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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23)화 (123/257)

123화

사영이를 따라 도착한 별채는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호화로움을 자랑하는 하오문의 건물을 먼저 본 덕에 특별히 지어진 귀빈용 별채 또한 화려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어른의 키 높이 이상으로 지어진 담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보인 공간은 생각보다 소박하고 아담했다.

무엇보다 가운데에 배치한 정원의 양식은 이제껏 거쳐 온 모든 하오문의 별저와 비교하면 명백히 달랐다. 깊고 넓은 호수 대신 조그만 연못을 만들고 주위로 꽃을 심어서 수면에 꽃잎이 떨어지게 만들어 둔 것도, 식물과 묘목을 일절 다듬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게 놓아둔 것도 이 시기의 보편적인 조원술(造園術)과 굉장히 달랐지만 무엇보다 ‘돌덩이’가 없었다. 그게 가장 좋았다.

선경(仙境) 속에서 사는 기분을 내기 위해 거대한 돌을 곳곳에 배치해서 가짜 산을 연출하는 가산(假山)은 이 무협 세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정원 기법이었다. 이때 쓰이는 태호석이라는 돌은 금에 비견할 정도로 가격이 높았고, 가산이 많을수록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 수 있어 이것만 사 모으다가 패가망신한 졸부 집안의 이야기는 객잔에서도 종종 들려오곤 했다.

시대상이 뒤죽박죽 섞여 낭만만 남아 있는 무협지 속 가상의 세계이긴 하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과거를 따랐으니 이런 풍경이 당연한 듯했다.

그런 마땅한 상식을 배제한 채, 가장 귀한 손님 전용이라는 별채를 얼핏 성의 없어 보이게 ‘꾸며 놓은’ 데에서 도리어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초윤은 슬금슬금 사라지는 부담감을 느끼며 속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정말이지 이길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가요, 스승님? 마음에 드시나요? 이름은 해무당(海霧堂)이에요. 방 안으로 들어가시면 창문 바깥으로 바다와 이어진 강이 보이는데, 새벽에는 그 위에 안개가 짙게 끼거든요. 굉장히 예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지실지도 몰라요.”

“그래.”

“그럼 잠시만 편히 기다려 주세요. 전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정리한 뒤에 돌아올게요. 이곳에 있는 모든 게 스승님 물건이니 쓰시는 데 주저하지 마시고, 또 제 얼굴을 보았으니 됐다고 휙 가셔도 안 돼요!”

“……알았다. 기다리마.”

“진짜 얼른 일찍 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빠르게 말한 사영이가 바깥으로 달려 나가며 이쪽을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무뚝뚝한 몸뚱이 때문에 마주 인사를 해 주진 못했지만 그대로 멀어질 때까지 한동안 보다가 몸을 돌렸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알음알음 모은 돈을 들고 해운대로 내려갔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예약한 호텔을 들어갈 때의 기대감과 비슷한 감정으로 가슴이 설렜다.

초윤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들려온 천오의 목소리가 한껏 들뜬 초윤의 정신을 한순간에 현실로 잡아끌었다.

“스승님, 제가 독대하면 안 되는 불청객이 누구입니까?”

큰일 났다. 천오가 하도 말이 없어서 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단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음으로 얘기할걸. 뒤늦게 후회해도 이미 입 밖으로 나간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요사이 천오는 초윤에게 질문하는 일이 익숙해진 덕분에 가르치는 지식 이외의 것을 물어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어진 듯했다.

산 하나를 간신히 얼렁뚱땅 넘겼더니 다른 하나가 또 떡하니 나타난 꼴이었다. 어찌 보자면 이것 또한 몇 년 전에 미뤄 둔 대가로 산더미처럼 불어나 버린 초윤의 업보였다.

초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윤에겐 임기응변으로 그럴싸하게 말을 맞추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택한 것은 일부의 사실이었다.

“하북에 있던 사현이 못 본 사이 친우를 만든 모양이다. 모용세가를 기억하느냐.”

“예. 주로 검을 쓰는 명문세가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심법과 검법, 수공(手功)의 완성도가 뛰어난 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녕에 터를 잡고 세를 불렸는데, 중원에서는 암암리에 배척을 받고 있지만 쉽사리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도 기억합니다.”

“이번 세대의 모용세가에는 소가주가 된 적장자 모용단, 그리고 그의 동생 모용서 둘밖에 없다. 그들이 사현과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만.”

초윤은 죽립을 벗고 천오를 돌아보았다. 묶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등을 타고 풀어지며 넘실거렸다.

