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길을 떠날 때만 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째 자꾸만 일이 꼬인다. 그것도 완전히 틀어졌다면 이번에도 큰일 났구나 한탄하며 계획을 몽땅 바꾸든 무작정 도망치든 해 봤을 테지만 그저 약간씩 발목을 잡는 정도, 조금씩 지체되는 정도로만 꼬이고 있어 괜히 불안하기만 하다.
초윤은 물기를 머금은 약함 위에 손을 올리며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숙련된 무림인의 내공은 물 끓이기, 수분 날리기 등등 일상생활 속 불편한 요소를 간단히 해치우고 삶의 질을 높여 주는 만능 사기 능력이었다. 덕분에 곰팡이가 슬기 쉬운 약초를 나무 함에 넣어 장거리 여행도 다닐 수 있었고, 비에 젖어 들러붙는 옷도 쉽게 말릴 수 있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천오가 조그만 창문을 걸어 닫고 빗물 튄 얼굴을 소매로 닦았다. 허름한 방 안을 밝히던 등잔불이 크게 일렁였다.
“적어도 오늘 밤은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곤란하게 됐구나.”
형편이 좋지 않은 집에 언제까지고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고, 그냥 날 밝자마자 뜨는 게 좋으려나. 천오가 비 맞는 건 싫은데…….
제갈설린을 치료하자마자 객잔에서 나와 마차를 얻어 탄 건 좋았다. 온주시를 나와 영덕시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아열대 특유의 습한 기후를 제외하면 모든 게 괜찮았다. 파도가 규칙적으로 밀려들어 오는 절경의 수평선, 드높은 하늘에 그려진 갈매기 떼와 해수 냄새를 물씬 담은 축축한 바람. 먼바다에 조그맣게 떠 있는 어선과 모래사장을 건강하게 뛰어다니던 아이들.
초윤은 도시를 통과하는 내내 십여 년 만의 바다를 만끽했다. 내륙에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신선한 해산물 요리와 건어물 주전부리도 실컷 먹었다.
문제는 복건성의 복주시에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바다 옆에 세워진 도시는 날씨가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초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덕시를 종단하는 내내 아무런 이상도 없어 무심코 안심해 버렸다.
그렇게 마음을 놓은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는 듯, 새로운 도시에 발을 딛자마자 하늘에 그림자가 지더니 아차 하는 사이 누가 쏟아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가 들이닥쳤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약한 태풍이라 쉽게 그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는 당연히 마차가 돌아다닐 수 없었고, 배도 뜰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몇 날 묵을 생각으로 객잔을 찾아다녔지만 하필이면 조그만 어촌에 발이 묶인지라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항만이 발전했다는 천주시까지만 가도 하오문의 별저를 이용할 수 있었을 테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 자체가 난제였다.
‘오룡강도 건너야 하잖아. 물 불어난 것 빠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그러면 아예 기다렸다 가는 게 나을까? 아니, 이 집에 오래 머무는 건 역시 양심이 좀 찔려.’
관절염을 앓는 어부와 아토피가 심한 아이의 약을 지어 주는 것으로 어찌어찌 민가의 방 한 칸을 빌릴 순 있었지만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집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애 셋 먹여 살리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 가정에 계속 신세를 질 순 없었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한 이불을 내공으로 보송보송하게 말리며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을 들자 닫은 창문을 멍하니 보고 있는 천오가 눈에 들어왔다. 비싼 종이를 바르는 대신 나무판자로 만든 허름한 창문짝으로는 바깥도 보이지 않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의아하게 지켜보던 것도 잠시, 천오는 금세 이쪽을 돌아보았다. 초윤은 싹 지워지는 근심을 느끼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구나. 네 나이엔 흔치 않건만.”
“좋은 기억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레가 무섭진 않고?”
“전혀요.”
하긴, 불귀 산맥의 날씨도 만만찮게 제멋대로였다. 산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천오를 지겹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한 초윤은 아주 험한 기후가 아니라면 종종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가곤 했다. 비가 오는 날엔 도롱이를 입히고, 눈이 오는 날엔 솜옷으로 꽁꽁 싸맸으며 돌아와선 뜨끈한 목욕까지 시켰다.
바지런히 노력했던 것들이 천오에게 추억으로 남았다고 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갑작스러운 비구름에 예정이 지체된 것도 그리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닌 듯했다.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긴 어려울 성싶지만 도시에 도착해서 미리 서신을 보내면 될 일이고, 아니면 적당히 인적 드문 길을 찾아 경공을 써도 좋을 것 같았다.
‘좋은 기억이라…….’
마음이 풀리자 돌연히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초윤은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결심하고 말문을 열었다.
