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오로지 스승님을 위해 지은 해무당에 외부인을 들이는 일과 상대방이 가져왔을 정보의 중요성을 짧게 가늠하던 사영은 결국 한숨을 삼키며 물러났다. 적어도 직속상관인 희라면 이렇게 행동할 것 같았다.
“대외비인 건물이긴 하나 대협의 명성을 믿겠습니다. 신의를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단장님.”
“임 소저로 충분합니다.”
허락을 받은 모용단이 한 번 더 공손히 묵례한 뒤 조심스럽게 문턱을 넘었다. 모용단의 발이 해무당의 부지를 밟는 모습을 바라보던 사영은 못마땅한 듯 찡그러지는 눈살을 감추기 위해 매섭게 돌아 안쪽으로 걸어갔다. 따라오세요, 짧은 한마디는 발걸음을 뗀 뒤에야 흘러나왔다.
모용단은 이견 없이 사영을 따르며 사현과 천오와도 나지막이 인사를 나눴다. 떨떠름하거나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단은 방금 전까지 세 제자가 모여 앉아 있던 식탁에 도달했다. 스승이 앉아 있던 상석에 남이 앉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사영이 새 의자를 꺼내 사현의 옆에 두었고, 감사하다며 자리에 앉은 모용단은 그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잘못을 사과하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며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씀이신가요?”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혼자 직접적으로 임 소협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은 지금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예? 형님께서 제게요?”
얼떨결에 지목당한 사현이 어리벙벙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아니면 얘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했지. 광동성까지 내려왔으니 짧게 체류하진 않을 텐데. 시작부터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사영은 두 눈을 모용단에게 고정한 채 사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쉿,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모용단은 의자에서 몸을 조금 돌려 앉아선 사현에게 포권을 취하고, 지극히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래도록 찾아 헤맨 분을 만나 뵙고 싶다는 이기심 하나로 소협께 협잡을 부렸습니다. 이미 모든 일이 벌어졌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으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받아 달라는 억지는 부리지 않겠습니다.”
“혀, 형님?”
“오래도록 찾아 헤맨 분이라니요?”
사현이 당황하고, 사영은 물어보았지만 모용단은 고개를 아래로 기울인 채 잠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가 지나서야 자세를 바로 한 모용단이 고집스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놓으며 토로했다.
“8년 전, 약선 대협께서 하오문을 통해 저를 구명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대협의 소재에 관해 이렇다 할 실마리를 얻지 못했으나 우연히 임 소협과 그분의 관계를 각찰하게 되어 이곳까지 따랐습니다. 맹세컨대 악의는 없었지만 목적을 숨긴 것만으로도 소협을 속인 거나 진배없습니다.”
“……현아와 약선 대협의 관계를 각찰하게 되었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다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시선을 내리깐 채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모용단이 두 눈을 들어 사영을 바라보았다. 중원인보다 밝은 갈색의 홍채는 진중한 무게를 담고 있었다.
“단장님이시라면 일찍이 생각하셨을 겁니다. 동생분께서 이리 큰 인물이 되신 이상 출신을 감추는 데엔 한계가 있다고.”
“…….”
“이 소식이 하북팽가를 빠져나가진 못하도록 손을 써 두었습니다. 저와 아우 말고는 모르는 일이니 걱정을 접으셔도 좋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지 말라 하였지, ‘사현을 통해 알았다’는 것을 숨기라고 하진 않았다. 모용단은 머리 한구석에 희의 말을 떠올리며 슬며시 눈동자를 굴렸다. 불청객을 광동성까지 끌고 온 것과 더불어, 자신을 통해 스승의 정보가 새어 나갔단 사실을 알게 된 사현은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약간의 경고는 임사현의 허술한 경계심을 잘 자극할 수 있을 터. 몇 년에 걸쳐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 순진하고 우직한 청년은 제 누나의 반만이라도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를 확인한 모용단은 다시 사영을 보며 말했다.
“약선 대협께선 지금 제 아우와 독대하고 계실 겁니다. 저 역시도 동석하길 바랐지만 아우가 극구 반대하기에.”
“……약선 대협이 모용 공자와 담소를 나누실 이유가 있습니까?”
“모르시는군요. 대협께선 그와 일찍이 만나신 적이 있습니다.”
모르는 것, 모르는 것,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다. 하오문에 들어온 뒤로 늘 아는 위치에 있었던 사영은 답답한 마음에 입꼬리를 일그러트렸다. 이를 부러 모른 척 넘어간 모용단은 사영 옆에 앉아 있던 천오에게 눈길을 주었다. 약선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오가는 대화에 약간의 관심을 비치던 새까만 눈이 모용단을 마주 보았다.
