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아니, 여기서부터는 억측에 불과했다. 이미 단단히 틀어진 스토리인데 주인공에게 친구 하나 생겼다고 원작대로 흘러가리라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모용서를 만날 경우 지난 일을 설명할 방법이었다.
‘태풍만 아니었다면 좀 더 빨리 이 소식을 듣고 일정을 늦췄을 텐데……. 그럼 걔네들이 먼저 도착해서 용건을 해결한 다음 사현이만 남겨 둔 채 돌아가지 않았을까. 아니, 이제 와서 이런 걸 생각해 봤자 소용이 없나. 애초에 여기까지 왜 내려온 거지? 이 시기에 주인공이 하오문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었나?’
머릿속이 하도 복잡해서 사영이가 제 손에 고삐를 쥐여 주는 것도, 몸이 알아서 밤색 준마의 등에 올라타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가만히 초윤의 생각이 끝나길 기다리던 사영이 결국 슬쩍 말을 붙이고 나서야 언제부턴가 안장에 앉아 말을 몰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말 같은 이동 수단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초윤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안장 밑으로 꿈틀거리는 척추뼈와 근육이 뒤늦게 어색했다. 몸은 말을 무슨 자동차처럼 당연한 탈것으로 여겨 버렸지만 승마 한 번 배워 본 적 없는 현대인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한 몸과 생소한 정신의 차이로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와는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상념에 잠겨 듣지 못했다. 무어라 하였느냐.”
“……역시 번거로울 것 같으시다면 손을 쓰겠습니다. 하오문은 문주의 취향을 따라 크고 복작복작하니 스승님과 마주치지 못하도록 지낼 곳을 분리하는 것이야 쉬워요. 아니,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내보낼게요. 좋은 집 자식들이 언제까지고 눌어붙어 있을 수 있겠어요? 분명 내공 단련에 도움이 되는 영약 좀 찾아 달라고 애걸복걸하러 왔을 거예요.”
그리고 임사현 그 자식도 아주 두들겨 패 줄 거예요. 상덕과 영주의 무능한 놈들도 전부 다!
사영이가 꽉 쥔 손을 들며 다짐하듯 말했다. 이전의 활달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 같아 괜히 기특하고 미안했다. 한숨처럼 웃고 고개를 돌리자 능숙하게 말을 몰며 나란히 걷고 있는 천오가 보였다.
분명 얘도 승마는 아주 어렸을 때가 아니라면 해 본 적 없을 텐데. 초윤의 허리나 등자를 밟은 발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으로 보아 스승의 자세를 눈대중으로 따라 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몸으로 하는 활동이라면 전부 금방 습득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현대에 태어났다면 우리 애들 모두 금메달 몇 개씩은 목에 걸고 있는 건데……. 허구한 날 원한 관계만 쌓이는 무림인의 삶보단 그쪽이 훨씬 낫잖아.’
밝은 상상으로 애써 기분을 회복한 초윤은 순간 괜찮은 타개책을 퍼뜩 떠올렸다. 사영의 제안과 현 상황을 적절히 버무린다면 최악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네가 속해 있는 문파의 위신을 해치지 않도록 귀빈 대접은 소홀하지 않도록 하되 머물 곳은 조금만 멀리 떨어뜨려 주렴. 나는 몰라도 그들이 천오와 독대하는 일은 피하고 싶다.”
“네, 스승님! 천아와 그 형제가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거지요? 그럼 그냥 사제한테 방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스승님께서 말씀하신다면 분명 들을 텐데.”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길 바라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아니, 명색이 유람인데 한 명만 홀로 둘 순 없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나 역시 함께 자중하겠다.”
잘 생각해 보니 모용서의 칼부림을 막았을 때 초윤의 얼굴은 들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곧장 파고들어 제압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철저히 기절시켜 두었으니 천오만 잘 숨긴다면 어떻게든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오는 조만간 무림에서 복수행을 시작할 테고, 주인공은 천오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언젠가는 분명 대립이 일어날 게 분명했지만 적어도 당장의 유혈 사태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천오보다 내가 먼저 걔네들을 만나서 ‘지금의 천오는 네가 알던 그 천오와 다르다’라고 얘기를 하긴 해야 할 텐데…….
역시 신비로운 기인(奇人)이 되는 수밖에 없나? ‘세상이 이렇게 망할 수도 있다’고 예지하는 꿈을 꿨고, 그대로 별을 따라 가 봤더니 이 아이를 잘 키워서 재해를 막아 보라고 말하듯이 천오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고 할까? 이건 너무 억지스럽나? 하지만 이런 것 말고는 내가 ‘주인공이 아는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는데?
초윤은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하느라 양쪽의 아이 둘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현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 말고는 마땅한 타개책이 나오지 않아 쉽게 생각을 멈추지도 못했다.
걱정을 한가득 짊어진 초윤의 말이 천천히 새 도시로 나아갔다. 이국의 사치품부터 자국의 귀물까지 없는 것이 없다는 하오문의 무역 도시, 광주시였다.
