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사람들 사이를 귀신같이 헤치고 빠른 속도로 초윤의 앞에 도달한 사영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스승의 품으로 돌진했다. 안 그래도 사영을 껴안고 싶었던 초윤은 기꺼이 양팔을 벌렸고, 곧 들이닥친 예상 이상의 운동 에너지에 조금 밀려나 버렸다. 천오가 때마침 뒤에서 단단히 받쳐 준 덕에 휘청이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스승님! 뵙고 싶었어요!”
“오냐, 그래. 날도 무더운데 왜 여기까지 나왔느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 뵙고 싶어서요. 소식을 일찍 알았다면 혜주시까지 마중을 나갔을 거예요.”
“내가 말렸을 것이다.”
덜컥 흔들린 죽립을 고쳐 쓴 뒤 사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자 상기된 얼굴의 사영이 포옹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났다. 초윤은 그제야 여유를 갖고 첫 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초윤의 어깨에 간신히 닿던 아이가 이제는 한 치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매일 땋아 주었던 머리카락은 어깻죽지 선에서 썩둑 잘라 질끈 올려 묶고, 간소한 감청색 무복에 허리띠에는 모란 매듭을 단 모습이 정말이지…….
“잘 지낸 것 같구나.”
“그럼요, 스승님. 저는 정말 잘 지냈어요.”
근사했다. 훌륭했다. 어떤 말을 붙여도 부족했다. 매일같이 성장을 지켜본 천오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새삼스레 행복했다. 속으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초윤은 손을 뻗어 사영의 어깨 한쪽을 가만히 도닥였다. 이렇게 닿은 것만으로도 그간 사영이 얼마나 열심히 단련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러 준 대로 무리하지 않은 것 같고.”
“네, 스승님.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여전히 밝고 활달한 모습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자신의 성장을 자랑하듯 당차게 대답한 사영이 어깨 위에 올라온 초윤의 손을 꼭 잡아 내렸다. 손바닥과 손끝에 박인 굳은살이 그동안의 노력을 보여 주는 것 같아 괜히 가슴이 찡했다. ‘초윤’의 몸이 아니었다면 울고도 남았을 듯했다.
비가 오는 시기에 오겠다 하셔서 많이 걱정했다, 역시 이곳까지 곧장 오는 마차를 보낼 걸 그랬다, 말을 데려왔으니 함께 가자, 오시는 길에 불편하셨던 것은 없느냐, 초윤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재잘재잘 명랑히 말하던 사영의 눈이 초윤 뒤를 지키고 있는 인물에게 힐끗 옮겨 갔다. 한 박자의 간극 뒤, 사영이 질렸다는 듯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어쩐지 지금의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이 더욱 사영다운 것 같아 귀엽게만 보였다.
“아주 쑥쑥 컸네, 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저. 강녕하셨습니까.”
묵묵히 서 있던 천오가 가만히 포권을 취하고 고개를 숙였다. 순간 울상인지 짜증인지 모를 얼굴을 한 사영이 초윤에게 시선을 돌리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잘 먹이신 것 아닌가요, 스승님? 외공을 단련한 것도 아닌데 징그럽게 커 버렸잖아요!”
“타고난 골격이 있어 그런 게지 어디 먹이기만 해서 되겠느냐. 몰라볼 정도로 큰 건 너도 마찬가지다만.”
“하지만 현아도 그렇고 다들 시꺼멓게 자라 버렸어요. 제 동생들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인걸요.”
“그럴 리가.”
누가 봐도 남매인데 그럴 리 있나. 귀여운 투정에 피식 웃은 초윤은 이 주위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래 도착하기로 했던 날보다 늦어 버렸는데, 사현이는 아직 오지 않았느냐.”
“아, 이제 광동성에 들어섰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늦어도 사흘 안에는 도착…….”
아금받게 말하던 사영이 갑자기 말끝을 얼버무리고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초윤은 갑자기 달라진 제자의 안색에 무슨 일인지 넌지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원래는 체류하시는 동안 하오문에 어떤 객도 받지 않으려 했는데요. 이 바보 같은 동생 놈이 수습할 여유도 없이 사고를 쳐 버려서 그만…….”
“사고라니?”
절강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던 초윤의 가슴이 괜히 덜컥 내려앉았다. 그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영은 말을 묶어 둔 곳으로 스승을 모셔 가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약함을 등에 진 천오가 두 사람을 말없이 뒤따랐다.
“중원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동안 동행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원래 호북에서 갈라지기로 할 예정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광동성까지 같이 오게 되었나 봐요. 이걸 일찍이 얘기하지 않고 거의 다 와서야 알렸지 뭐예요. 저도 오늘 전해 들었어요.”
아, 뭐야. 그런 거였어? 처음부터 귀빈 대접을 받을 생각 따위 없었던 초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현이는 4년 전부터 먼 북쪽의 요녕 땅에 홀로 가 있었고, 정기적으로 오가던 서신에도 사영과는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하는 법이 없었으니 일이 생길 때마다 재까닥 연락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을 만도 했다.
