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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14)화 (114/257)

114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일정을 지체해 미안하다.]

[제게 양해를 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스승님. 저는 스승님의 결정을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둘이 같이 여행하는 건데 멋대로 일을 벌인 거고…… 바로 옆에 있는데 상의도 안 했고……. 마음 같아선 구구절절 사과하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다년간의 경험상 천오는 이런 일에 관해선 아무리 얘기해 봤자 ‘스승님은 다르다’ 한 마디로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다른 사람한테는 초윤이 가르친 상식선에서 행동하는 것 같았으니 망정이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천오는 정도가 심했다. 자신의 실수는 죽을 듯이 후회하면서 초윤의 잘못은 절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천오의 동경을 부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이 맹목을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초윤은 그저 본인이 처신을 좀 더 잘하자고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보니 면사 사이로 남보라색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달무리 낀 보름달에 뒤지지 않는 밝기로 빛나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박혀 있었다. 약속한 시간은 점차 가까워졌고, 주위의 기척은 대여섯을 제외하곤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달이 예쁘게 뜬 밤에 천오와 함께 왕진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땐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나서고 봤던 진찰이었고, 그 대가로 터무니없는 뒤통수를 맞아 진땀을 빼기도 했지만 어린 천오를 안아 들고 객잔으로 돌아오던 길은 각별했다. 한 팔에 안기던 조그만 몸과 영리한 말소리, 기특한 행동거지까지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기억이 다 그렇듯 떠올릴수록 정제되어 좋은 감정만 남았다 해도 흐뭇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작고 귀엽던 애가.’

초윤은 자신의 품을 한 번 내려다본 뒤 맞은편에 얌전히 서 있는 천오를 힐긋 보았다.

‘언제 저렇게 컸냐……. 여전히 귀엽긴 하다만.’

떠나보낼 때가 되어서 그런가. 초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천오의 성장에 새삼스레 놀라며 지나간 기억을 감상적으로 훑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먹여 키운 제자를 꼼꼼히 보는데, 느닷없이 조심스럽게 들려온 천오의 전음이 초윤의 주의를 화들짝 일깨웠다.

[그런데…… 스승님, 정녕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절맥증이라면 대책이 있다. 너는 행하기 어려운 치료법이지만 원리만이라도 네게 알려 줄 생각이니 괜찮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제가 스승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백협맹의 관계자에게 그리 쉽게 밝혀도 괜찮으신 겁니까?]

의외의 질문에 잠깐 벙해진 초윤은 잠시 굳은 채 눈만 깜빡였다. 따로 저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천오의 설명이 이어졌다.

[스승님께선 제 보복을 막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혈업(血業)이 어떻게 끝이 나든 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저를 적대시할 테고, 이는 또한 스승님의 허물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저나 사형처럼 숨기는 쪽이…….]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하지 말거라.]

초윤은 단칼에 천오의 말을 잘라 냈다.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걸 보아하니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 같았다. 초윤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천오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런 걱정을 할 법도 했다.

하지만 뒤늦게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초윤은 불편한 기색을 다 감추지 못하고 면사 안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곧 차분하게 가라앉힌 전음이 천오의 고막에 가닿았다.

[먼저 너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겠다. 너는 네 보복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느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비난받으리란 사실은 명약관화합니다.]

[나는 네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힐난할 생각도 없다.]

공손히 양손을 모아 잡은 천오가 시선을 떨어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하게 듣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울컥 치밀어 오르던 것도 허무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초윤은 탁한 한숨을 삼키고 손을 들어 시야를 가리던 면사를 걷었다. 슬그머니 마주쳐 오는 새까만 눈동자는 어둑한 밤 그늘에도 묻히지 않았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너로 인해 어떠한 원성이 쏟아진다 한들 내겐 일말의 타격조차 입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부끄러이 여길 일은 앞으로도 없다.]

[…….]

[사영과 사현이 사문을 숨기는 이유는 따로 있으니 가서 직접 묻거라.]

할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머뭇거리던 천오도 금방 뒤를 따랐다. 마음 같아선 제자의 생각이 전부 정리될 때까지 마주 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잡아 둔 약속이 있었다. 지금 끊어 두지 않는다면 분명 달이 질 때까지 골목의 붙박이가 될 게 뻔했다.

얼마 걷지 않아 8층 높이의 호화스러운 객잔이 보였다. 도로변에 있는 객잔이라서 그런지 담벼락은 없었고, 활짝 열린 중간층 창문 너머로 일렁이는 호롱불의 불빛이 보였다. 방 안에선 제갈설린의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일러둔 대로 잘 준비해 둔 것 같았다.

