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확실히 저는 서문천오를, 아니, 주천오를 일찍이 제거하고 싶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평소의 저라면 주천오에게 이변이 생긴 모습을 보고 무작정 달려들진 않았을 겁니다. 당시엔 이상할 정도로 분노가 앞섰으며, 합리적인 판단이라곤 일절 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이질감을 느낀 것 또한 그가 제 시야에서 사라진 뒤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마음이 흔들리긴 했다. 잘 생각해 보면 원작 속 모용서는 강자에게 대책 없이 무례하게 대항하는 것처럼 보여도 늘 실력과 지식에서 비롯된 계획을 가진 캐릭터였다. 이게 흔히 나오는 원래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성인지, 혹은 다른 이유일지는 아직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모용서가 가졌어야 할 신물의 행방도 모르겠는데 다른 걸 알 리가 없었다.
초윤은 냉랭함이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모용서의 면면을 바라보다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사현을 속인 일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오를 공격한 일 또한 내 의지를 벗어나 어쩔 수 없었다. 네 말은 모조리 궤변뿐이구나. 내 제자에게 같잖은 농간을 부려 가며 여기까지 와 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고작해야 그따위 발뺌이더냐.”
화가 덜 풀리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
고저가 없을 뿐 날카롭게 벼려진 말을 내뱉은 초윤이 지레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모용서는 이미 헛숨을 삼켰고, 새파랗게 질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평온하던 공기엔 팽팽한 긴장이 매달렸으며 뻣뻣이 굳은 소년의 몸에 서리 같은 떨림이 내려앉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불쾌감을 눌러 참아 온 초윤의 입술은 너무도 쉽게 트여 버렸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목표하는가 물었지. 나는 네 원대한 계획이나 병적인 보호욕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네가 무림을 통일해 신강의 세력과 대항하든, 그러다 죽어 중원이 온통 무도한 무리로 뒤덮이든 몸 바쳐 나설 의향 따위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저 네가 나타날 리 없다 말했던 임사현을 만나 거두었고, 네가 무작정 죽이려 했던 서문천오를 발견해 거두었으며, 손댄 만큼의 책임을 지려는 것뿐이다. 착각도 정도껏이지.”
모용서가 이를 악물며 힘이 들어간 턱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난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다’고 말하고 있는 초윤은 어딘가 후련한 기분에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나 알려 줬으니 더 이상 나한테 이상한 기대는 하지 않겠지. 은연중 느껴 왔던 부담감까지 싹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키운 서문천오는 네가 아는 주천오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에 맞추어 마교 역시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테지만 구심점이 되던 이가 이곳에 있으니 그다지 어렵진 않을 게다. 이로써 내 도움은 충분히 누리고도 남지 않았느냐.”
“……예.”
“그러니 내게 이 이상으로 많은 걸 바라진 말거라. 나는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으며, 있어도 네게 일러 주진 않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쏟아 낸 초윤은 더 마주할 이유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왔을 때와 같이 하얀 옷깃이 어깨를 차게 스치고 지나가자, 모용서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황급히 언성을 높였다.
“송구합니다, 대협!”
“…….”
초윤은 무게감 없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창문 옆에 놓여 있던 난초는 끄트머리부터 갈빛으로 말라 가고 있었다. 이를 본 모용서는 마른침을 삼키고, 어느새 꾹 쥐고 있던 주먹을 애써 깍지 끼며 목소리를 평탄히 내기 위해 노력했다.
“성마른 걱정이 앞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변명할 여지 없이 제 잘못이니 죄를 물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 가형과 세가에는 잘못이 없으며…….”
“…….”
“저는 아직도…… 이후 서문천오를 조우하게 되었을 때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습니다.”
모용서는 자신이 품어 온 의문을 해결하고 싶어 무리하고 불순한 여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얻은 것은 오로지 ‘약선 초윤이 관련되어 있다’는 명제 하나뿐. 좋은 친우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 모용단을 노출시킨 위험, 하오문에게 밉보인 타격을 모조리 통틀어 교환하기엔 한참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모용서는 하나라도 더 확신해야 했다. 설령 현경에 다다른 고수에게 겁도 없이 대드는 꼴이 되더라도.
“제가 이성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염치 불고하고 간청드립니다. 서문천오와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돌발 행동을 보인다면, 저를 그때처럼 가차 없이 제압하셔도 괜찮습니다.”
