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12)화 (112/257)

112화

‘모용서는 회귀를 통해 원래의 시간선에선 죽거나 묻혀 버린 인재들을 살리고 키웠어. 자기 형인 칠성검 모용단, 화산의 배화구검 구양선에 이어서 제갈설린도 마찬가지였는데……. 어? 원래 짐조 테러 미수 사건 뒤에 섬서성에 좀 더 머물면서 제갈설린의 절맥증을 고쳐 주지 않았나? 그래서 내가 굳이 손대지 않은 건데?’

방금 설린이 말해 준 덕분에 간신히 생각난 게 있었다. 십 년 전에 읽은 웹 소설의 세세한 부분을 떠올리려니 조금 죽을 맛이었지만 ‘초윤’의 지식과 함께 대충 끼워 맞출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갈설린이 다녀왔다는 안휘성 박주시는 이전부터 의학의 도시로 유명했다. 규모가 큰 약재상들이 모여 거대한 시장을 구성했고, 실력 있는 의원들은 그곳에 모여드는 환자들로 연구를 거듭해 눈부신 의학적 성취를 이뤘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세력권에 위치해 있는 탓에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의학 기술을 독점하기도 했다.

그래서 모용서는 과거 회귀자의 특권인 ‘미래 지식’을 이용해 제갈설린의 병을 치료했다. 어떤 불치병이든 주인공이 있던 미래에는 치료법이 발견되었다는 핑계로 단번에 고쳐 버리는 먼치킨물의 클리셰 중 하나였다.

문제는 초윤의 기억이었다. 모용서가 제갈설린의 절맥증을 낫게 해 주었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읽은 지 오래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장면이 환자 치료보다는 주인공의 엄청난 면모와 러브라인 어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았던가? 아님 입을 맞췄었나? 제갈설린은 운기요상도 배우지 못해서 내공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으니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구구절절 변명하면서 뭔가 스킨십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뒤에 제갈설린은 얼굴을 붉히면서 파렴치한이라고 성을 냈고 주인공은 치료라고 빡빡 우겼었지……. 주인공은 별다른 사심이 없다는 듯이 묘사됐으니까…….

아무튼 본래의 스토리 라인이라면 지금쯤 제갈설린은 모용서의 도움을 받아 절맥증을 치료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도 못 넘긴 아이가 벌써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고 싶었다는 둥 안쓰러운 말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낫기는커녕 고생만 심하게 한 듯했다. 초윤이 해명을 했지만 역시 모용서를 믿기엔 부족했거나, 혹은 초윤이 동관을 떠나기 전 모용서를 혼절 상태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즉 어느 쪽이든 초윤이 원작을 무너트린 게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를 깨닫자마자 초윤의 등줄기에 내적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모용서 걔는 중간에 다른 일이 터졌어도 꿋꿋하게 본래 목적은 완수했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내가 중간에 분탕질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뒤에 한 번쯤은 약왕산으로 가서 설린이를 고쳐 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내가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도망부터 가긴 했지만!’

주인공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할수록 구차했다. 게다가 모용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최종 보스인 주천오가 벌건 대낮에 객잔에서 밥을 먹고 있고, 이를 추궁하니 갑자기 정체도 모를 사람이 떡하니 나타나 자신을 제압했다.

속절없이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모용서가 가장 먼저 전제로 깔아 둘 명제가 무엇이겠는가. ‘회귀자로서 동원한 온갖 치트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세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에 스며들어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아닌가!

그러니 바깥으로 노출될 일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물밑으로 찾아다닐 게 당연했다. 초윤이 회귀자의 입장이었어도 본거지에서 절대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더군다나 절맥증은 당장 죽는 게 아니라 스무 살까지는 근근이 버틸 수 있는 병이었으니 몇 년의 여유 시간은 있으리라 판단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합리적인 건 둘째 치고…… 그 결과로 애먼 애만 고생을 해 버렸다. 어린 나이에 점차 말라 죽어 가는 몸을 느끼는 기분이 오죽할까. 일찍이 구해 줄 수 있었는데도 다른 사람이 어련히 하리라 여겨 신경을 쓰지 않은 초윤의 탓이고, 순간적으로 책임감 없는 결정을 내려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 초윤의 탓이었다.

입맛이 썼다. 뒤늦은 후회가 치밀었지만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또 똑같은 선택을 할 자신을 알아서 더욱 착잡했다. 당시 제갈세가에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면 천오에게 더욱 큰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했고, 모용서에겐 아직까지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저…… 은인, 햇빛이 따가우니 괜찮으시다면 마차에 동승하지 않으시겠사옵니까? 아, 아니면 마차를 내어 드릴 테니 목적하시는 곳까지 편히 가시어요. 저는 얼마든지 다른 수단을 이용할 수 있사오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제갈설린은 자신을 더욱 힘들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솔직한 호의를 내보였다. 이전에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참 순진하고 솔직하게 신뢰를 주는 아이 같았다. 이런 착한 애를 자신의 무책임한 선택에 휩쓸리게 만들어 버렸다니.

