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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25)화 (125/257)

125화

“정확히 말하자면, 무림을 대동단결시키기 위해 그분들께서 나오신 것이다.”

“예?”

단박에 알아듣지 못해 인상을 찌푸리는 남궁호관과는 다르게, 남궁옥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옥리는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초췌한 두 손을 부여잡고 가만히 내려다보며 방금 들은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림의 근본을 이루는 역사가 모조리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무림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 이들이, 사실은 무림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 혈겁을 일으켰다는 겁니까?”

“애당초 무림이라는 세계는 기형적이다. 그저 훌륭한 무공과 이를 배우는 수련생들만이 있던 초기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게 바뀌었지.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온종일 제 몸뚱이 하나 단련하는 것밖에 없는 이들이 이제 와선 중원의 금력을 쥐고, 황제와 조약을 맺은 단체로서 면죄부를 얻고, 나아가 민생까지 파고들어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는데 여파가 없을 수 있겠느냐.”

수백 년 전, 많은 전쟁에서 활약한 무림인들은 그렇게 갖게 된 권력과 명성으로 각자의 단체를 세웠다. 처음에는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가르쳐 주기 위해 설립된 문파와, 자신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지어진 세가에 불과했지만 몇 세기가 흐르며 점점 상황이 달라졌다. 전체적인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면서 더 이상 방문객들의 시줏돈과 하사받은 전답의 소출을 가지고는 먹고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정파에 속한 이들은 대책을 찾아야만 했고, 이제 와선 위세 좀 부린다는 문파치고 지역의 상권에 손대지 않는 곳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림인은 무공을 배운 사람이지 경영을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은 전부 약한 자들의 피해로 끝날 뿐이었다.

“‘무림’은 무른 과일처럼 썩기 쉽고, 웃자란 나무처럼 꺾이기 쉬운 숲이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주기적으로 가지치기와 솎아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과열된 분위기, 과잉한 인원의 윗물을 떠내 버려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도중에 막강하고 공통된 적이 있다면 추잡스러운 아귀다툼을 할 여유도 없지 않겠느냐.”

“그런…….”

그저 뒤따라오는 마차에 타고 있는 이가 누군지 궁금했을 뿐인데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남궁옥리의 머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오가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형님이 부러울 정도였다.

말 한 마디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던 옥리는 퍼뜩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마교는요? 마교 또한 무림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입니까?”

“마교라.”

개중에서도 영리한 면모가 돋보여 기대를 걸었던 아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는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던 남궁영이 허허 웃었다. 저 멀리 신강의 넓은 땅에 있을 십만 마인들이 안쓰럽다는 듯, 혹은 가소롭다는 듯.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창설된 군(軍)인지도 모른 채 허울뿐인 우두머리가 신이라고 믿으며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지. 제깟 것들이 아무리 아등바등 교주 자리에 올라서 봤자 새로운 ‘암존’이 등극하신다면 그분이 바라시는 대로 죽고 죽이는 병기가 될 뿐이다.”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납득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저분과 마주친 이상 멍청한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도록 자중하라고 한 말이지.”

옥리는 부친의 매몰찬 언사를 듣고도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공백을 두고 꾸준히 나타나는 전설적인 대마인…… 그중에서도 호에 제(帝)가 붙는 이들은 전부 ‘무림을 위해’ 그 시산혈해를 자아냈다는 말인가?

‘암존’의 등극이라니, 암존은 150년 전 광천마제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림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이르는 단어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옥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본래 주제로 돌아왔다. 흐름을 끊어서 겉핥기 정도로만 알고 넘어가려는 속셈이었다.

“그렇다면 존제께서는…… 새로운 암존이신 겁니까?”

“아니.”

남궁영이 허리를 펴고 자세를 경건히 고쳐 앉았다. 마치 입에 담는 것조차 망극한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한다는 듯이.

“우리가 모시는 분은 광천마제 초월량, 마지막이자 영원한 암존이 되실 분이다.”

“……예?”

아버지의 묵직한 음성과 함께 남궁옥리는 뒷목을 서늘하게 짓누르는 중압감을 느꼈다. 끼어들 틈이 없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남궁호관도 이 답변에는 속절없이 경악해야만 했다.

