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사실은 약선 대협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매번 뵐 때마다 이렇게 되어 정말 면목이 없네요. 이번에는 명백히 제 실수예요.”
“무슨 일입니까?”
“그게…….”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던 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마냥 흐뭇하게만 앉아 있던 초윤의 속에서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체하던 것도 잠시, 희는 마음을 다잡은 듯 명료하게 말했다.
“과거 녹림왕이었던 백호철이 실종되었어요. 무공을 폐한 뒤 중경의 채석장에서 쭉 노역을 시켰는데, 얼마 전 절벽이 무너지는 사고로 그 밑에 깔렸다고 하더군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체를 확인했지만 기맥의 모양이 달랐어요. 그의 단전을 부순 여와가 직접 확인했으니 여지없는 사실이에요.”
“……누군가 그의 죽음을 조장하고 빼돌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어요.”
어리둥절한 건 초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지나가는 전투력 측정기였던 인물이 다시 등장한 것도 신기했지만, 그가 채석장의 만년 인부 신세로 전락했단 사실도 만만찮게 충격적이었다. 목숨만 간신히 건진 채 이야기에서 퇴장한 엑스트라들은 전부 책장 뒤에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건가 싶었다.
물론 백호철이 아직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기밀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림이 일절 파고들 수 없는 황실 소유의 채석장에서 온종일 감시를 하는 방법이 가장 적합한 것 같기는 한데…… 희는 이를 가능하게 만들 사람이기도 하고.
얼떨하게 이야기를 따라가는 찰나, 희의 본격적인 고민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백호철의 정체를 숨겨야 할 이들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화산파밖에 없어요. 하지만 제갈세가와 종남파에 치여서 섬서성 하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이들이 황실의 채석장에서 그런 흉계를 도모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하겠지요.”
썩을 대로 썩었다 해도 도교의 종파, 도사들의 집단이었다. 대부분 죄인이라고는 하나 민간인밖에 없는 노역장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하물며 바꿔치기할 타인의 시체를 준비해 던져 놓을 수 있을까. 이만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명백한 ‘악당’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소거법으로 남는 세력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지만…… 마교는 백호철이 딱히 필요 없다는 게 문제예요. 애초에 그들이라면 8년이나 지체하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이만한 일을 벌인 이유가…….
희가 찌푸린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거기까지 다녀오는 내내 어지간히 고민한 것 같았다. 초윤은 그를 보며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백호철’은 원작에서 주인공한테 처참히 지고 퇴장한 이후 다신 나오지 않은 캐릭터였다. 즉 정하윤이 모르는 ‘바뀐 스토리’의 영향으로 생긴 이변이었고, 초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근데 무공도 폐했다면서. 단전이랑 기맥은 한번 망가트리면 웬만한 기연이 아니고서야 재생시킬 수 없지 않나? 그런 기연은 보통 주인공이나 천오 같은 주역한테 가지 백호철처럼 애매한 위치의 등장인물한테 뜬금없이 주어지진 않잖아. 무공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역할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별달리 떠오르는 건 없었다. 백호철이 나중에 다시 나타나 봤자 이길 자신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조언을 하고 말 것도 없어 입을 다물고 있는데, 작은 한숨을 내쉰 희가 다시 한번 공손하게 사과를 건네 왔다.
“죄송해요, 약선 대협. 믿고 맡겨 주신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요. 이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진즉 멸구(滅口)했어야 했는데 말예요.”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72채의 녹림을 호령하던 이를 십 년 가까이 공짜 노동력으로 부린 것을 보아 희는 그의 죄에 걸맞은 벌을 내리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휘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렸을 뿐, 특별한 까닭이 있어 백호철을 맡긴 게 아닌 초윤으로선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사천당문과 백호철은 이미 초윤의 손을 떠난 사건이었으며 의미를 부여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희는 다시 한번 진심 어린 사과를 하려 했다. 툭하면 사죄하고 싶어 하는 제자를 십이 년 키운 경력으로 눈치 빠르게 이를 알아차린 초윤이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자신보다 머리 좋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로 고두사죄를 받고 있자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모용세가의 인물들이 사현과 함께 광동성에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늦어도 사흘이면 당도할 것 같아요.”
“그와 담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부탁이었다. 그동안 사영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도 보고,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더불어 이곳으로 오는 모용서와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하려던 순간 희가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꺼낸 것뿐이었다.
그런데 초윤의 말을 들은 희가 돌연 상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물론이에요. 서 공자만 데리고 오면 될까요? 아니면 소가주도 동행시킬까요?”
“……모용서로 충분합니다.”
