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당연한 말이지만 초윤은 천오가 이러는 까닭을 재깍 떠올리지 못했다. 어찌 보면 고집스러운 맹신이었고, 또 어찌 보면 필사적인 외면이었다. 복잡해진 스승의 속은 짐작도 못 한 채, 그저 솔직하게 속내를 표현하는 것만 배운 천오는 초윤의 면사 끝만 매만지며 애써 이를 설명하려 노력했다.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면 분명 성가시게 굴 것입니다. 특히나 그 모용서라는 소년은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니 어떤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제게 걸어온 시비고, 제가 얻게 된 오해입니다. 제가 직접 풀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완강한 아이던가? 아니, 고집스러운 면은 있었다만 초윤에게 내보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초윤이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여도 스승님께 무언가 뜻이 있으시겠지 생각하며 무던하게 넘어가던 사람이 서문천오였다.
애초에 죽립을 벗는 걸 걱정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초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천오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자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 주마.”
“……모용서에게도 도움을 주실 겁니까?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실 요량이십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더 벙찔 것도 없이 멍하니 천오를 올려다보던 초윤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학생은 선생님에게 독점욕 비슷한 걸 갖게 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갈설린도, 당운금도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특히 제갈설린은 직접 생혈을 내어 천형을 바꾸셨습니다. 제가 두망산을 내려가 독립을 했을 때 무심서에 새로이 들이실 제자를 찾으시는 겁니까?”
더는 안 되겠다. 초윤은 양손을 올려 불시에 손뼉을 쳤다. 손바닥 사이의 공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파열됐다.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던 천오가 퍼뜩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초윤은 천오의 양 뺨을 잡고 두 눈을 직시했다. 이제야 말을 들어 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생각이 깊은 건 좋지만 제 머리에 매몰되진 말아야지. 제대로 의중을 물어보지도 않고 앞서 나가지 말거라. 홀로 오해를 키우다 보면 결국 불화밖에 남지 않는다.”
“……예, 스승님.”
“내가 어린아이를 거둔 것은 사영이 처음이고, 네가 마지막이다. 행여나 예상치 못한 일로 다른 자를 돌보게 되더라도 너를 향할 정성을 떼어다 나눠 주는 것이 아니니 치기 어린 조급증은 버려라.”
“……명심하겠습니다.”
보통 선생님은 내 거야! 하고 주장할 시기는 유치원을 졸업하며 끝났겠지만 천오는 상황이 좀 달랐다. 말이 선생님이지, 십 년이 넘도록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가르쳤으면 거의 가족이 아닌가. 오히려 천오가 언젠가 헤어질 사이처럼 깍듯하게 굴었다면 더 서운했을 것 같았다.
겨우 스스로를 납득시킨 초윤은 한결 편해진 가슴으로 천오를 구슬렸다.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언어는 언제나처럼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그자가 상황을 따져 가며 판단하는 이였다면 저잣거리에서 대뜸 네게 칼을 들이대지도 않았겠지. 그에겐 너를 믿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내게도 그를 설득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예, 스승님.”
“어찌 된 영문인지 네게도 알려 주고 싶다만, 아직은 이를 네게 상세히 설명할 길이 없어 나 역시도 고전하는 중이다. 다만 약조하마.”
초윤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말려 올라갔던 소맷자락이 내려오며 붕대 두른 팔뚝을 가렸다.
사실 천오가 하산하면 돌아갈 방도를 찾겠다 예정한 이상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제자의 불안 하나 다독여 주지 못해서야 선생님이라고, 보호자라고 자청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네 모든 질문에 답해 주겠다. 네게 의문 한 점 남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돕겠다. 그러니 지금은 나를 믿고 따라 다오.”
미래의 자신이 왜 이런 약속을 했는지 죽도록 후회하게 된다 해도 당장은 단언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공백의 시간이 지나갔다. 이슬 맺힌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발목을 스쳤고, 시든 꽃잎이 연못 위에 떨어지며 파문을 그렸다.
천오가 늘어트렸던 손을 들어 초윤의 옷소매를 잡았다. 그대로 손끝을 댄 채 올라와 어깨를 거치고 턱선에 닿았다. 조금 전의 생소한 접촉을 배워 익히려는 것처럼 스승의 얼굴을 감쌌다. 어른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것은 버릇없는 짓이라고 가르치지 않은 탓이다. 하릴없이 공경하라고만 이르는 유교적 교육 방침이 싫다며 구태여 가르치지 않은 초윤의 탓이다.
