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너는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그리 얼이 빠져 있느냐.”
“예? 아, 아뇨…….”
“모용단이 현아를 통해 스승님의 소재를 알았다고 했거든요. 이제야 자기가 얼마나 느슨해 빠진 정신머리로 살았는지 제대로 실감한 거겠죠.”
“사영, 누누이 말하지만 네 동생에게 모지락스럽게 말해서 좋을 게 없다.”
동생을 대신해서 뾰족하게 대꾸하는 사영을 나직이 타이른 초윤은 죄지은 표정의 사현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주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무협지 속 고수의 사생활은 산을 내려오는 순간부터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 괜찮은데. 거기에 더해 초윤이 벌인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며, 이번에는 장장 수십 일에 걸쳐 중원을 돌아다녔으니 충분히 새어 나갈 만도 했는데.
자신만의 잘못이 아닌데도 저렇게 미안해하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까. 그리고 선생님의 행선지를 좀 노출시켰다고 동생을 잡아먹을 듯 구는 사영이는 또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까.
초윤은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이 혓바닥이 제 뜻을 따라 주길 바랄 뿐이었다.
“누군가를 잘 의심하지 않고, 다가오는 이를 쉬이 경계하지 않는 성정은 영리한 네게는 확실히 답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 없이 말하자면…… 나는 사현이 이렇게 자랐음을 확인할 때마다 안도하게 되는구나.”
“……어째서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적이 드물다는 게 보여 그렇다. 내가 아주 틀리진 않았구나, 너희들에게 그만큼의 안전은 누리도록 해 주었구나 싶어서.”
“…….”
상상도 못 한 스승의 약한 말에 충격을 받은 사영이 입술만 뻐끔거렸다. 고개를 번쩍 치켜든 사현은 멀거니 초윤을 바라보았고, 천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초윤은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대수롭지 않게 찻잔을 비웠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고작해야 약관을 넘은 나이에 될 리가 없지. 쉰이 넘어서도 어려운 게 인간관계다. 다만 마냥 사람을 믿어서 좋을 것도 없으니 앞으로 천천히 알아 가거라. 적절히 알려 줄 이가 바로 옆에 있지 않느냐.”
“……예, 스승님.”
“이해했으면 됐다.”
웅얼웅얼 대답하는 사현에게 딱 잘라 대답한 초윤은 이만 돌아가라며 손을 저었다. 예상치 못한 일로 한참 늦은 밤이 되어 버렸으니 아이들도 피곤할 것 같았다.
인사를 하면서도 주눅이 들어 굼실거리는 사현을 사영이 끌고 나가자 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오가 당연한 듯 뒷정리를 시작했고, 초윤은 그제야 앉은 몸을 편히 기울이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달그락거리며 다기를 치우는 소음 가운데 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괜히 뻑뻑한 눈두덩을 꾹꾹 누르던 초윤이 단출하게 대답했다.
“그래.”
“방금 만나신 형제 때문입니까.”
모용서, 신물, 그리고 모용단이 방금 남기고 간 말. 이것저것 다 종합해서 골치가 아팠다. 내일 모용단을 만나면 또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초윤은 오랜만에 만난 남매를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과 이 자리를 회피하고 싶은 욕구를 저울에 올리며 울적하게 답했다. 무엇이 더 큰지는 당연했다.
“맞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
손을 내리고 시선을 들자, 작은 소반에 빈 찻잔과 다기를 올린 천오가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잘못인 것 같은 이 난리 통을 천오한테도 나눠 주고 싶진 않은데. 초윤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
“모용단은 제가 그의 동생과 비무를 하길 바랐습니다. 모용서 또한 비슷한 요청을 한 듯했습니다만.”
초윤의 언사라면 지나가듯 흘린 것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천오가 태연하게 언급했다. 신물에 앞서 난데없는 비무 신청을 떠올린 초윤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천오의 답은 초윤에게 더한 갈등을 안겨 주었다.
“예전에…… 모용서란 자를 만났을 때 스승님께서 그러셨지요. 아프지 말고, 피 흘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말고, 스승님을 위해 이기겠다는 마음을 먹지도 말라고.”
“……그랬지.”
“아프지 않고, 피 흘리지 않는다면 스승님을 위한 노력을 허락해 주실 겁니까?”
이게 무슨 말이야. 놀란 초윤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나무 소반을 들고 우두커니 선 천오는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담담하게 스승의 눈길을 받아 냈다. 초윤은 설마 싶은 마음으로 되물었다.
“그 돌연한 비무를 하겠다는 말이더냐.”
“스승님이 어째서 고뇌하고 계신지는 감히 헤아릴 수 없으나, 이를 타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필요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응하겠습니다.”
