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어떻게 보자면 당연했다. 독초를 너무 많이 섭취해서 입김 대신 독연(毒煙)을 불 정도니 몸이 독에 절어 있을 만도 했고, 약과 독은 상통한다고 했으니 약선 초윤이라면 이를 자유자재로 다뤄 치료에 활용할 수 있을 법도 했다.
다만 적극적으로 쓰면서 다니기엔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초윤은 이 설정이 상당히 무서웠다!
내 몸이 약이라니, 인간 영약이라니.
체향이 약초 냄새일 때부터 알아봤다. 현대에서도 몸에만 좋다면 뭐든 주워 먹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인권 의식까지 희박한 이 시대에 걸어 다니는 산삼이 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사실이 새어 나간다면 눈 뒤집힌 인간들이 지구 끝까지 칼 들고 쫓아올 게 뻔했다. 만사에 무관심하던 ‘초윤’마저도 이건 성가실 것 같았는지 오래전 사현이를 살려 낼 때 말고는 공개적으로 쓴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초윤 또한 웬만하면 잊고 있으려 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왔다. 하나는 사천당문에서 열린 경합 도중 금제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던 백호철을 급하게 진정시킬 때였고, 하나는 바로 얼마 전 대장장이 황추의 아들을 긴급히 살려 낼 때였다. 연단(鍊丹)에 시간이 걸리는 전통 의학의 특성상 주저앉아 약을 만들 여유가 없다면 선택의 여지 또한 없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쓰다 보니 점점 익숙해지게 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약을 잘 소화해 낸 사현이도 일취월장을 하게 되고……. 어느새 초윤의 안에서 이 능력은 ‘들키면 귀찮지만 잘 쓰면 좋은 것’이 되어 있었다. 12년 무림 생활의 영향이었다.
‘설린이는 무공을 배우지 않았으니까 평범한 영약을 먹여 봤자 수명을 조금 연장하는 정도밖에 안 돼. 광동성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도 안 되니 약을 새로 만들 수도 없어. 그리고 천오도 다 컸으니 슬슬 알려 줘도 되겠지. 혹시라도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너무 놀라면 안 되니까…….’
일찍이 성인이 된 남매에게도 언질을 주고 싶었지만 ‘네 스승의 육신이 약이다’라는 말을 서신으로 보내는 건 살짝 불안했다. 그리고 한 명은 황제의 아들 옆에, 한 명은 하북팽가의 수장 결패도 팽치정 곁에 붙어 있으니 많이 위험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사발의 바닥이 가려질 정도로 충분한 양의 혈액이 모이자, 초윤은 무명 수건으로 팔을 닦고 다시 붕대를 감았다. 아쉽게도 초윤의 약효는 제 몸엔 듣지 않았다. 소매를 내리고 약사발을 받아 드는데 어쩐지 천오의 손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선을 들어 제자의 얼굴을 확인한 초윤은 하얗게 질린 그의 낯빛을 보고 질겁했다.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천오가 먼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렇게…… 황홍도 이렇게 치료하신 겁니까? 제가 대장간에 들어간 황추를 보호하는 사이 존체를 훼손하여 살려 내신 겁니까?”
존체를 훼손하다니, 아프지도 않은 상처를 조그맣게 내어 피만 좀 뺀 것뿐인데 너무 과한 표현인 것 같았다. 스승이 제 팔이라도 자른 것처럼 반응하는 천오를 본 초윤은 허둥지둥 자신의 멀쩡함을 어필하려 했다.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없습니다.”
‘초윤’!! 내 새끼한테 야멸차게 말하지 마!!!
조용하고 침울하게 답하는 천오를 보자 환장할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아무리 사소하다 하더라도 애 앞에서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는 건 명백한 잘못이자 정신적 폭력 같았다.
왜 이걸 고려하지 못했을까. 아니, 왜 여태껏 괜찮다고 여겼지?
불쾌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잊고 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엄습했다. 하지만 사색이 된 천오 앞에서 자신까지 초조함을 보일 순 없었다. 초윤은 입 안에서 혀끝을 살짝 깨물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뒤 차분하게 말했다.
“마음이 급해 행동부터 앞섰구나. 미안하다. 앞으로는 네 면전에서 이런 짓은 하지 않겠다. 어렵겠지만 잊거라.”
“……제가 바라는 건 스승님의 상처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께서 부상을 입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지만 짚어 주신 대로 스승님의 약을 대체할 만한 방도가 제게는 아직 없으니 뜻을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초윤의 선택적 눈치가 빛을 발했다. 십 년을 넘게 같이 살면서 천오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조금 많이 큰일 난 것 같았지만 환자를 앞에 두고 언제까지나 딴짓을 할 순 없었다. 초윤은 애써 노력하겠다 말하고 몸을 돌렸다. 팔뚝 안쪽이 괜히 욱신욱신 쑤시는 느낌이었다.
기절한 설린의 목 밑으로 깊게 손을 넣어 살짝 들어 올리자 아이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할 일을 재깍 알아차린 천오가 반대편으로 넘어가 설린의 입을 벌렸다. 초윤은 그 안으로 약사발에 모은 자신의 피를 흘려 넣으며 힐끔 천오의 눈치를 살폈다.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곧고 짙은 눈썹 사이 단정한 미간에 희미한 골이 패여 있었다.
초윤은 겸연쩍게 운을 뗐다.
