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제갈설린은 온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에 천천히 깨어났다. 가늘게 눈을 뜨자 허공을 동동 떠다니는 먼지와 커다란 창 너머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 옆의 풍경이 보였다. 늦잠을 잔 사람이 으레 그렇듯 평소 일어나던 시간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직감했다. 멍멍한 기분으로 간밤에 있던 일과 오늘의 일정을 더듬어 나가던 제갈설린은 퍼뜩 떠오른 기억에 화들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열기가 내달린 건 그 순간이었다.
심장이 한 번 맥동할 때마다 손끝과 발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뻗쳤다. 온몸에 새롭게 새겨진 길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팔팔 끓인 물이 혈관을 흐르는 것과 비슷했지만 이상하게도 괴롭지 않았다. 그저 처음으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나무토막 같던 몸뚱이에 누군가 숨을 불어 넣은 것 같았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다시 누워 신음하던 설린의 귀가 뒤늦게 외부의 소리를 받아들였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가벼운 발소리, 문을 박차고 들어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제 팔을 쥐고 흔드는 누군가의 손.
그와 동시에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듯 뻣뻣하게 굳어 있던 힘이 풀렸다. 잠시 숨을 몰아쉰 설린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곁에 앉은 시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식은땀에 젖은 얼굴이 번들거리며 열락을 띠었다.
“수영아, 나았다! 내 절맥증이 나았어! 그분께서 나를 고쳐 주셨다!”
“아가씨?”
“이제 죽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감내하며 살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무공을 익힐 수도 있고, 큰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내 몸속을 도는 그분의 기운이 느껴진다. 너희들은 평소에도 이런 걸 체감하며 살던 것이냐? 이렇게 날뛰는 야생마 같은 몸뚱이에 어떻게 고삐를 채운 것이냐?”
“아가씨!”
항상 조곤조곤하고 얌전한 어조로 말하던 시비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곁을 지킨 충성스런 부하를 올려다보던 설린의 얼굴에서 느릿느릿 표정이 빠져나갔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뛰고 숨도 가빴지만 달아올랐던 머리가 식었다. 시비는 이성을 되찾은 제 주인의 양어깨를 붙잡고 잠시 내공을 주입해 몸을 살피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이군요, 아가씨. 막힌 구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보다도 단련된 기맥입니다.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고된 운동을 한 것처럼 힘이 들고 열이 나지만 그것뿐이에요. 분명 아플 것이라 하셨는데 잘 모르겠어요. 기쁜 마음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으니 당분간 상태를 주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건 그분께서 두고 가신 약재입니까?”
“아…… 그런 것 같아요.”
시비는 제갈설린의 어깨를 놓고 몸을 돌려 침상 옆에 놓인 약첩과 죽통을 집어 들었다. 첩지(貼紙)에 쓰인 복용법과 죽통에 붙은 약방문을 보아하니 틀림없었다.
아득한 기분으로 시비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린은 한숨을 푹 쉬며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아직 감격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흥분해서 방방 뛸 순 없었다. 무엇보다 절대 들어오지 말라 일러둔 것을 어기고 이렇게 달려왔다면 급한 용무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충분히 진정했으니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무슨 일인가요?”
“……세가에서 지급(至急)으로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그것도 표국이 아닌 직통으로, 직계만이 열 수 있는 서통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리 주세요.”
시비가 품에서 조그만 원통형의 목갑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설린은 그것을 받아 몇 번의 정교한 조작을 한 뒤 조심스레 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내부에서 불타 버리도록 설계되어 있는 특수한 서통이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안에서 나온 건 돌돌 말린 조그만 종잇조각이었다. 비밀스럽고 급하게 전달된 명령을 망설임 없이 펼친 설린이 흠칫 얼어붙었다.
어머니의 필체로 서신에 쓰인 건 단 두 글자뿐이었다.
불귀(不歸).
돌아오지 말거라.
인내심 깊게 설린을 기다리던 시비조차 이를 보고 말문을 잃었다. 충격을 받은 듯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설린을 본 시비가 다급히 말했다.
“소서 님께서 아가씨를 내치셨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 장로들이 기승을 부린 탓일 겁니다. 아가씨의 절맥증이 완쾌되었단 소식이 전해진다면, 혹은 조금만 기다린다면…….”
“……어, 어떡하지. 어머니께서, 세가가 위험에 처한 것 같아요. 그것도 심각한 위기에.”
설린이 서신을 와그작 구겼다가 급히 폈다. 순식간에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텅 비어 버린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조그만 단서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서체를 살폈다.
“어머니께서 저를 내치실 요량이셨다면 마차에 타기 전에 말씀하셨을 거예요. 죽기 전까지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금전을 쥐여 주셨을 테고, 잘 다녀오란 말씀도 굳이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이리 급하게 돌아오지 말라 하신 건 어머니조차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세가에 닥쳤다는 뜻이에요. 제가 가면 분명히 휘말려 목숨을 잃을 게 분명한 일이요.”
