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올해로 열네 살이 된 모용세가의 막내 공자 모용서에겐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중 대부분은 무뢰한, 한량, 건달, 또라이, 미친개 등등 대체로 좋은 뜻은 아니었다. 모용서는 남들로선 평생 이유를 알지 못할 독기와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배다른 형을 제외하곤 아무도 공경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세 배는 나이 먹은 이들에게 겁도 없이 독설을 쏘아붙이는 일도 허다했으며 세가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은 내다 버린 채 늘 어딘가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렇게 체면과 염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모용서의 여유 덕분이었다. 모용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중역의 비밀은 물론이고 가끔은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었다. 이치를 벗어난 수많은 지식들은 모용서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복수심 가득한 목표가 없었다면 한없이 권태롭고 체념 가득한 생을 보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어린 주천오를 만난 뒤로 불붙은 위기감은 모용서를 끊임없이 일취월장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의 여유는 여전했다.
적어도 모용서는 자신이 여유롭고 태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의식하지 못한 사이 또 목구멍 너머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진정하자고, 왜 이렇게 긴장하냐고 스스로를 타박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술렁거렸다. 모용서는 인상을 찌푸리며 빈 찻잔에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투명한 연갈색 찻물이 쪼로록 나오다가 똑똑 방울져 떨어졌다. 주전자도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지르자 어쩐지 뻑뻑했다. 답지 않게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모용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불안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4년 전의 일이었던지라 스스로 알아채기도 어려웠다.
그 화살이 문제였다. 그게 쏘아져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용서는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은 반칙이나 다름없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옆에는 자신의 유능한 형님인 칠성검 모용단까지 있었다. 친우를 염탐하고 속여서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얼마든지 사과할 생각이었으며 앞으로의 만남도 주도권을 앗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그 화살 한 자루가 모용서의 평안을 깨트렸다.
도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하나뿐인 동생에게 흉흉한 촉이 달린 화살을 쏴?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그 미친 인간 앞에서 별말을 하지 않던 형님을 보고 나자 더욱 어이가 없었다. 모용단이 왜 입을 다물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서 또 기가 막혔다. 그걸로 끝났다면 또 몰라. 표백된 정신머리가 돌아오기도 전에 만나게 된 하오문주가 툭 던진 말들은 모용 형제의 가슴에 쐐기처럼 쿡 박혀 버렸다.
-천보도 소협이 참 순진하고 귀엽지요? 그런 성격인 덕분에 하오문에서도 각별히 사랑받고 있어요. 속이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담아 두지 않고 꾸준히 선량하게 사는 건 그러지 않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잖아요. 아, 저한테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제게 잘못하신 것도 아니고, 천보도 소협이라면 분명 뒤끝 없이 받아 주실 테니까요.
-…….
-저와 임 소저 이외에 만나 뵙고 싶은 이가 있으신 거지요?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어떻게 알아내셨는지는 임 소협에게 비밀로 해 주세요. 그는 지금도 충분히 자신을 탓하고 있으니까요.
하오문의 인간들에게 남을 갈구는 재능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멸받는 데엔 익숙해도 은근한 타박(심지어 자신이 잘못한 일이니 반박할 수도 없다)은 들어 본 적 없는 모용서와 평생 곱게만 자란 모용단은 그저 얌전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기대하던 만큼 으리으리한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그저 배만 채우고 있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와 임 소저 이외에 만나 뵙고 싶은 이가 있으신 거지요?
하오문주 희가 모용단과 모용서의 목적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상대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모용서는 이때부터 찌푸린 인상을 펴지 못했다.
모용서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사실 별로 없었다.
‘그’는 모용정과 모용단이 고독에 중독되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고, 이에 적절한 해독약을 만드는 법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모용단이 모든 기억을 되돌려 받은 시기를 딱 맞추어 요녕성으로 보냈다. 그에 더불어 어린 주천오와 기묘한 관계까지 맺은 듯했고, 이전 세계에서는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이를 천고기재로 키워 내 강호에 내보냈다.
