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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37)화 (137/257)

137화

“……죄송합니다만, 칠성검 대협. 갑작스레 찾아와 사죄할 게 있다고 말씀하신 게 고작해야 이각 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용 공자의 불안을 다독이기 위해 진검 대련을 해 달라니요? 비록 하오문이 인의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사파이긴 하나 이 무림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다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헌데 대협께선 우리를 무엇으로 보고 계신 겁니까?”

“그렇기에 더욱이 술수를 쓰지 않고 청하는 겁니다. 단장님과 임 소협은 몰라도, 서문 소협은 하오문도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서문천오는 약선 초윤의 제자이자 제 사제입니다!”

“그렇다면 어엿한 무림인이라는 뜻이군요. 비무를 청하지 못할 바도 없습니다.”

하, 사영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막무가내인 인간인 줄 알았다면 이 장소에 들이지도,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다. 지금이라도 문전박대를 하고 싶은 마음에 이를 악물고 화를 삭이던 사영이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무림인이라면 부당한 요구에도 응해야 합니까? 고명하신 분께 무공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난데없고 불공평한 비무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죄하러 오신 분치곤 상당히 뻔뻔하십니다.”

“8년에 걸쳐 제 아우를 지켜보셨지요.”

사영이 탁자 밑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이런 빌어먹을, 알고 있었구나. 하기야 모든 게 너무 쉬웠다. 요녕에 새로운 지부를 세우는 것도, 모용서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해 듣는 것도.

“그에 대한 책임은 하오문에 물으십시오. 제 사제가 하오문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협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단장님께서 이번 한 번만 물러나 주신다면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저는 하오문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문주님께 가 보실 일 같습니다.”

“그러나 단장님의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게 지금 사제를 팔아넘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서문 소협의 의사를 여쭐 수 있도록 양해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빌어먹을 기회주의자 형제 같으니라고.”

“어느새 나쁜 물이 들었나 보지요.”

예리한 혀끝에서 오고 간 설전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의 모용단에게 기울었다. 모용서는 임사현을 속였지만, 임사현은 애초부터 모용서를 감시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모용서는 천오에게 진검을 들이댔지만, 이를 해결하고 풀어 나갈 인물은 사영이 아닌 초윤이었다. 거기에 하오문에 속한 사영은 모용단을 적극적으로 가로막기엔 석연치 않은 위치였으니 이런 불합리한 말을 듣고도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스스로를 물들었다 표현한 모용단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사영의 눈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백토로 빚은 도자기 같던 표정이 처음으로 깨진 순간이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임 소저. 이런 식으로 압력을 가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었으니 소용없는 말씀입니다.”

매몰차게 말한 사영이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무언의 허락을 읽어 낸 모용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천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타인이 진검을 들고 싸우게 되든 말든 흘려듣고 있던 서문천오가 제게 날아온 관심을 눈길로 맞받아쳤다. 모용단은 사영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말했다.

“서문 소협, 소협의 결정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단 한 번의 대련만 승낙해 주십시오. 모용의 이름을 걸고 오래도록 충실히 보답하겠습니다.”

“…….”

천오의 새까만 눈동자가 반 바퀴를 도르륵 굴러 사현과 사영을 보았다. 충격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형, 돌아가는 상황이 모조리 성에 차지 않아 입술만 짓씹고 있는 사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명백했지만, 천오는 상대방에게 가장 괴롭고 힘들 일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느리게 말했다. 이제 와선 희미해진 잔악함의 끄트머리였다.

“……독립한 사저와 사형이면 모를까, 저는 아직 스승님의 문하에 있어 결정권이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큽!”

“…….”

칠성검 모용단이 이 야음에 해무당까지 방문한 이유가 무엇일까. 제 입으로는 태연하게도 동생이 걱정해 보내 주지 않는다, 지금 말고는 시간이 없다 했지만 그런 까닭이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모용서에게 그럴듯한 임무 하나만 안겨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모용단은 구태여 무례를 무릅쓰고 초윤과 모용서가 동시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방문했다.

경험이 얕고 어린 임사영과 임사현은 몰라도 지혜를 헤아릴 수 없다고 들어 온 초윤을 상대하기엔 껄끄럽단 뜻이다.