천오는 고개를 수그려 초윤과 이마를 맞댔다. 툭, 보다는 콩, 에 가까운 한순간이었다. 늘 새삼스럽게 깨달았지만, 이 아이의 목소리는 주위의 모든 소음을 꿰뚫고 파고들어선 초윤의 고막과 뇌를 직접 울리곤 했다.
“이전에 제게 바다 너머의 광경을 보여 주겠다 약조하신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스승님.”
모든 빚은 후에 돌려받겠다 공언하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새겨 넣듯 말한 천오가 한 걸음 물러났다. 이만 짐을 정리하고 약재의 상태를 살피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스승을 보고 자라 꼿꼿하게 세운 등이 일정한 속도로 작아졌다.
생고생을 하며 산맥을 넘었더니 망망대해가 펼쳐진 꼴이었다.
바다 너머의 광경을 보여 주겠다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
“굳이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버지? 어차피 하오문에 도착하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삐걱거리는 바퀴와 딱딱한 의자, 수발을 들어 주는 이 하나 없는 단출한 구성원과 식도락도 즐길 수 없는 급한 여정.
강서성 길안시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마차 속에서 참다못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화경의 경지에 도달할 일이 요원한 탓에 한서불침을 습득하지 못한 남궁호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을 붉혔다. 말소리를 낮추라고 몇 번이고 주의를 준 남궁옥리가 옆에서 인상을 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면 그 앞에 앉아 있는 중노년의 남궁영은 한없이 차분하고 깨끗한 모양새였다. 세어 버린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남궁영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말을 아껴라. 존제께서 듣고 계신다.”
“뭐가 뭔지는 알려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애초에 그 촌구석에는 왜 가는 겁니까? 아니, 필요한 게 있다면 그냥 사람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저와 옥리에 더불어 아버지까지 동행하셔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저―.”
호관의 눈동자가 힐끗 뒤를 향했다. 본능적으로 불안한 기운을 느낀 듯 뒤이어 나온 목소리는 훨씬 소심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저분? 저 사람은 도대체 왜 동행하시는 겁니까? 약선 초윤은 불귀 산맥에서야 찾아볼 수 있다는 기인 아닙니까. 그를 찾으러 섬서성 쪽으로 가지 않고요.”
남궁영의 얼굴이 한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형형한 눈은 날 선 칼처럼 어리석은 아들에게 꽂혔고, 기세에 눌린 호관은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남궁영은 곧 한숨을 푹 쉰 뒤 타이르듯 말했다.
“먼저, 존제께는 존칭을 붙여라. 네 눈이 장식에 불과하단 건 알고 있으나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분이시다. 세가의 명운이 달려 있으니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아, 알겠습니다.”
“번거로운 동행을 자처하신 까닭은 나 역시도 모르겠지만, 그리 말씀하신 이상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다. 너희들의 존재로 그분을 가리기 위함이니 쓸데없는 의문도 갖지 말거라.”
“…….”
정체 모를 꼬맹이를 숨기기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다니. 무림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떠받들리며 살아온 형제의 자존심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상대는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였기에 속에서 아무리 불울이 치밀어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여기서 동생인 남궁옥리의 영리한 머리가 빛을 발했다. 옥리는 순종적인 얼굴로 조심스럽게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간 언제고 존제께 또 다른 실례를 범할지도 모릅니다. 차음막을 믿지 못하시는 것을 알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하교해 주실 순 없습니까?”
그래, 내 말이 그거야! 호관이 주먹을 꾹 쥐었다. 도대체가 고분고분 말을 들어 먹는 일이 없는 두 아들을 보던 남궁영이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막아 둔 창문 너머를 잠시 응시했다. 백협맹주에 걸맞은 실력을 지닌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영은 뒤따르는 마차의 안정적인 바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남궁영이 입을 열었다. 옥리는 재촉하려는 형의 허벅지를 꼬집던 손을 놓고 아버지의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은영암제, 홍주귀제, 광천마제……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전부 무림을 피바다로 만든 역천마인들 아닙니까. 특히나 광천마제는 고작 백오십 년 전에 혈사를 일으킨 죄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무림은 대동단결하여 맞서 싸웠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마교와 백협맹의 대립 체제다.”
어지간한 무림인이라면 전부 알고 있는 역사였다. 옥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허황되다 느껴질 정도로 믿기지 않는 진실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