“처치를 어떻게 할지는 아까 들어 알고 있겠지. 기맥은 생명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지만 단련한 정도에 따라 지극히 다르다. 이 아이의 기맥은 막힌 곳을 뚫는 힘을 견딜 수도 없을 정도로 연약하니 다소 극단적인 방법으로 길을 내는 것이다.”
“예, 그렇겠지요.”
“…….”
진짜 미안해! 이것만 끝나면 이 몸이 허락하는 데까지 계속 사과할게!
초윤은 설린의 머리맡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제 허벅지에 뉘였다. 묵묵히 바라보던 천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초윤의 손길에 자연스럽게 속도가 실렸다.
“과한 약은 독이나 다름없으니 이제부턴 지체할 시간이 없다. 심장과 양손, 양발을 돈 뒤 마지막으로 단전에 갈 것이다. 그동안 너는 감초, 반하, 시호, 인삼, 전호, 향부자와 황금, 황련에 설삼을 섞어 설삼소시호탕 한 제를 만들거라. 포장지에 생강 세 톨과 대추 두 알을 함께 달여 먹으라 써 두는 것 잊지 말고.”
“음허(陰虛)라면 보음환을 함께 써도 좋습니까?”
“보음환에는 구기자와 녹용이 들어 있으니 곧장 이어 복용하면 부담이 된다. 여유를 두어 상약하라 적어 두어라.”
몇 년 사이 약학 지식이 크게 늘어난 천오는 초윤의 지시를 쉽게 알아듣고 찰떡같이 이행했다. 무엇보다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어 초윤도 마음 놓고 제자에게 제약을 맡길 수 있었다. 천오가 몸을 일으켜 약함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초윤은 본격적으로 설린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신을 잃은 설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식히듯 한여름 계곡물처럼 정순하고 선선한 초윤의 내공이 태양혈과 함염혈, 곡빈혈을 통해 설린의 기맥 안으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위장을 중심으로 제멋대로 번지는 영약의 기운을 잡아 허파 가운데로 이끌었다. 약한 심장이 이 힘을 다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아 절반은 일찍 두 다리로 내보냈다.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면 단전을 중심으로 운용했을 테지만 제갈설린은 일반인이었다. 기맥도 성치 않은 마당에 덜컥 임독양맥을 뚫은 순 없으니 편법을 써야 했다.
사람의 몸에 있는 심장은 양쪽 손발바닥에 있는 것까지 총 다섯 개, 오심(五心)이었다. 초윤은 이 다섯 개의 심장을 목표 삼아 길을 트는 데에 집중했다. 세찬 물살을 버티지 못한 기맥의 찢어진 틈을 메우고, 새어 나간 기운은 물길 틀어 주듯 다시 집어넣었다. 한 번에 하나씩도 아니고 총 네 개의 길을 동시에 뚝딱거리며 만들고 있자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생리 현상을 잃은 지 오래인 초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군데군데 막힌 기맥을 뚫고 한 땀 한 땀 이어 붙이는 작업은 한 번의 왕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발의 말단을 찍으면 다시 돌아와 심장을 한 바퀴 돌고, 또 손발의 끝을 향해 가야 했다. 대신 다녀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확연히 느껴졌다.
마침내 무엇 하나 걸리는 것 없이 콸콸 흐르는 기맥이 느껴졌을 때, 초윤은 남은 기운을 모아 설린의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그 끝에 있는 꼬리뼈, 무림인은 선골(仙骨)이라 부르는 부위를 활성화시킨 뒤 손을 뗐다. 그와 동시에 제갈설린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셨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천장을 응시하며 빳빳이 경직되어 있다가 한순간 실 끊어진 인형처럼 툭 늘어졌다.
초윤이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오래전 비슷한 방법으로 사현이를 치료한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의 준비를 해 뒀기에 망정이지, 하룻밤 만에 사람의 체질을 완전히 뒤바꾸는 건 현경의 고수인 초윤에게도 상당히 힘겨운 일이었다. 살짝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소매로 얼굴을 훔치려던 찰나 타이밍 좋게 손에 무명 수건이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꼼짝 않고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천오였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스승님. 노고 많으셨습니다. 차를 올릴까요?”
“괜찮다. 약은?”
“보름치 탕제와 환, 약방문까지 일찍이 마쳐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돌리자 동트는 햇빛이 닫아 둔 창문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호롱불은 어느새 기름이 다해 꺼진 지 오래였고, 이른 아침 특유의 차고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정신없이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알지 못한 듯했다.
제갈설린은 쌕쌕 고른 숨을 내쉬며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오랜 지병으로 창백하던 낯에 건강한 혈색이 돌았다. 기껏 먹은 인조 영약은 몸을 보수하는 데 전부 쓰였지만 이제 튼튼한 기맥과 활성화된 선골을 갖고 있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축기를 할 수 있을 터였다.
‘다른 아이들은 심법을 익히면서 천천히 밟는 과정을 단시간에 뛰어넘었으니까 부작용이 없을 순 없겠지만…… 잘 해내겠지. 본래 스토리 라인대로라면 진작 나았어야 하는 병이고.’
그 본래의 스토리 라인에서, 제갈설린은 끝까지 ‘절맥증을 벗어난 일반인’에 머물 뿐 무공을 익힐 조건은 갖추지 못했단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한 초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