“임 소협에 이어 사죄드리고 싶은 일입니다. 4년 전, 제 아우는 서문 소협을 만나 일방적으로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약선 대협께서 서제를 제압해 주셨기에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으나 명백한 이쪽의 과오입니다. 아우를 대신해 용서를 구합니다.”
“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벌떡 일어난 사영이 천오를 돌아보았다. 사영의 막내 사제는 언제나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사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저게 정말이야?”
“예, 그랬습니다.”
“4년 전이면 섬서성, 아까 말했던 그때 아니야?”
“맞습니다.”
그건 또 왜 말을 안 했어! 사영은 튀어 나가려던 노성을 애써 삼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덜 삭인 분이 어깨와 가슴을 연신 부풀렸다. 하지만 외부인이 보는 앞에서 제 사제를 쥐 잡듯 잡을 수도 없는 노릇. 사영은 잠시 화를 억누르고 모용서를 노려보았다. 한결 낮아진 음성이 살벌하게 흘러나왔다.
“……저 아이가 함께 이곳에 있는 시점에서 약선 대협과 저희 셋의 관계는 얼추 파악하셨을 겁니다. 스승님께서 직접 중재하셨다고 하니 제자 된 몸으로 더 얹을 말은 없지만, 이쯤 되면 칠성검 대협과 모용 공자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없는 핑계에 불과해도 괜찮으시다면, 아우의 해명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모쪼록 납득이 되는 이유였으면 합니다.”
모용서는 문지방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주된 대화 상대인 사영과 미안한 대상인 사현 외에는 큰 주의를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앉은 막내 사제의 손끝과 어깨를 매끄럽게 거슬러 올라가는 모용단의 시선을 눈앞에서 목도한 사영은 어렴풋이 직감했다.
모용단은 처음부터 서문천오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직접 걸음했다.
“아우가 그랬습니다. 서문 소협을 보자, 마치 그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앗아 간 것처럼 갑작스레 살의가 치밀고 들끓어 견딜 수 없었다고.”
◇
그건 그냥 제정신이 아닌 것 아닐까? 초윤은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물론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모용서는 마교의 수작에 가족을 잃었고, 그 뒤로 의지했던 인물도 떠나보냈으며 자신마저 살해당했다. 무력을 숭상하는 사이비 광신도 집단에게 인생을 통째로 휘어잡힌 꼴이니 그 꼭대기에 있던 주천오를 죽을 만치 증오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초윤은 천오와 관련된 일이라면 완벽히 객관적일 수 없었다. 초윤 또한 모용서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긴 했지만, 어쨌든 모용서는 초윤이 애지중지 반듯하게 키워 낸 아이를 무작정 공격해 상처를 입혔다. 그 일에 대한 사과도 미처 않은 채 ‘그를 보자마자 갑자기 이성을 잃을 정도의 살심이 솟구쳤습니다.’ 같은 말을 먼저 들었으니 불쑥 반발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초윤의 뒤틀린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용서는 묵묵히 이어 말했다.
“저잣거리를 지날 때부터 기이한 인력을 느낀 듯합니다. 홀린 듯이 그 객잔에 들어갔고, 서문천오를 맞닥뜨렸습니다.”
주인공 특유의 운명적 만남인가? 원래 주인공은 어딜 가든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잖아. 이럴 줄 알았다면 천오를 제갈세가에 데려갈 걸 그랬다. 초윤은 이전에 했던 후회를 똑같이 삼켰다. 상처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나았다지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던 당시를 생각하면 여전히 속상했다.
초윤은 모용단을 당장 데려오겠다는 모용서의 제안을 거절했다. 회귀에 관한 걸 알고 있다고 하니 딱히 숨기거나 돌려 말할 필요는 없다 해도 천재라는 모용단과 회귀의 당사자인 모용서를 함께 만나는 일은 부담이 컸다. 모용서 하나가 하는 이야기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이번에 처음 만나는 모용단까지 담합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듯했다. 차라리 모용서와 할 말을 다 하고 이를 소화한 뒤 시간을 내어 모용단을 따로 만나는 게 나았다.
그렇게 판단한 초윤은 천오에 관한 말을 꺼냈다. 어느 정도는 이해는 한다만 아무리 그래도 냅다 공격부터 하고 보는 건 과한 처사 아니냐.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쩔 뻔했고, 또 그 일이 더 큰 파장을 불러왔다면 어쩔 뻔했냐. 좋게 타일러 사과를 받아 내려 했지만 대뜸 돌아온 말이 저것이었다. ‘갑자기 이성을 잃을 정도의 살심이 솟구쳤다.’는 것.
당연스럽게도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윤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더 자세한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한 모용서는 살짝 조급한 마음으로 초윤을 납득시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