목숨을 부지해 왔습니다.”
“으음…… 좀 많이 부족한데.”
골똘히 고민하던 존제가 주렴 밖으로 완전히 몸을 드러냈다. 하얀 비단 내의 한 겹만을 걸친 존제의 맨발이 낮은 시야 끝에 들어왔다.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눈이고 뇌고 전부 팽팽히 굴리고 있던 남궁옥리에게 대뜸 질문이 떨어졌다.
“저기, 아드님. 아드님 중에서도 왼쪽에 계시는 분 말입니다. 지금 열심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계신 분이요. 예, 당신. 고개 들어도 되고 대답하셔도 좋습니다. 뭔가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예? 아…… 그, 그게.”
얼떨결에 몸을 일으킨 옥리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잠시 옥리와 눈을 마주친 남궁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옥리는 한 손으로 자신의 까칠한 얼굴을 쓸며 더듬더듬 답했다.
“객잔을 잡고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는데…… 웬 꼬맹…… 아니, 비루한 어린애 하나가 도둑질을 하기 위해 방에 잠입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적당히 교육시켜 주고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누나로 보이는 아이가 호관 형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딱 봐도 둘이 남궁…… 어른을 우습게 여기며 농락하려는 것처럼 보여 훈계를 해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콧속이 뻑뻑해지고 목구멍이 타오르며 숨이 막혀 왔습니다. 육혈(衄血)이 심하게 흐르던 것까지는 기억합니다.”
물론 남궁옥리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지만, 이 존제라는 사람의 가치관이 어떨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폭력을 입에 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에 적당히 포장을 더해 상황을 설명하자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자신과 형님을 공격했는가? 비열한 암습으로 이 몸과 무사들을 단번에 무력화시키고, 그 뒤로 이십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감히 남궁세가의 추적을 피해 왔다니 전승 속의 은영암제(隱影暗帝)라도 살아 돌아온 건가?
존제의 심각한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남궁영은 옥리의 사정 뒤에 부연 설명을 더했다.
“하신 역시 암암리에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흉수의 꼬투리 하나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멀쩡한 아들 둘을 비명에 보내기 직전의 나날만 이십 년을 버텨 왔는데, 존제께서 친히 이를 구해 주시니 정말 감읍할 뿐입니다. 하물며…….”
“광동성…… 광동성이라. 거기에 뭐가 있더라?”
존제가 혼잣말을 하자 남궁영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벌써 몇 번이고 노골적인 무시를 당했지만 그의 얼굴에선 한 점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울컥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몸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호관뿐이었다.
한동안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존제는 곧 한숨을 폭 내쉬고 상념을 털어 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제껏 예의상의 미소만 짓고 있던 얼굴에 환한 기대의 빛을 띄웠다.
존제의 목소리가 흥분과 바람을 고스란히 담고 밝아졌다.
“그럼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내 아우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십니까?”
“……감히 되묻겠습니다. 존제께 아우분이 계셨다는 사실은 오늘로 처음 듣습니다. 성함이라도 일러 주신다면 어떻게든 찾아…….”
“……광명교의 인간이 아우를 모를 리가 없는데? 내 사제 아윤(兒昀) 말입니다. 내 성도 주었으니 초씨를 댔을 테고, 백오십 년의 기록을 모조리 살피면 뭐라도 나올 겁니다.”
존제가 남궁영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담한 발치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사기(死氣)를 감지한 남궁영이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꾹 주먹 쥐었다. 시체에서 짜낸 기름을 전신에 문질러 바르는 것처럼 불쾌한 감각, 비강의 점막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이 냄새가 과연 현실일까. 아니면 오래된 죽음을 앞에 둔 뇌가 제멋대로 만들어 낸 환각일까.
남궁영이 긴장을 하거나 말거나, 기골이 장대한 노인과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친 존제는 한없이 맑고 티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다시금 살아난 이유를 찾았다는 듯 이전의 따분한 기색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아이가 감히 나를 배반하고 죽였거든. 그러니 이렇게 된 김에 못난 아우의 뼛조각을 넣은 곁베개나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안고 자면 잠이 참 잘 올 것 같지 않습니까?”
◇
단언컨대, 초윤은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은 예상은커녕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짐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섬서성에서 절강성까지는 어림잡아 삼천 리가 넘고, 사이에 자리 잡은 산이며 강이 얼마나 많은데 집구석 붙박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으리라 가정할 수 있겠는가.
“약…… 으, 은인이 맞으시지요?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사옵니다. 목적지를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길을 서두르고 계시다면 마차를 내어 드리겠사옵니다. 타시어요, 은인. 뒤에 계신 소협도 사양하지 마시고.”
뒤에 있는 천오야, 나를 그렇게 보아도 마땅한 설명을 해 줄 순 없단다. 선생님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지나가다 말고 마차에서 내려 허겁지겁 다가와선 대로 한복판에 선 채 조잘조잘 얘기하던 제갈설린이 무언가 깨달은 듯 헉, 하고 숨을 삼켰다.
“호, 혹시…… 소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다시 뵙게 되어 기쁜 마음에 미처 생각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왔사옵니다. 다망하신 도중에 폐를 끼쳐드렸다면 정말 송구합니다, 은인…….”
면사를 쓴 탓에 대답이고 반응이고 아무것도 없던 상대에게 즐겁게 말을 걸 순 있지만, 그 상대에게 폐가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의기소침해지는 거니. 도대체 뭔 애가 이렇게 대책 없이 착하냐.
눈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애를 두고 냉랭하게 굴 순 없었다. 초윤은 얌전한 천오를 힐긋 본 뒤 차분히 대답했다.
“못 본 사이에 훌쩍 컸구나. 집 안에만 있어도 헐떡거릴 아이가 이 먼 곳까지는 무슨 일이더냐.”
“은인!”
초윤이 자신을 기억해 주었다는 사실이 기쁜지 설린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4년 전보단 얼굴부터 확연히 자란 티가 났지만 감정과 생각이 고스란히 바깥으로 비쳐 보이는 면모는 그대로인 듯했다.
“안휘성 북쪽 박주시에 있는 약재 시장에 절맥증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다고 들어 찾아왔사옵니다. 결국 찾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나온 김에 절경이라는 절강성의 바닷가까지 둘러보고 싶어 억지를 부렸사옵니다. 분명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 나오는 건 어려울 테니까요.”
아, 그런가. 확실히 제갈설린의 절맥증은 한눈에 보아도 4년 전보다 악화되어 있었다. 지금에야 기쁜 마음에 혈색이 돌고 있었지만 슬쩍 드러난 손등은 파리하기 그지없었고, 한눈에 보아도 몸을 채운 생명력이 미약했다. 꽉 막혀 쓰이지 못한 기맥이 점차 쇠퇴하면서 목숨을 유지하는 선천지기의 흐름마저 약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이걸 어떻게든 고쳐 줬던 것 같은데…… 언제 어떻게 했더라? 면사 안에서 초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