이만큼만 정리해 보아도 답이 나왔다. ‘그’는 도저히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우습게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친우까지 속여 가며 행선지를 비밀로 하고 갑작스레 이곳에 들이닥쳤지만 어째선지 성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오문주는 지독하게 태연했고 모든 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둔한 임사현을 요녕성에 보낸 일부터 계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튼 곧 만나게 될 텐데 부족한 정보로 이런저런 예측을 해 봤자 득 될 건 없었다. 나이의 배를 뛰어넘는 연륜으로 간신히 머릿속을 진정시킨 모용서는 빈 찻주전자를 다과상의 구석으로 밀어 놓고 팔짱을 꼈다. 모셔 오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지 이각이 지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내심 없이 살아온 지 오래된 모용서는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기이한 소리를 듣게 된 건 바로 그때였다.
모용서는 어린 나이에 믿을 수 없는 성취를 이룩했다. 길바닥에서 마교의 개들에게 몰려 쓰레기처럼 죽은 이전 생보다도 높은 경지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남이 얻었어야 하는 행운을 가로채 스스로를 살찌웠으며, 이 시대에 나올 리 없었던 물건을 땅 밑에서 억지로 끄집어내 가며 부단히 노력했다. 모용서를 뛰어넘을 자는 이제껏 없었다. 이는 형님인 칠성검 모용단도, 나이 차 큰 친구인 천보도 임사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맹세컨대 모용서는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이나 호흡조차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며 나무 문틀과 문의 가장자리가 스치는 자그마한 소음만이 느닷없이 등 뒤에서 울렸다.
그리고 문지방을 넘는 순간부터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사박사박 내딛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옆을 스쳐 지나가자 하얀 옷자락이 모용서의 어깨에 닿았다. 오래 달인 약재 냄새가 코끝에 맴돌고, 입 안에선 쓰고 단 맛이 느껴졌다. 바람이 없어 풍경도 얌전한 밤에 화분 위 난초가 작게 흔들렸다. 모용서는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소맷자락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알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는 모용서의 오감을 모조리 자극했다. 이건 즉 무슨 뜻인가.
이자가 모용서의 모든 감각을 막았다는 소리다. 모용서가 알아채지도 못할 찰나에, 저 멀리서부터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오싹한 감정이 머리끝부터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식은땀이 어깻죽지를 적시고 전신의 근육은 온통 긴장했다. 모용서는 고개를 숙인 채 팔짱 낀 손으로 제 팔뚝을 꽉 쥐었다. 강자의 싸움은 눈만 마주쳐도 승패가 갈린다고 하던데, 모용서는 눈은커녕 모습을 보기도 전부터 패자였다.
작고 은밀한 응접실을 가득 채우는 고요한 존재감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형이 같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모용서는 무심코 모용단을 먼저 떠올렸다가, 곧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시선을 들자 주렴 뒤에 단정히 자리를 잡고 앉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대화를 트는 첫마디는 그의 몫이었다.
“제자가 둘씩이나 신세를 졌구나.”
모용서의 지난 수 년을 잡고 흔든 약선 초윤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단조로웠다.
◇
초윤이 떠난 뒤, 해무당의 분위기는 급격히 가라앉았다. 정확히는 사영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미동도 없던 사영에게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대체가…….”
왜? 어째서 이걸 지금 나와 사현이에게 알려 주신 거지? 알려 줘도 좋다니, 이 사실이 퍼지면 무림의 무식해 빠진 인간들이 어떻게 굴지 다 아시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이번에도 다른 속뜻이 있으신 건가? 하지만 나와 사현이가 반드시 이를 누설하리라 생각하진 않으셨을 텐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나름 많은 것을 배우고 보면서 성장했으니 이젠 스승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대로 된 착각인 듯했다.
이 중요한 정보를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말씀하셨을 리는 없고, 분명히 무언가 있는데…….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사영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살피던 사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누나,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을까? 스승님은 강하시잖아.”
그 말을 들은 사영이 양손을 내리고 눈을 돌려 천오를 바라보았다. 남매의 막내 사제는 스승님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자 남은 녹두전병을 조용히 먹고 있었다. 사영은 대답에 앞서 질문부터 꺼냈다.
“너는 스승님의 존체에 관한 걸 언제 알게 된 거야?”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알게 되었으니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듣게 된 건데?”
“…….”
천오가 내리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걸 말해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