“네게 좋을 것이라곤 무엇 하나 없는데도?”
“시름을 덜어 드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다치지 않게 주의하겠습니다.”
주인공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야? 물론 4년 전에도 가뿐히 이겼고 지금도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는데…….
평소라면 대경실색을 하며 즉각 그럴 필요 없다고 했겠지만 어쩐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내일 모용단을 따로 만나게 됐다는 게 문제였다.
모용단은 지금 신물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원작에 더 이상 관여할 필요가 없느니, 돌아갈 방도를 찾을 예정이라느니 변명을 붙인다면 끝도 없지만 이제 와서 모를 리 없었다. 초윤은 수많은 변화를 야기했으며 이번에도 이를 외면한다면 더 큰 후폭풍에 휘말릴 게 뻔했다.
그러니까 결국 모용단의 말을 듣긴 해야 하는데…… 그가 과연 쉽게 내 질문에 답을 해 줄까?
알려 주는 대가로 천오랑 모용서를 만나게 해 달라, 둘이 붙어 볼 수 있게 해 달라 요구하면 어떡하지?
‘초윤’의 말투로 협박해도 듣지 않으면 정말 어떡하지? 원하는 정보를 안 준다고 냅다 때릴 수도 없고, 독을 먹이거나 할 수도 없고…….
아무리 고민해도 원만한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원작의 기억을 파헤치면 모용단에 대해 무언가 생각나려나 싶었지만, 읽는 이가 주인공에게 이입해 쾌감을 느끼도록 써둔 양산형 무협 하렘물에서 조연 남자 캐릭터를 부각시켰을 리 없었다. 모용서가 비급과 영약을 비밀스럽게 긁어모은 걸 걸고넘어지자니 본래의 주인이 나타나기 전에 낚아챈 거라 죄를 따질 수도 없었고, 모용세가는 주인공의 출신지라서 그런지 화산파나 무당파처럼 구린 구석도 없었다.
앞날이 다 바뀐 마당에 미래의 사건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해 줄 수도 없고, 그렇게 했다가 더 큰 일이 벌어지면 답이 없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냥 돌겠다. 다시 고개를 기울여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초윤은 곧 절레절레 고갯짓을 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니, 안 되지.”
“예?”
“네가 그에게 승부욕을 불태우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하는 일이라면 더욱 용납할 수 없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나는 네게 그러면 안 돼.”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스승님께서 편리하신 방향으로…….”
“너 자신을 지키라고 가르쳐 준 무공이지, 내가 편하고 싶어 널 키운 게 아니다. 마음을 써 준 것은 기특하다만 앞으로 그런 말은 꺼내지 말거라.”
곧장 이렇게 말하지 못한 게 서러울 정도로 초윤은 단호했다. 머릿속이 복잡했을 뿐 처음부터 천오를 비무장에 내보낼 생각 따윈 없었으며, 가능하다면 그 형제와 다시 마주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은 모용단을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차근차근 고민해 볼 일이었다. 회귀에 관한 정보를 아무 데나 뿌리고 다닐 순 없는 이상 이번만큼은 아무도 초윤을 도울 수 없겠지만, 명색이 현경의 고수인데 설마 내세울 패 하나 없을까. 여차하면 정말 눈 딱 감고 겁박이라도 해야 할 듯했다. ‘초윤’의 독설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천오는 알았다고 대답하곤 소반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초윤은 홀로 남고 나서야 속을 토해 내듯 좀 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사영이나 희처럼 통찰력도 좋고 똑똑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자신이 지닌 현대인의 상식과 기준을 나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만큼 이 아이들을 키울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초윤은 처음으로 약간의 후회를 느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은 여전했다.
먹색의 장막이 달을 가리고 울적한 밤이 깊어졌다. 초윤은 창가의 자리에 앉아 막막한 사색을 계속했다.
그사이 하오문의 문턱을 넘은 마차가 누구를 태우고 있는지는 미처 예상치 못한 채.
◇
해무당의 한쪽에 준비된 방에서 자려다 누나의 손에 이끌려 대문을 나온 사현은 불만조차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정도로 풀이 죽어 있었다. 동생에게 한마디를 더 해 주기 위해 간만에 스승님과 같은 지붕 아래서 밤을 보낼 기회까지 두고 나온 사영마저도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잔소리도, 타박도, 비아냥거림도 없는 귀갓길은 무지근한 정적으로 서먹했다.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던 사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팔꿈치로 사현의 옆구리를 찌르려던 찰나, 사현의 의기소침한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누나.”
“어, 응?”
“나는 이제…… 서하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어떻게 대하냐니? 의아하게 올려다보던 사영이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쪽에서 사과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작 사과를 받는 쪽의 의사는 물어보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