“4년 전 동관에서 마주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그자가 정말 모용세가의 일원이었던 겁니까?”

“그래.”

천오가 미간을 슬며시 찌푸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초윤은 이 발설의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 가늠하다가 택도 없이 커지는 규모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느리게 정원을 걷자 착실하게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천오는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소년은 제게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마교와 관련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저를 ‘주천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왜 일찍이 얘기하지 않고?”

“제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인가 싶어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맞다. 주천오의 주씨도 얘 아빠 성이고, 마교와 관련 있는 것도 얘 아빠인데 정작 얘는 자기 아빠한테 관심이 없었지!

그렇지만 자기한테 칼부림한 사람은 좀 신경 써 주라! 이런 것에도 무심하게 굴면 어떡해!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을 들은 초윤은 이마로 올라가려는 손을 애써 참았다. 자신이 천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 굉장히 많은 것처럼, 천오 또한 초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초윤이 속으로 곡소리를 내고 있든 말든 천오의 목소리는 담담히 이어졌다.

“마교가 저를 키웠으리라 당연하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이전처럼 마찰이 벌어질 것을 염려하시기 때문에 그자와 제가 마주치는 일을 꺼리시는 겁니까?”

“그래, 그 인물과 분란을 일으켜 봤자 네게는 하등 좋을 것이 없다.”

“이곳에서 체류하는 동안 해무당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하신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만, 앞으로의 여정 내내 그자를 피하거나 숨어 다녀야 하는 겁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천오와 이야기를 나누자 초윤 속에 자리를 잡았던 무른 확신이 점차 단단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이 우연 같은 필연은 오래 묵혀 두었던 ‘할 일’을 이만 청산하라고 세계가 등을 떠민 결과인 듯했다.

산책로를 가로막고 있던 웃자란 식물이 몸을 뉘여 길을 터 주었다. 초윤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내가 직접 그 오해를 풀 생각이다. 너는 괜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 전까지만 자중하면 된다.”

“직접……이라면, 죽립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어 대면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지. 도리어 늦은 감이 있다.”

“…….”

잠시 아무런 말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찰나 멈추어 선 천오가 빠른 보폭으로 뒤늦게 다가와선 조금 다급한 듯 말했다.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스승님. 제가 하겠습니다.”

“네 일을 두고 내가 번거롭다 말한 적이 있더냐. 달갑지 않은 억측은 그만두어라.”

“하지만, 스승님. 애초에 얼토당토않은 오해 아닙니까. 제대로 설명을 한다면 그 무뢰한도 이번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네 말이 그 인사에게 닿았다면 네가 그 꼴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곳은 저잣거리의 뒷골목이었습니만, 이곳은 하오문입니다. 그자에게 동행이 있고 지위가 있다면 여기서 칼부터 뽑아 들진 않을 겁니다.”

“이리 끈질긴 이유가 있느냐.”

“스승님께서 그자를 반드시 만나야 할 이유가 없을 뿐입니다.”

아냐, 있어. 네가 ‘주천오’가 되었을 사람이란 사실은 나하고 걔밖에 모른다고. 무협지 주인공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가 뭔지 알아? ‘집요함’이야! 내가 타당한 이유를 붙여 납득시키지 않는다면 걔는 두고두고 널 죽이려 할 거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초윤은 한숨을 삼키고 되물었다.

“그 논리를 따르자면 너 역시 기어코 나를 막을 이유가 없다. 설득을 하고 싶다면 합리적인 근거를 들거라.”

“…….”

대답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천오가 이렇게까지 자신과 모용서의 대면을 싫어할 만한 까닭 또한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기자기한 산책로는 이미 끝나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얘가 선생님한테도 말하기 어려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싶었을 때.

소매를 헤치고 불쑥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천오는 초윤의 손등을 쥔 채 그대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까칠하고 단단하지만 투박하지 않은 손끝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부가 얇은 손가락 사이를 헤집고, 그 끝에 쥐여진 죽립을 넘겨받았다.

천오는 죽립의 가장자리에 달린 면사를 뒤로 넘긴 뒤 초윤에게 다시 가볍게 씌워 주었다. 몇 년 전까진 거의 매일같이 잡고 다니던 손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신 초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천오가 미처 스승을 마주하지 못했다.

새까만 눈을 내리깐 채 입술만 달싹이던 서문천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언컨대 초윤은 처음 목격하는 감정이었다.

“대면,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죽립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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