“네, 대협. 그들이 도착하는 날에는 환영을 해야 할 테니, 다음 날 저녁에 전망이 좋은 곳을 내어 드릴게요. 그럼 이만 오붓한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손님의 거처에 더 오래 머무르지 않겠다는 듯 용건을 마친 희가 멀찍이 입구에 서 있던 여와를 손짓으로 불렀다. 호위 무사의 품에 익숙하게 안겨선 오랜 고뇌를 해결한 것처럼 산뜻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자세로 말씀드릴 내용은 아니지만, 대협.”
“…….”
“전 대협의 존재만으로도 가끔 안도감을 느끼곤 해요. 정말 감사해요.”
사죄받는 게 부담스럽다는 말은 취소다. 영문도 모른 채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다. 초윤은 희의 머릿속에 있는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면서도 알기 무서웠다. 지금 도대체 무슨 오해를 산 건지도 물어보기 두려웠다.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만 있자, 희는 공손한 인사를 남기고 해무당을 떠났다. 희에게 붙어 있던 골치 아픈 감각이 이쪽으로 옮겨 온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진검을 갈무리한 천오가 바로 앞에 있었다. 천오는 옆에 놓인 작은 상 위에 있던 찻주전자를 들어 올려 스승의 찻잔 위로 기울였다. 식어 가던 찻물이 어느새 폴폴 김을 내며 흘러나왔다.
초윤은 천오가 두 손으로 내미는 잔을 받아 한 모금 홀짝인 뒤 말했다.
“검은?”
“명검과 그렇지 않은 검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제 손에는 좋습니다. 손아귀에 잘 붙고, 다루기 쉬운 것 같습니다.”
“네 손에 좋다면 그것이 명검이지. 무겁진 않더냐.”
“적당합니다.”
오는 길에는 태풍이니 뭐니 여유가 없어 모처럼 새로 생긴 검을 시험할 기회가 없었는데, 몸에 맞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초윤은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걱정을 하며 빈 옆자리에 천오를 앉혔다. 자신의 제자는 이미 땡볕 아래서 몸을 움직여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경지에 다다랐지만 초윤에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하오문주와 내가 나눈 이야기는 들었느냐.”
“아니요, 스승님의 대화를 훔쳐 듣고 싶진 않았습니다.”
“사나흘 뒤에 그가 도착하는 모양이다. 저녁에 대면하게 될 것 같으니, 너는 그때 네 사형제와 함께 이곳에 머무르거라. 쌓인 회포도 풀 겸.”
“……예, 스승님.”
일찍이 합의를 본 사항이라서 그런지, 천오는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틀째 해무당으로 퇴근하는 사영이와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어른이 없을 때 아이들끼리만 논할 수 있는 주제도 있는 법.
본의 아니게 천오의 성장 환경을 좁은 범위로 제한하며 키우게 되었으니 몇 안 되는 교우 관계만큼은 깊고 단단하길 원했다. 사영이의 퉁명스러운 면은 사현이가 잘 누그러뜨려 주겠지. 사영이 사현을 두들겨 팰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초윤은 이대로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끝날 것 같다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익숙한 흡족함, 무뎌진 경계심이 두 귀를 막고 두 눈을 가렸다. 도망칠 길 없이 사방에서 조여 들어오는 파란을 알아챌 리 만무했다. 하릴없이 온화하고 위태로운 한낮이었다.
◇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대협께서 더 잘 아실 내용이잖아요. 겉핥기로 모은 지식을 어설프게 들이댔다간 무례가 됐을 게 뻔해요.”
호위 무사의 다리를 빌려 돌아온 희는 폭신한 보료에 앉아 그동안 쌓인 서신을 차례로 펼쳤다. 섬서성, 사천성, 하남성 할 것 없이 중원 전역에서 날아온 가지각색의 편지는 저마다 급한 정보를 담고 희의 눈에 들기만을 기다렸다.
“백호철을 빼돌린 게 광명교라면 그 자리에서 말씀해 주셨겠지요. 광명교의 행적은 나보다 약선 대협이 훨씬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을 테니까요. 그러지 않고 모용서만을 언급하셨다는 건, 배후에 도사린 게 광명교가 아니거나 내 도움이 필요 없으시다는 거예요.”
“……약선이 그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여와. 약선 대협이 그들을 모를 순 없어요.”
그게 어디 있더라……. 희가 흥얼거리며 곁에 세워 둔 서랍장을 뒤졌다. 빼곡한 서랍 중 하나를 뺀 희는 그 밑에 붙어 있는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두 손가락으로 여와에게 건넸다. 여와의 두 눈이 문서에 적혀 있는 오래된 글씨를 미처 다 훑기도 전에, 희가 확실한 근거를 요약해 알렸다.
“그는 거기서 자랐거든요. 약선 초윤의 기원이 바로 광명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