“……다소 느닷없고 이미 했던 말이다만, 천오야.”
“예, 스승님.”
“설린을 치료할 때 네게 묻지도 않고 끔찍한 꼴을 보여 주어 미안하다.”
초윤은, 정하윤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과할 정도로 스스로를 성찰하며 늘 조심하는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항상 자신을 지켜보는 제자까지 있었으니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버렸단 사실은 본인 또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이가 경솔하고 짧은 판단으로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으니 가시방석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초윤의 머리 한구석에선 내리 이 생각만 맴돌고 있었다. 절경의 수평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갈매기 울음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천오는 겉보기에 괜찮은 것 같았지만 워낙 속을 보여 주지 않는 사람이니 제 안목만 믿을 순 없었다.
흐리게 인상을 쓴 초윤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네게 보일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데, 하물며 스스로 자상(自傷)하는 모습을 접하게 하다니 말할 것도 없이 내 실책이다. 변명을 하고 싶진 않지만 나도 내가 어째서…….”
고민을 하면 할수록,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구심만 더해졌다. 실수는 언제나 믿었던 곳에서 배신을 당하듯 벌어진다지만 이번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이 미묘한 기시감은 무엇인가? 이것과 비슷한 잘못을 한 기억은 없는데, 왜 이렇게 겪어 본 적 있는 기분이지? 겪어 본 적이 있다면 도대체 그때는 언제고, 무슨 공통점이 있는 걸까?
점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입 밖으로 무슨 말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사과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간결하고 정확하게, 자질구레한 발뺌 없이 내가 잘못한 것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 약속해야 하는데.
바깥에 몰아치는 비바람보다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상념에서 초윤을 끄집어낸 건, 한순간, 나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내리누르며 초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초윤은 바깥의 어지럽게 몰아치던 상념에서 목덜미를 잡아 채인 것처럼 끌려 나왔다. 어느새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 천오는 양손을 바닥에 짚은 채 몸을 살짝 웅크려 초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승님.”
초윤의 내리깐 두 눈동자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새까만 눈이 기어코 시선을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맑게 개이고, 방금 무엇 때문에 번민했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분이 상당히 이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처 숙고할 틈도 없이 천오가 말했다.
“스승님의 존체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또 있습니까?”
“……전부 죽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으니 없을 게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스승님을 섭취한 이가 있습니까?”
“……이전에 잠깐 보았던 녹림왕과 네 사형을 살리는 데에 썼다.”
섭취한다니 어감이 좀 이상한데,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의아한 마음으로 멀뚱히 대답하는 와중 천오가 슬며시 한 손을 움직였다. 잔흉터 가득한 손등이 단정히 꿇어앉은 초윤의 한쪽 허벅지를 사뿐히 덮었다. 맵시가 고와 직접 마주 대기 전까진 길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손가락이 먹잇감을 움켜쥔 까마귀 발톱처럼 둥글게 다리를 감쌌다.
그러나 무게감은 없었다. 느껴지는 건 오로지 무명천 너머 희미한 온기뿐.
입술을 달싹거리는 사이 반듯한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꽂혀 들었다. 이 두 눈을 앞에 두고선 어떠한 거짓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곧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얇은 벽 너머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도 미처 가려 주지 못할 만큼 낮고 선명했다.
“제가 다쳐도 똑같은 실책을 범해 주실 겁니까?”
“…….”
작게 밝혀 둔 불꽃이 실바람을 맞아 한차례 일렁였다. 벽에 그려진 두 그림자가 거칠게 일그러지고, 초윤의 손끝이 움찔 움츠러들었다.
한참, 혹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초윤은 간신히 대답을 짜냈다. 십이 년을 함께 살아온 아이 앞인데 어째서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마른침이 넘어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네가…….”
“…….”
“……네가 그토록 다칠 일이 없도록 먼저 노력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다면 망설이지 못할 것이다.”
목구멍을 거쳐 나온 소리는 뻣뻣하고 까끌까끌했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인 데다가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이었지만 얼버무릴 순 없었다. 이렇게 치기 어린 방법으로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애는 아니었는데. 설마 하는 마음에 덧붙여 물었다.
“내가 그리하길 바라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만 괜찮습니다.”
김샐 정도로 싱거운 대답을 한 천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초윤의 허벅지를 붙잡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동요 한 점 없는 얼굴로 스승의 이불까지 착착 깐 천오가 예의 바른 밤 인사를 남기곤 등을 보이며 옆으로 누웠다. 평소엔 정 자세로 바르게 자는 이가 저렇게 대놓고 몸을 돌리는 건 처음이었다.
얼떨결에 홀로 남은 초윤은 갑작스럽게 봉변을 당한 사람처럼 멍하니 천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