“먼 길을 함께 왔다면 그리할 수도 있지. 신경 쓰지 않는다. 괘념치 말거라.”
“죄송해요, 스승님. 그 녀석이 오면 제대로 일러둘게요. 그리고 이건 현아가 데려오게 된 불청객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와글거리는 인파의 소음을 뚫고 면사 너머로 전해지던 사영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지다 이윽고 말끔한 전음이 되어 고막에 울렸다. 이를 들은 초윤의 움직임이 순간 뻣뻣해졌다.
[개인적으로 찾아보았을 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사천당문의 선례가 있으니 노파심에 여쭙겠습니다. 혹시 요녕성의 모용세가와 지금 마주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모용세가라니?]
[현아와 함께 온다는 사람들이 모용세가의 소가주와 이복동생이라서요. 조금이라도 성가실 것 같으시다면 절대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할게요, 스승님.]
모용세가의 소가주와 이복동생이라면…… 설마.
믿고 싶지 않은 소식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속으로 허허롭게 웃은 초윤이 현실을 부정하며 되물었다.
[사현이가 모용단과 모용서를 데리고 이곳에 오고 있단 말이더냐.]
[네, 스승님.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북에서 사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뒤엎고 현아와 함께 장강을 건넌 것 같아요. 현아도 자세한 건 모르는 건지, 함께 온다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더라고요.]
[요녕에서부터 여기까지 동행한 것이냐. 무슨 연이 있었기에?]
[현아가 서신으로 전하지 않았나요?]
사영이 놀란 눈을 하며 초윤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제자를 만나 흐뭇한 행복을 누리자마자 상상도 못 했던 사건과 맞닥뜨린 초윤은 그저 울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용세가가 위치한 요녕은 중원에서도 한참 떨어진 북동쪽에 붙어 있었고 광동성은 반대로 최남단에 있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북한에 살아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전라남도 목포에서 마주치게 된 꼴이었다.
이 모든 게 전부 초윤이 뿌려 온 업보를 받을 수밖에 없도록 짜인 거대한 각본 같았다. 마음의 준비고 자시고 당장 도망가고 싶었지만, 이곳을 벗어나 봤자 주인공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나긴 어려울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초윤은 목구멍 너머로 눈물을 삼키며 애써 간결하게 대답했다.
[전혀.]
[세상에, 스승님께서 이를 모르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현아는 4년 전 삼보대회에서 우승한 뒤 모용서와 친우가 됐대요. 하북까지 가는 길에도 함께 돌아갔고, 결패도 팽치정의 제자 신분으로 팽가에 의탁하고 있을 때도 모용서 쪽에서 곧잘 찾아왔다고 들었어요. 모용세가에서 하북팽가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도 말예요.]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래전 스쳐 지나갔던 사람이 떠올랐다.
배화구검 구양선.
본래라면 삼보대회의 우승을 차지하고 주인공의 동료가 되었어야 할 사람의 역할을 사현이가 떠맡아 버렸다.
신물과 관련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천으로 돌아가던 난위정의 행보에 초윤이 개입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도움을 받아 중검을 쓰게 되었어야 하는 구양선의 인생에 초윤이 몇 년 일찍 끼어들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4년 전 사현이의 우승 소식을 듣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한 이치였다. <귀환영웅>의 주인공 모용서는 삼보대회의 우승자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 흐름 하나만 놓고 보자면 사현이가 그의 눈길을 끌게 될 것은 자명했다.
화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구양선 대신 임사현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주인공의 동료’ 자리를 내 제자가 대체하게 되었다.
면사에 가려진 초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비틀려 버린 원작의 내용을 완벽하게 복구할 수 없다면, 대체품을 들여서라도 본래의 길을 되찾겠다는 거대한 의지가 느껴졌다.
본래의 구양선은 그 소설 속에서 무슨 꼴을 당했던가. 몇백 화 넘게 연재된 양산형 소설 속 조연의 이야기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자세히 떠오를 리 없었다. 다만 주인공의 최측근인 만큼 매번 너덜너덜해지도록 강적과 싸우고, 우직하게 일어나며 성장하고, 이기고, 또 수도 없이 다쳤던 것은 기억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막바지에 다다를 때까지 죽는 장면도, 사망을 암시하는 복선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수도 없이 다치는 것’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지만…….
만약, 만약에. 정말로 이 세상이 기존과 다르게 흘러가는 스토리에 어쩔 수 없이 생겨 버린 구멍을 채우고 있다면.
지금 자신과 보폭을 맞추어 걷는 ‘원작 최종 악역’의 역할 또한 다른 이가 맡게 되었을까?
조부를 죽이고, 대항하는 자를 전부 말살하고, 오로지 압도적인 무력을 통한 공포로 마에 몸담은 이들은 모조리 통일하고, 그들을 이끌어 중원의 거대한 정파 무림을 잔혹하게 일거 소탕하면서 인세에 지옥을 불러왔다는 뜻을 담아 염라군이 된 주천오를 대신할 자가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자는 초윤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재앙이나 다름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