팔다리가 부러져도 탓하지 않을 겁니다. 모두에게 단단히 말해 두겠습니다. 찔리고 떨리는 사람은 입이 방정을 부린다고 했던가. 모용서의 절박하고도 구구절절한 말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한동안 그렇게 빌던 모용서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
모용서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숙여 이마를 짚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밤공기가 목덜미와 등을 서늘하게 식혔다. 체온이 내려가고 나서야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범접할 수 없는 고수, 겹겹이 미지에 쌓여 있는 인물에게 매몰찬 문책을 받은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그나마 모용서가 겉보기와는 달리 수십 년을 험난하게 산 사람이기에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풍경이 한 번 더 울릴 쯤 고개를 든 모용서는 입가를 가린 채 초윤이 앉아 있던 상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용서에겐 혼란한 와중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추론과 모사가 있었다. 이젠 이를 어떻게 실행해야 좋을지 궁리해야 했다.
◇
“결국은 전부 불측지연 때문입니다. 제 아우의 불안은 모든 일의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갑자기 살의가 들끓어 들입다 칼부림을 할 정도로 불안한 놈이면 그냥 글러 먹었지. 그냥 집에 격리하고 사회엔 못 나오게 하는 게 낫지 않아?
사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모용서가 왜 불안한지를 모르니 그저 미친놈이라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필사적으로 감싸는 눈앞의 이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캐묻고 돌려 묻고 유도해도 모용단의 방패가 뚫리지 않자, 사영은 깍듯이 대할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소림사의 정선이라면 광불(狂佛)이라 불린 지 오래 아닙니까. 정선의 천살성 타령이라면 저 역시도 질리게 전해 들어 압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그 천살성의 주인이 제 막내 사제라니요? 이 아이의 생년월일과 탄생 시는 알고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중요한 건 서문 소협의 천살성 여부가 아닙니다. 사실 저는 고리타분한 천살성을 딱히 믿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 아우는 그리 믿는 듯하며,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 들 실력과 의지가 있습니다.”
“그럼 대협께서 아우분을 잘 타이르시면 될 일 아닙니까. 마주치자마자 진검 대련을 요구하신 모용 공자보단 훨씬 차분히 보고 계신데요. 어떠십니까. 대협의 눈에도 천오가 주살할 천살성으로 보입니까?”
사영이 손바닥을 펼쳐 옆자리에 앉은 사제를 가리켰다. 자신을 주제로 한 대화도 의견 하나 내비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천오가 사저의 비딱한 손을 슬쩍 보았다. 하지만 사영은 자세와 태도를 고치기엔 심히 지쳐 버렸다. 이제야 좀 들을 만한 이야기가 나오나 싶었는데, 결국 이 형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결론밖에 없다니. 세간을 돌아다니는 모용단의 평가가 너무 과장된 것 같았다.
모용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서문 소협에 대한 제 의견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피해를 입으신 분께 말씀을 꺼내기 어렵지만, 서문 소협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의 불안을 종식시킬 수 없으니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사과할 건 다 사과했으니 이제 요구하겠단 겁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제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드리는 요청입니다. 대가는 할 수 있는 최대한 치르겠습니다. 하오문에게든, 여러분에게든.”
그러니까 저 태도가 문제다. 세상 곱게 자란 도련님에겐 일반적으로 있을 리 없는 저 저자세 말이다. 자신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인간이 한 마디 반론도 없이 납작 승복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릴 때마다 사영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이를 알고서도 저러는 거라면 모용단 역시 상당히 질이 나쁜 작자였다.
틈을 놓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이어 말하는 건지. 모용단이 한 점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멀끔한 귀공자의 낯짝은 체면을 모두 내려놓은 것치곤 태연한 무표정을 띠고 있었다.
“말로 하는 대화는 충분하지 않을 테니, 그와 다시 한번 만나 검을 맞대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해 주신다면 제 아우는 서문 소협을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이만 내려놓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어처구니없는…….”
“서문 소협께선 상당한 무인 아니십니까.”
모용단의 두 눈이 천오를 곧게 직시했다. 모용단은 오로지 이 간청을 하기 위해 내내 아둔패기 시늉을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제 아우 또한 끝을 알 수 없는 무인입니다. 검을 나누어 주신다면 수많은 의문이 해결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