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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40)화 (140/257)

140화

“사실 서하와 단 형님이 날 속인 건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스승님께 폐를 끼치게 됐잖아.”

“음…… 그렇지.”

“서하만큼 친한 친구도 없고, 형님한테 고마운 것도 많고, 내 잘못도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싶어. 그렇지만…….”

“이해해. 모용서가 천아한테 칼을 들이댄 것도 방금 알았잖아.”

“그러니까…….”

설마 우는 건 아니지? 흔들흔들 늘어지는 동생의 대답을 들은 사영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려 사현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그 직전인 듯했다.

나였으면 그냥 딱 끊고 말았을 텐데. 머슴 같은 장위를 제외하면 진심 어린 친분이라곤 하나도 쌓지 않은 사영은 난처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거처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옆에선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가 사과를 받으면 서하는 이전처럼 나를 찾아올까? 사실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데면데면해지는 것도 싫어. 하지만 자꾸 스승님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으음.”

사영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의견이 빈약할 땐 검증된 타인의 언행을 빌려 오는 게 최선이었다. 문주님의 방식은 얘한테 들이대기엔 좀 악랄하니, 사영이 아는 사람 중 중재와 화해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던 이를 흉내 내야 할 듯했다.

“걔가 ‘미안해’라고 하면 ‘알았어’ 하고 끝낼 게 아니잖아. 사죄를 하겠다고는 했으니, 그 자리에서 최대한 대화를 해야 한다고 봐.”

약선 초윤이 어떤 인물이던가. 어렸을 적 사영이 서문천오를 배척하며 단단한 벽을 쌓아 올렸을 때, 상처 입은 짐승 같던 사영과 덜 자란 괴물 같던 천오를 마주 앉히고 말과 말을 꿰매어 준 인간이다. 사영이 품었던 본능적인 적개심과 설익은 질투, 희미한 혐오감과 예리한 보호욕을 자극하지 않고 하나하나 누그러뜨린 인간이다. 사영은 스승의 현명한 대처가 아니었다면 동생을 데리고 멋대로 산을 내려왔거나 서문천오와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았으리라 장담했다.

“뭐 어쩌겠어. 그냥 얘기를 해. 너는 내 친우지만 스승님은 내게 이러한 의미다, 네 사과를 기탄없이 받아들이고 싶지만 스승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에 쉬이 말이 나가지 않는다, 이러이러해서 실망했다, 처음부터 날 이용할 생각으로 왔느냐. 마음에 걸리는 건 다 말하고 물어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말하기 전에는 모른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모른다. 먼저 말을 거는 행위는 자존심을 꺾는 게 아니니 개의치 말고 묻거라. 이야기를 듣기 전에 재단하지 말고, 네 멋대로 타인을 해석해 판단하지도 말고.

누구보다도 말수가 적으며 남의 말 따위 듣지 않고 살아왔을 듯한 스승이 그리 말했을 땐 솔직히 잘 알 수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자란 지금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이해할 뿐. 속 터놓을 사람이 없어 이제껏 실천해 본 적 없는 지혜를 전수하며, 사영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밤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것들이 어둑한 시야에 희미하게 잡혔다.

“모용서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이 멀쩡하게 대답할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너를 정말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어?”

그리고 한순간에 기시감이 동공을 통해서 사영의 머리를 쿡 찔렀다.

잘만 얘기하던 누나가 갑자기 말을 멈추자, 얌전히 듣던 사현이 훌쩍이며 사영을 보았다. 사영은 약간 찡그린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누나를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사현의 눈에는 횃불에 의지해 마차를 오르내리고 짐을 옮기는 하오문도들이 보일 뿐이었다.

“누나?”

“……이상하네. 저게 왜 여기 있지?”

“왜? 뭔데?”

“아니…….”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린 사영은 곧 손을 들어 동생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스승님께서 같이 계시니 괜찮을 거야. 걔하고는 나중에 잘 얘기해 봐. 그리고 이제 빨리 들어가서 자. 오늘만 귀빈관에서 보내고 내일은 나랑 같이 해무당에 들어가자. 스승님 계실 때 같이 있어야지.”