그런 자에게 원론적이고 당연하며 여지없는 구실을 붙여 초윤에게 직접 허락을 구해 오라 했으니, 임사영은 웃음을 삼키고 모용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모용단은 곤란함을 감추지 못한 채 아랫입술만 달싹였다. 자신을 두고 실랑이가 벌어져도 아무 대꾸 없이 멀뚱히 앉아 있기에 들은 것만큼 교활한 이는 아니다 싶어 안심했건만, 아무래도 자신의 착오인 것 같았다.

“결정권이라니요. 몸에 익힌 초식으로 실력을 겨루는 일은 개인의 판단으로도 충분히 행할 수 있습니다.”

“……길거리의 도제도 제 물건을 매대에 내놓으려면 스승의 허락을 받는데, 목숨과 신체를 해칠 수 있는 비무 또한 걸맞는 절차를 거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승님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진검이 아닌…….”

“저는…… 이곳에 있는 사저와 사형 말고는 사형제가 없는 탓에 형식을 갖춘 비무를 치러 본 적이 없습니다. 타인에게 무공으로 대항한 일이라곤 4년 전 모용 공자를 만났을 때가 전부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주천오’를 아는 모용단의 미간이 움찔 일그러졌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지만 모를 리 없었다. 해무당의 문턱을 넘을 때부터, 그 이전에 서문천오의 기감에 발을 들일 때부터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눈앞에 앉아 있는 건 괴물이었다. 인간의 형체에 맹수의 육신, 금수의 눈과 짐승의 정신을 가진 것이 괴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모용단은 명실상부 천재의 범주에 드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서문천오의 멀쩡한 피부 아래 밀도 높게 들어찬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승의 무공을 받아 잔잔하고 흐린 존재감은 우스운 눈속임일 뿐, 약간의 힘은 들어도 꺾을 자신이 있는 임사현과 손보다 머리가 두려운 임사영과는 결이 달랐다.

하다못해 마땅한 도의를 운운하며 딱 잘라 거절했다면 하오문으로 책을 잡아 어떻게든 수를 써 볼 수 있었을 텐데. 모용단이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궁리를 시작할 찰나, 사제의 깜찍한 대답으로 여유를 되찾은 사영이 능글거리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협. 저는 워낙 근본이 없어 그럴듯한 무가 출신은 아니지만 아직 독립하지 않은 문하생의 대련에는 스승의 허락과 참관이 필요하단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아는 보기엔 이리 장성한 것 같아도 아직 약관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어두운 눈으로 보기에도 출중하신 탓에 일찍이 초출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스승님과 담화를 나누실 자리가 필요하시다면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칠성검 대협. 제자의 부탁이라면 어느 정도는 들어주실 겁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저.”

어느새 문밖으로 시선을 돌린 천오가 나직하게 말했다. 함께 살았을 때부터 몇 년에 걸친 경험으로 막내 사제가 어딘가에 빤히 눈길을 둘 때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숙지하고 있는 사영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모용단만이 천오의 말에서 유추한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곧 나무 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벌어진 작은 틈새로 하얀 손가락이 파고들어 문틀을 쥐었다. 무게감 없는 개문과 함께 물기 섞인 찬바람이 발목을 스쳤다. 너울거리는 머리카락과 나부끼는 옷자락이 초승달의 희미한 푸른빛을 머금었다.

모용단은 어린 시절부터 고강한 무인을 수도 없이 만나 왔다. 저명한 세가의 소가주로서 마주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전설로 회자될 업적을 갖고 있었다. 당장 정기적으로 만나는 백협맹의 인물들만 해도 패도 한 자루로 산을 뚝 떼어 옮겼다는 결패도 팽치정과 목봉으로 철검을 공처럼 만든 걸왕 추노, 손바닥으로 구름에 구멍을 냈다는 불장 정선과 꽃잎을 밟고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별절화려 반야장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도 지금 눈앞의 이자와 같진 않았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오로지 코끝에 와 닿는 약재 냄새와 희멀건 형체만이 실재를 증명했다. 서문천오의 속에 도사린 힘조차 눈치챘던 모용단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상념에 잠길 새도 없이 앉아 있던 세 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포권하며 스승을 맞이했다. 모용단 역시 반사적으로 함께 움직였고,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제 어깨와 머리를 훑는 감각을 선연히 인지했다.

“이곳에도 손님이 오셨나 보구나.”

소슬바람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늦었구나. 아니, 약선 초윤이 지나치게 빨리 온 건가. 그렇다면 서제와 약선의 협상은 결렬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모용단이 고개를 숙인 채 입 안에서 혀끝을 지그시 씹었다. 낭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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