“그렇지만…….”
“글자가 흔들리지 않았어요. 세가의 안과 바깥에 적이 가득해서 들킬 것을 가정하지 않고서야 이리 정돈된 필체를 구사할 시간에 짤막한 글귀를 쓰셨을 리 없어요. 하다못해 동행한 무사들도 전부 어머니의 부하인데, 제가 세가에서 멀어지길 기다리셨다면 그들에게 맡겨도 충분했을 거예요. 그러지 않고 전서구를 이용하셨단 건, 결론 말고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으셨다는 건…….”
답이 없단 뜻이다. 도무지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단 뜻이다.
이 가설을 부정하기 위해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세가로 찾아가 알아볼 수밖에 없는데, 현명한 어머니의 판단 아래 오지 말라 하셨으니 무작정 어길 수도 없었다. 자신의 자발스러운 행동이 행여나 어머니의 약점이 될까 걱정스러워 쉬이 결정할 수 없었다. 어중간하게 영리한 이는 스스로의 생각에 발목이 잡힌다고 하던데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어뜯던 설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소슬바람 같은 음성 한 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난 복건을 지나 광동까지 갈 예정이다.
“……광동성, 광동성에 하오문이 있었지요?”
“예, 아가씨.”
“하오문주라면 세가에 무슨 화가 닥쳤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테고요?”
“그건…… 장담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지금의 일행보다는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거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여비는 충분한가요?”
“여비는 충분하지만 최소 보름은 필요합니다.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말을 바꾸고, 밤낮 없이 달린다면 열흘로 단축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가씨의 옥체가 이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는 이제 건강해요!”
“그분께서 남기고 가신 약방문에는 약을 다 복용할 때까지 절대 안정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고된 여정은 그만한 후폭풍을 남길 겁니다.”
“이런…….”
-이 시기의 복건성은 날이 변덕스러워 몸이 약한 사람에겐 극독이나 마찬가지니 혹여라도 따를 생각은 하지 말거라.
그 말씀이 이런 뜻이었던 건가. 설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심하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고민은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았다.
“광동성으로 가야겠어요. 무사를 먼저 보내면 눈에 띌 테니 어디까지나 제 충동적인 여행의 연장선이 되어야 해요. 남궁세가의 영역을 벗어나기 전까진 천천히, 하오문의 영역에 들어가선 속도를 내는 게 좋겠어요. 적어도 저녁엔 출발할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를 해 줘요.”
“……예, 아가씨.”
이런 상황에 실례일 게 뻔한 사견입니다만, 저는 아가씨가 건강해지셔서 기쁩니다. 감축드립니다.
조용히 한 마디를 남긴 시비가 나부죽이 읍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손에 약첩과 죽통이 들려 있었다.
설린은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 삐걱삐걱 침상에서 내려왔다. 집안에 이변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간신히 억눌렀던 환희가 어지럽게 뒤섞이며 설린의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생겨났다 사라지는 생각은 또 어찌나 많은지 손을 움직여 적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내가 급히 하오문을 필요로 하게 된 것과, 그분의 목적지가 광동성인 것이 과연 우연일까? 남궁세가의 동태가 이상했던 것과, 때맞춰 어머니의 급보가 날아온 건 그저 우연일까? 내가 박주시의 영약 소식을 전해 듣고 여행길에 오른 것과, 하필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세가가 위험해진 것이 정말…… 우연일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깊고 거대한 흐름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걸음이 모래 바닥을 내딛는 것처럼 푹푹 빠지는 것 같았고, 자신이 지금 옳은 결정을 내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했다.
제갈설린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약선 초윤이 제갈설린의 앞날을 비틀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설린은 정해져 있던 자신의 인생이 뒤집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났다는 선인이 아닌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한다는 현경이 이런 것인가.
이 혼란과 재액이 격변의 대가라면 적어도 속절없이 끌려가진 않아야 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제 발로 일어설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니 그만한 결과를 보여야 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아등바등 노력하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은 제갈설린은 천근만근 무거운 손을 들어 세필을 잡았다. 아무 종이나 거칠게 쥐어 가져와선 기억 속의 글귀를 휘갈겼다.
제갈세가는 수만 권의 서책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온 중원과 새외무림에서 긁어모은 무공 비급은 장장 이만 권에 달했다.
그리고 제갈설린은 가진 모든 것을 전부 읽고 외웠다. 수많은 무공을 머리로 먼저 습득했으니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비급을 추리는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먹글씨 위로 떨어지며 번진 얼룩을 그렸지만 설린은 붓을 멈추지 않았다.
초윤이 떨어트린 작은 불씨가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