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한참 후 핼쑥해진 얼굴의 사현이 고개를 들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모용서가 은근슬쩍 사현의 등에 손을 얹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기에 도대체 누굴 만나려고 광동성까지 내려가는 건지 재깍재깍 말해 주면 오죽 좋아? 나는 호기심을 풀고, 너는 홀가분하게 홀몸으로 가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잖아?”
“……아냐, 그건 말 못 해.”
사현이 손등으로 코 밑을 훔치며 대답했다. 못 하는 걸 못 한다고 솔직히 대답하는 모양새가 우직하기 짝이 없었다. 손위 누이가 사현에게 배분되었어야 할 눈치까지 모조리 끌어안고 태어나 버린 탓일까. 사현은 어느새 둘도 없는 친우의 웃음기 담긴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엔 비수가 서려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용서는 다시금 경박하게 웃으며 사현의 팔에 매달렸다. 고뇌와 근심이 가득한 사현이 작게 훌쩍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도착하면 나하고 형님이 네 누님께 잘 얘기해 볼게. 전부 다 내가 방해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해명하면 되잖아?”
“…….”
“선물도 잔뜩 챙겨 왔다니까? 거 누님 드린다고 쌍봉옥잠에 두줄금채에…….”
“우리 누나 그런 거 잘 안 해.”
“……현물화하기 좋은 요녕성 특산 월장석에 금강석에…….”
요녕성에서부터 사영에게 건넬 선물을 준비했다면 어딜 봐도 변덕이 아니라 계획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사현은 누나에게 매일같이 둔해 빠졌다고 욕을 들어 먹으면서도 이런 쪽의 꾀는 키우지 못했고, 이번에도 역시 이상한 점 하나 찾지 못한 채 토라진 얼굴로 입만 다물었다.
어쨌든 이대로 두면 금방 풀릴 게 자명했다. 4년이라는 시간 내내 친분을 쌓으며 임사현이란 인간의 두께를 모두 파악했다고 자부하는 모용서는 한결 편한 얼굴로 힐끗 눈길을 돌렸다. 그 끝엔 이 소동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 위에 앉아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현명한 눈으로 모용서를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복형과 모종의 신호를 주고받은 모용서는 사현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정말이지 자신에겐 과분할 정도로 착하고 강직한 벗이었다.
◇
하오문은 현대로 치환하자면 일종의 거대한 심부름센터나 마찬가지인 문파였다. 객잔이나 기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어 암암리에 소문을 수집하거나 퍼트리는 일, 혹은 무언가를 배달해 주거나 훔쳐 오는 일을 주로 했다.
무림인들에겐 무시받기 일쑤인 민간인들의 비중이 큰 탓에 핍박당하기 일쑤였고, 무공 역시 여기저기서 잡다하게 긁어모은 삼류가 대부분이라서 제대로 된 문파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쓸데없이 덩치만 컸지 일류 무인은 한 줌도 찾아보기 힘든 길바닥 인생의 집합소가 바로 하오문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자그마치 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일 뿐, 현 무림에 이르러서 하오문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어느 날 돌연히 나타나 문주 자리를 꿰찬 희는 상업에 기발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하오문에 상인의 가입을 허가했고, 표국을 설립했다. 어디서 끌어온 건지 알 수 없는 자금력과 무력 집단을 이용해 파죽지세로 온 중원을 연결했으며 교역항에 터를 잡고 무역을 틀어잡았다.
어떤 사회든 돈이 없으면 원만히 돌아갈 수 없었다. 금전은 절대적이고 공통적인 권력이었다. 중원에 새로운 물을 들이붓듯 바다 건너 자금을 끌어오는 희와 하오문은 이제 명실상부 필수 불가결한 집단이었다.
그렇게 되었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하오문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리란 건 자명했다. 이 말인즉슨 하오문은 수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도록 거대한 규모로 설계되었단 뜻이었고, 원작에서도 웅장하다는 묘사가 붙었으니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는데…….
이건…… 그냥 궁 아닌가?
물론 황제에게 불경한 짓이 될 테니 진짜 황궁보단 훨씬 작을 게 분명했지만, 그 황궁조차 제대로 본 적 없는 초윤은 다분히 객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 가출한 황자는 궁궐 밖에 자신만의 궁을 또 세운 듯했다.
“죄송해요, 스승님. 저와 함께 들어가시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실 텐데,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 임의로 이쪽에 모셔 왔어요. 가장 인적 없는 문이긴 한데 좀 심하게 볼품없지요?”
“괘념치 말거라. 이만으로 족하다.”
아니야, 사영아. 네 판단은 정확했어. 단체 관광객도 아니고 사람들 우글거리는 그 으리으리한 대문을 뭐 하러 뚫고 들어가니. 선생님은 지금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하오문의 건물만 봐도 지금 기함이 나온단다.
초윤은 속으로 아우성을 삼키며 천오와 함께 고분고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뒤따라 들어온 사영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말고삐를 맡기고 마구간으로 돌려보냈다. 간소한 모란꽃 매듭을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을 보니 같은 하오문도인 것 같았다.