객잔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간 초윤은 잘 따라오라는 듯 천오를 한 번 돌아본 뒤 그대로 날아올랐다.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며 열린 창 앞의 처마에 단번에 내려앉았으니, 정확히는 높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발돋움도 없던 도약이나 긴 체공 시간, 무게 없이 가벼운 착지와 우아한 몸짓은 마치 홀로 현세의 법칙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허공에서 흐트러지는 스승의 옷자락과 면사를 멍하니 응시하던 천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초윤을 따라 날렵히 솟구쳤다. 자청해서 등에 진 약함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지만 처마를 딛는 발끝에선 어떠한 중량도 느껴지지 않았다. 익힌 무공의 특성상 평소에도 존재감이 희미한 둘을 감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윤은 제자가 올라오는 것까지 확인한 뒤 허리를 숙여 창틀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방 가운데에 서 있던 제갈설린이 초윤을 보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손을 휘저어 차음막을 친 초윤은 사뿐사뿐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 협소한 기맥을 억지로 비집어 열고 뚫어 길을 낼 것이다. 전신의 중요한 기맥이 전부 갈가리 찢어지는, 지독히 고통스러운 시술이다. 너는 네 스스로가 산 채로 뼈를 부수고 근육을 발라내도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기, 기맥이 찢어져도 살 수 있는 것이옵니까?”

“곧장 수복될 수 있는 약이 있다. 찢기고 아무는 과정을 통해 네 기맥은 점차 넓고 튼튼한 통로가 될 테니 잘 버틴다면 이후로 무공을 배울 수도 있겠지. 다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초윤과 마찬가지로 안에 들어온 천오가 창문을 걸어 잠갔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풍경(風磬)이 잠잠해지고 창백한 달빛이 창호지에 막혔다. 따듯한 호롱불이 밝힌 방 안에서, 설린은 초윤의 예상을 깨고 아무런 고민 없이 곧장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대협께서 다시 찾아오겠다 말씀하셨을 때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었사옵니다. 불민하게도 소녀는 그만한 통증을 겪은 적이 없어 견딜 수 있다 말씀드릴 수는 없사오나, 소녀를 가엾이 여겨 주신 대협의 후의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사옵니다.”

“그거면 됐다.”

명료한 답을 받자 제갈설린의 눈은 총기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조금 전까지 올려다보던 밤하늘과도 같았다. 그래, 초윤은 저 꿋꿋한 얼굴이 보고 싶었다. 얌전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호쾌한 방식으로 화를 내던 첫 만남을 기억했다. 그렇게 활발하고 똘똘하며 호기심 많은 아이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삶을 체념하다니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속으로 작게 웃은 초윤은 죽립을 벗으며 천오에게 전음을 날렸다. 약함을 바닥에 내려 둔 천오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성큼성큼 설린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설린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도 아랑곳 않고 어깨에 있는 거골혈과 견정혈을 꽉 눌렀다. 그리고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는 제갈설린을 받아 등허리에 있는 비수혈까지 꼼꼼히 짚었다.

기절한 설린을 대충 들어 침상까지 척척 옮긴 천오가 잘했냐는 듯 초윤을 돌아보았다. 수혈을 짚으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착실히 이행할 줄은 몰랐던 초윤은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라고 하면 진짜 먼저 죽이기부터 하고 보는 거 아냐?’

차마 그럴 애가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결국 역시 초윤이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짤막한 한숨을 내쉰 초윤이 침상으로 다가갔다. 재빠른 처치에 새근새근 잠든 설린이 보였다. 초윤은 거기에 더해 정강이의 족삼리와 손의 합곡혈, 발의 곤륜혈과 태충혈 등 마취에 효과가 있는 곳은 다 짚었다. 처음부터 제갈설린에게 그만한 고통을 안겨 줄 생각은 없었다. 시술이 끝난 뒤 두 달은 끙끙 앓을 테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초윤이 설린의 옆에 앉자, 천오가 내려놓았던 약함을 익숙하게 가져왔다. 초윤은 왼손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으며 말했다.

“약사발과 도자(刀子)를 다오. 막자는 필요 없다.”

“예, 스승님.”

천오는 약함의 작은 서랍을 열어 손바닥의 절반만 한 작은 도자기 약사발과 조그만 칼을 꺼내 손잡이 쪽을 내밀었다. 그중에 칼만 받아 든 초윤은 천오가 들고 있는 약사발 위에 왼팔을 들어 올렸다. 드러난 팔에는 명주 천으로 만든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이를 풀어내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상이 하나 드러났다. 천오는 순식간에 아연해진 얼굴로 물었다.

“스승님? 이게 무슨…….”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 눈을 감거라.”

“스승님?”

“어서. 다 되었다고 할 때까지 뜨지 말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천오의 두 눈이 꼭 감겼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따르는 듯했다. 초윤은 제자의 시야가 잘 차단되었는지 살피고, 황추의 아들을 치료할 때 냈던 상처 옆을 칼끝으로 비스듬히 그었다. 방울져 맺힌 핏방울이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약사발 안쪽에 고였다.

곤두선 오감으로 그 소리를 듣고 피비린내까지 맡은 천오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출혈을 가속하던 초윤이 덤덤하게 말했다.

“알리는 게 늦었구나. 내 몸을 구성하는 건 모조리 영약과 비슷한 효능을 지녔다.”

작게는 체액부터 크게는 살점과 뼈까지.

오랫동안 믿고 싶지 않았으나, 이제는 적당히 편리하다 생각하는 ‘초윤’의 비밀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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