죄책감에 짓눌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문득 뒷짐 진 손을 가볍게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천오가 아무런 내색 없이 위로를 건넸다. 사실 의미는 잘 알 수 없었다. 천오를 등지고 돌아선 채 면사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니 제 가라앉는 기분을 모를 게 당연했고, 뜻이 어떻든 그저 우연일 가능성이 훨씬 컸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손길 한 번에 숨통이 트였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속이 시원했다. 초윤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천오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이제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었다.

“몸도 성치 않은 아이의 탈것을 빼앗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너도 이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은 것 같구나.”

“……부끄럽지만 그렇사옵니다. 이전에 그리 떠나신 뒤로 다시 만나 뵙기만을 고대한 터라…… 하지만 정말로 폐를 끼치고 싶진 않사오니 모쪼록 편한 결정을 내려 주셨으면 하옵니다. 저는 이렇게 은인을 뵌 것만으로도 기쁘고, 앞으로도 담벼락 바깥 중원 땅의 어딘가를 은인께서 거닐고 계시리라 생각하면…….”

으리으리한 마차에서 허겁지겁 내린 귀티 나는 아가씨가 얼굴을 붉힌 채 양손을 모아 잡고 꼬물거리자 이쪽으로 꽂히는 행인들의 시선이 장난 아니게 따가웠다. 백주 대낮의 절강성 저잣거리에서 등장인물을 만나다니,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맞닥뜨렸던 모든 우연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느닷없는 타이밍이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자신의 하산(下山)은 늘 사건 사고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소식이 들려와도 지난 몇 년간 다시 산에 박혀 있었던 건데…… 절강성까지 오는 길이 유난히 평탄하다 싶었지. 잠깐의 평화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이렇게 만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초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조마조마한 기색이 역력하던 제갈설린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설린을 따라 몸을 돌리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초윤이 일방적으로 어그러트린 일정에 어떠한 불만도 품지 않고, 초면의 상대에게 아무런 호기심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무언가 단단히 꼬여 가고 있다는 예감을 애써 무시한 초윤은 마차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걸음이었다.

제갈세가의 병약한 금지옥엽이 타고 다니는 마차는 당연하게도 굉장히 질이 좋았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사방에 세운 벽이나 발을 내린 창문 등 골조부터가 이 시기의 일반 마차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제갈세가에서 직접 치밀하게 설계를 한 듯했다.

제갈설린의 맞은편, 푹신한 모피가 깔린 좌석에 앉은 초윤이 상황도 제쳐 두고 잠시 감탄을 하고 있자 곧이어 들어온 천오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약함을 내려놓고 초윤의 곁에 자리 잡았다. 자신을 깍듯이 대하는 천오에게 익숙해지긴 했어도 위계나 권위 같은 건 그다지 따지지 않는 초윤 역시 대수롭지 않게 죽립을 벗었다.

어느새 교묘한 차음막이 사위를 두르고, 마차는 가던 방향 그대로 대로변을 서행하기 시작했다. 초윤은 자신의 민낯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설린에게 대뜸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소개가 늦었구나. 이쪽은 내 제자다.”

“……천오입니다. 성은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지난번 약왕산에서 만난 진법가다.”

“제, 제자요? 제자를 두셨던 것이옵니까? 그런 건 한 번도 듣지 못하였는데…… 헉! 송구하옵니다, 약선 대협! 그 이후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멋대로 대협의 행적을 찾아 다녔사옵니다.”

“괘념치 않는다.”

기습적인 중개에도 당황하지 않고 일단 포권을 취하는 천오와 다르게 설린은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뒷조사를 했다는 말을 무심코 흘리고선 새파랗게 질리는 안색을 보니 기분이 상한다기보단 오히려 설린이 걱정스러웠다.

어차피 무림의 아이돌 정파 고수의 사생활이야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행적을 찾았다고 해 봤자 물어볼 곳은 개방이나 하오문밖에 없었을 텐데 천오의 존재를 몰랐던 걸 봐선 이미 다 퍼져 있는 얘기만 입수한 듯했다. 거기다 자기 것도 아닌 몸의 과거사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청소년의 안정이 중요했다.

몇 번 더 용서를 구한 제갈설린은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오에게 단정히 묵례를 했다. 무공을 가르쳐 준 스승이 없어 포권을 취하진 않는 것 같았다.

“약선 대협께 많은 도움을 받은 제갈설린이라 하옵니다. 이전에 대협과 오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사오나, ‘제자를 두셨다는 말씀은 미처 듣지 못해’ 대경한 모습을 보여 드리게 되었사옵니다. 그에 인사가 늦어 송구하옵니다, 소협.”

“……스승님께서 저를 거두어 주신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미력한 탓입니다. 그동안 ‘스승님과 단둘이서만 지낸 터라’ 소저를 대하는 데에 서툴 수 있으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휴, 똘똘하게 얘기하는 거 보니까 내가 다 흐뭇하네. 초윤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힐긋 보는 천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천오의 말마따나 천오는 사형제를 제외한 또래 아이들과 동석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탓에 조금 긴장했었는데, 약간 느리긴 해도 또박또박 예의 바르게 잘 말하는 걸 보니 초윤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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