일련의 뒤처리를 마친 사영이 쉴 새 없이 종알종알 떠들며 초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다 큰 얼굴에 묻어 있는 순수한 자부심이 귀엽고 기특했다.
“스승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아주 어렸을 때 광동성에 살았는데, 그때도 하오문은 별천지라는 소문이 돌긴 했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장장 다섯 배나 더 넓어졌다고 하지 뭐예요? 그런데 사람이 정말 많이 필요하긴 할 것 같더라고요. 매일같이 이거 찾아 달라 저거 알려 달라 문주님을 뵙게 해 달라 난리 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세요. 저건 하오문도 전용 숙소인데 엄청 크지요? 저 건물이 겉보기에만 예쁘고 고급스럽지 그냥 야근 지옥이에요. 아침마다 웬 강시들이 걸어 다닌다니까요. 일만 그냥 주야장천……. 아, 스승님은 따로 지어진 귀빈용 별채에서 지내시면 돼요. 문주님이 그곳은 오롯이 스승님 전용으로만 비워 두겠다고 했어요.”
“잠시 머물다 갈 요량이니 그렇게까지 마음 쓸 필요는 없다.”
“스승님만큼 귀한 손님은 없어요. 백협맹주가 와도 거긴 못 내 준다구요.”
못 본 사이에 넉살이 더 늘었나. 원래도 깜찍한 말을 잘하던 아이였는데, 사근사근한 희와 오래 어울려서 그런지 초윤을 자꾸만 껌뻑 넘어가게 만들었다. 괜한 낭비는 하지 말라고 내뱉는 입과는 다르게 행복감에 절어 버린 초윤은 아까부터 천오가 아무 말도 없다는 사실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속으로 주접을 떨기 바빴다.
“저는 문주님이 머무르는 건물에서 지내고 있지만 스승님께서 체류하고 계신 동안에는 함께 별채에 있을 생각이에요. 물론 스승님이 허락해 주신다면요.”
“좋을 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제가 직접 정리하면서 봤는데 방이 모자라진 않을 거예요. 아, 그리고 이거요. 잠시 손을 내어 주세요. 천아도 이리 와.”
사영이 품에서 매듭 두 개를 꺼냈다. 사영의 허리에 달려 있는 것과 비슷하지만 가운데에 호박을 꿴 모란 모양이었다.
사영은 면사 너머 내밀어진 초윤의 손목에 매듭을 묶어 팔찌로 만들어 주며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만 있으시다면 지금처럼 죽립을 쓴 채 하오문 내부를 마음껏 다니셔도 아무도 스승님을 의아하게 보지 않을 거예요. 장서각도, 보물전도 다 들어가셔도 돼요. 문주님이 수집벽이 있는 편이라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실 거예요.”
“그런 곳을 함부로 열어도 되는 것이냐.”
“문주님은 오히려 스승님께서 무언가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걸요? 갖고 싶은 게 보이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아니, 그냥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근데 이렇게 하면 면사에 가려져서 매듭이 잘 안 보이겠네요. 어떡하지. 죽립의 가장자리에 다시 달아 드릴까요?”
“됐다.”
초윤은 간결하게 대답한 뒤 손을 거두었다. 제자가 직접 만든 선물을 손목에 채워 준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감이 하늘을 찔렀다. 닳아 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평생 하고 다닐 생각이었다.
겉으로는 냉갈령하기 그지없는 스승의 본심을 알고 있는지, 사영은 손에 들고 있던 또 하나의 매듭을 대충 천오에게 내밀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을 질문했다.
“허리에 찬 그건 네 검이야?”
“예, 사저. 스승님께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딘가 낯익은데…….”
턱을 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천오의 검을 내려다보던 사영이 짤막한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이름이 뭐야?”
“백홍입니다.”
“빨간색은 안 보이는데 검신이 다른 색인가? 보여 줄 수 있어?”
“붉은 홍이 아니라 무지개의 홍입니다. 보여 드릴 순 있지만 야외가 아닌 실내였으면 합니다.”
“백홍관일의 백홍? 하하, 천은(天恩) 아니면 천재(天災)라니 너답다.”
시원시원하지만 묘하게 냉소적으로 웃은 사영이 획 돌아서더니 활달하게 스승을 이끌었다. 그동안 몇 년에 걸쳐 자신이 보낸 산더미 같은 약재와 이번에 챙겨 온 영약은 당연하다는 듯 세지 않은 채, 행여나 사영이 자신은 비슷한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할까 봐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초윤이 사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천오는 잠시 멈춰 선 채 한 손으로 검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시선은 느리게 멀어지는 제 사저와 스승의 뒷모습을 향했다.
스승이 이 몸의 피를 닦아 주었을 때부터, 불길을 등지고 돌아왔을 때부터, 품었던 희끄무레한 의문이 사저와 재회했을 때부터, 스승의 비밀을 들었을 때부터, 검을 받았을 때부터 명확한 형태가 되어 자꾸만 서문천오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과연 그에게 특별한가?
앞서 나아가던 스승이 어째서 따라오지 않냐는 듯 천오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에 속절없이 그 뒤를 따르며, 천오는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날것의 감정을 자꾸만 삼켰다.
아직은 자신이 없었다. 어떠한 것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