남궁옥리가 첫 질문을 던질 때부터 이미 도망칠 길은 없었다. 저 소년은 도대체 누구냐, 이 간단한 물음이 모든 진실을 관통하는 핵심이었다. 이젠 꼼짝없이 앉아 감당하기 버거운 진상을 듣고, 본래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맛보아야 했다.

목구멍에서 볼품없는 신음이 나왔다. 남궁옥리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되물었다.

“……과, 광천마제는 죽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그분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 당시 정파의 고강한 인물들이 모조리 모여 대항했어도 간신히 봉인하는 데 불과했을 정도다. 나는 갇혀 계신 그분의 혼에게 임시적인 육체를 드렸고, 이제부터 온전한 모습으로 부활시켜 드릴 생각이다. 작금 무림의 행태가 꽤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너희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어떻게…….”

백오십 년 전의 인물인 광천마제가 도대체 어떻게 이 시대에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요괴 모음집 같은 환상기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허황된 소리였지만 동시에 백협맹주 남궁영의 발언이었다. 자신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도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광동성으로 향하는 허름한 마차에 탄 지금도 생생한 현실이었다.

반 토막 난 옥리의 물음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남궁영이 가려진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옮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고로 찾고 싶은 게 있다면 광동성으로 가라고 했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없는 게 없다는 하오문으로 가라고 했다.

“그분의 바싹 마른 몸을 적셔 드릴 방도를 찾아야지. 죽은 자도 벌떡 일으킨다는 영약을 찾아 드려야지.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너희들은 정말 좋은 핑계가 아니더냐…….”

손바닥만 한 찻잔 겉면에 유약 바른 오채(五彩)가 선명히 빛났다. 갈색 찻물에 파문이 일며 그 위로 비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초윤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 자신의 겉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쌉싸래한 한 모금을 넘겼다. 목을 축이고 입 안을 채우는 향이 달갑게 느껴졌다.

“검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사실 뒤늦게 황 야장의 소식을 듣곤 많이 걱정했어요. 고작 한 달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날 건 또 뭐람.”

“…….”

마검이 되기 직전이었던 검은 솔직히 아직도 좀 찝찝했지만 눈앞의 모습을 보니 이만 우려를 접어도 될 듯했다. 백홍관일 역리일식은 다행히 천오와 그림같이 잘 맞아떨어졌다.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마치 오래전부터 저 검만 써 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미성년자를 막 벗어나선 처음으로 진검을 잡아 보는 자리라니, 혼자 두기엔 도무지 안심할 수 없어 의자를 갖고 바깥으로 나왔다. 제 검에 베일 단계는 진즉 지나고도 남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초윤은 천오가 식칼만 잡아도 가슴을 졸이는 인간이었다. 3할의 설렘, 7할의 불안을 지닌 채 점차 검에 익숙해지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자 한 번쯤은 꼭 만나야 했던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왔다. 정확히는 호위 무사의 발을 빌려 찾아온 하오문주 희였다.

“그런데 저 같은 외부인이 이 자리에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비전 무공을 함부로 보여 주길 싫어하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보셔도 아무것도 얻으실 수 없을 테니 괜찮습니다.”

“그건 그런 것 같아요. 눈은 나름 자부했는데 도저히 모르겠네요.”

나란히 앉은 희가 명랑하게 웃었다. 초윤은 약간 뿌듯한 마음으로 찻잔을 마저 비운 뒤 내려놓았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이 말인즉슨 초윤의 무공이 독특하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천오가 이를 훌륭히 체득했으며, <귀환영웅>의 만능열쇠 취급을 받았던 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단 뜻이다! 진검을 갖게 된 지 얼마 안 된 아이인데도 그저 완벽하단 뜻이다!

현대적 윤리관을 지닌 탓에 성인이 되기 전까진 절대 진검을 줄 수 없단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내심 자신의 고집 때문에 또래 아이들에게 뒤처지는 게 아닐까 고민했던 초윤의 속이 안정을 되찾았다. 천하의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 군자삼락 중 하나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빌린 거처가 쑥대밭이 되지 않도록 기세를 조절하며 초식을 순서대로 펼친 천오가 스승을 흘끔 돌아보았다. 초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늘어트렸던 검 끝이 이번에는 역순으로 되감기기 시작했다.

기이한 광채가 담긴 새파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가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조심스럽고 면구스럽게 들리는 목소리가 필연적으로 초윤의 신경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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