◇
우주는 무(無)에서 시작하여 묘일(妙一)을 거쳐 삼원(三元)으로 나누어지고, 이것이 다시 삼기(三氣)로 변하면 그로부터 삼재(三才)가 나와 만물이 갖추어진다고 믿는 것이 바로 도교의 천지 창조, 삼동종원(三洞宗元)이다. 이 중 기원이 되는 삼원의 화생(化生)이 바로 삼보군(三寶君)이며, 삼보군은 다시 천보군(天寶君)과 영보군(靈寶君), 신보군(神寶君)으로 나뉜다.
이렇듯 쉬이 걸 수 없는 드높은 이름을 통째로 칭한 첫 번째 대회에서 당당하게 우승하며 천보군이 보살피는 도(刀), 천보도라는 별호를 얻은 젊은 무림인은 지난 몇 년 동안 온 강호를 뜨겁게 달군 화젯거리였다.
결패도 팽치정이 오로지 자질만 보고 혈육이 아님에도 제자로 들여 가르친 청년, 이제껏 이름 한 줄 날리지 않았으나 그간 유세 좀 부렸다는 후기지수들을 무섭도록 제친 공전(空前)의 천재. 팽치정에게도 알릴 수 없는 비밀스러운 문파 출신에 어떠한 상처도 흉터 없이 낫는 신묘한 육체.
이런 휘황찬란한 배경에 더불어,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그의 성품을 겸손하고 순박하며 꾸준하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다니니 질릴 리 없었다. 천보도 임사현은 단연코 현 무림의 가장 큰 기대주이자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다.
그렇게 어딜 가든 관심 어린 눈길을 받고 추켜세워지는 사현은 지금…….
“나는 죽었다…….”
더할 나위 없이 망연자실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털레털레 걷던 사현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오늘로 몇 번째인지 모를 탄식을 중얼거렸다. 젖은 음색의 끝이 조금 떨리는 것을 보아하니 거의 울기 직전인 듯했다. 늘 밝고 예의 바른 덕분에 동행하는 모든 이들의 인기를 끌어모으는 사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도 다가가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한 사람만이 사현의 먹구름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가서 널찍한 등을 손바닥으로 짝 내리쳤다. 소리를 들은 모두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천하의 천보도 임사현이 도대체 왜 이렇게 죽상이야! 설마 네 누님이 친동생을 죽이기야 하겠어?”
“죽일 거야…… 진짜 죽일 거라고. 네가 우리 누나를 몰라서…… 하아.”
음울하게 중얼거리던 사현이 갑자기 제 얼굴을 마구 문지르더니 말을 걸어온 친우의 멱살을 확 잡아 흔들었다. 왜소한 체구는 아니지만 사현과 비교하면 한없이 작아 보이는 소년이 그의 손에 맥없이 흔들렸다.
“너…… 너 때문이잖아! 네가 방해해서 그런 거잖아! 어쩔 거야! 우리 누나가 어…… 어떤 사람인데. 우리 누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데!”
“그럼 아예 그 누님을 안 보면 안 돼?”
“도망가면 쫓아와서 죽일 거라고!”
왁 하고 소리 지르듯 언성을 높인 사현이 기어코 우는소리를 내며 다시금 얼굴을 감쌌다. 솥뚜껑 같은 손에 흔들려 주면서도 경박하게 웃고 있던 모용서가 그제야 심각성을 체감하고 멋쩍은 표정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변명을 했다.
“그렇지만 매번 네 누님이라면 그렇게 질색을 하면서 이번에는 기어코 광동성에 가려고 하니까 궁금해지잖아.”
“……그럼 소가주님은 왜 따라오시는 거야.”
“우리 형님이야 나를 엄청 아껴서 걱정되니까 같이 오는 거고.”
“전서구는 왜 못 보내게 한 거야…….”
“말하고 가면 분명 동네방네 떠들면서 제멋대로 해석할 인간들이 많으니까 하오문 측에 실례라고 생각했지.”
“솔직하게 말하면?”
“기왕이면 깜짝 놀래 주는 편이 재밌으니까?”
“허어엉.”
내가 왜 너 같은 걸……. 사현이 흐느꼈다. 그 말대로, 지금 사현의 목숨은 저 모용세가의 골칫덩이 막내 도련님의 변덕 때문에 경각에 달해 있었다.
사현은 스승에게 편지를 써도 세 줄을 넘지 않았고, 누나인 사영에게 쓰는 편지는 앞뒤 인사말도 없이 용건만 딱 쓰고 마는 청년이었지만 적어도 해야 할 일, 하면 안 되는 일은 구분할 줄 알았다. 그리고 ‘미리 보고하지 않으면 누나 손에 큰일 난다’는 개념 정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강을 건너기 전 갑작스럽게 합류한 모용서와, 모용서를 따라 함께 오게 된 모용단과, 덩달아 커져 버린 규모의 귀향을 전달하기 위해 하오문의 지부에 들르려 했는데…… 도대체 무슨 변덕인 건지 모용서가 끈덕지게 들러붙어 대는 통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붓을 들라치면 칼끝으로 일으킨 장난스러운 바람에 종이가 날아갔고, 일행을 빠져나가면 어느 틈엔가 품속에 넣어 두었던 서신이 반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는 통에 말 몇 마리와 무사들을 대동한 행렬은 지체되는 일 없이 길을 따라 나아갔으며 사현은 얼떨떨하게 끌려가듯 동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광동성이었다.
임사현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