“누나는?”

“난 저쪽에 물어볼 게 생겨서, 확인만 좀 하고 들어갈게.”

“……알았어. 내일 봐.”

“그래. 너무 고민하지 말고 일찍 자.”

동생의 등을 토닥여 준 사영은 사현의 산만 한 덩치가 점점 멀어져 작아질 때까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희미한 초승달이 밝힌 길을 곧게 밟고 나아가는 사현은 늘 사영의 퍽퍽한 속에 새삼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영에게 사현이란 언제나 당연한 존재였고, 이곳은 안전하다고 믿었으며, 당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었다. 사영은 동생의 뒷모습을 내심 흐뭇한 얼굴로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자신보다 아랫줄에 있는 문도들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퍽 가벼웠다.

못다 한 이야기는 해가 뜨고 하면 되리라. 불안한 마음은 다시 만났을 때 더 다독여 주면 되리라. 내일도 오늘과 같은 날이 찾아오리라.

사현을 혼자 보내고 제 발로 멀어진 이날 밤을 평생에 걸쳐 후회하게 되리라곤, 맹세컨대 당시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갈설린은 이 상황이 되어서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쏠리고 마는 관심을 다 붙들어 맬 수 없었다.

병약한 몸과 막중한 위치, 방대한 의무와 무한한 호기심을 한꺼번에 지닌 탓에 십 년이 넘도록 세가 안에서만 두문불출하며 지내 왔다. 약왕산에 걸쳐 지어진 제갈세가가 아무리 넓고 현묘하다 해도 집은 집이고, 담은 담인 법. 처음 맡는 외부의 공기와 처음 보는 야외의 풍경은 자꾸만 눈길을 잡아 끌었고, 설린은 그럴 때마다 자조적인 웃음을 픽 지었다. 어머니가 안전하신지도 알 수 없는 판국에 애처럼 설레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이조차도 광동성에 들어서자 부정할 수 없어졌다. 내륙의 섬서성, 바다의 절강성과는 또 다른 결의 화려한 번화가 오감을 자극했다.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머리와 가슴을 혹사시켰던 제갈설린은 결국 지친 얼굴로 마음껏 바깥을 바라보았다. 기름진 튀김과 해산물의 냄새, 복작복작한 사람들의 언성, 도심에 들어서며 덜 흔들리는 좌석과 습기를 머금어 후텁지근한 공기…….

“아가씨, 저 멀리에 있는 건물이 바로 하오문입니다.”

“……아, 벌써 다 왔나요?”

마부석에 앉아 있던 시비의 정중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제갈설린은 등받이에 맥없이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창문에 내린 대나무 발을 손끝으로 살짝 걷었다. 작게 드러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눈이 다 아팠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설린의 시야에 하오문은 들어오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설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력을 가진 시비가 말을 이었다.

“마중하러 나온 이들이 있군요. 일찍 기별을 넣은 보람이 있는 듯합니다.”

“너무 눈에 띄면 안 될 텐데요.”

“안심하십시오. 그저 무안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더 다가가자, 과연 저 멀리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과 그 앞에 서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지나가는 이들이 아무런 관심도 비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하오문이 이런 식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평소에도 흔한 듯했다.

중간 간부쯤 되는 인물과 적당히 격식을 차린 뒤 하오문의 대문을 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절차는 공적이며 부드러웠고, 제갈설린의 마차는 어느새 하오문 내부에서도 가장 거대한 건물 앞에 멈췄다. 이제 더 이상 상념에 잠길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린은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뒤 시비의 도움을 받아 내려섰다. 매끈한 돌계단과 섬세한 현관을 지나자 펼쳐진 실내는 상상 이상의 호화로움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허리에 모란 매듭을 단 채 분주하게 움직였다. 손에는 문서를 가득 담은 바구니나 얇은 붓이 들려 있었으며, 다들 제 할 일을 해내기 바빠 어색하게 걸어가는 익명의 손님에게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안내하는 사람과 설린, 시비, 두 명의 호위무사로 이루어진 일행은 하오문의 웅장한 중심 구조물을 두리번거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꼭대기 층에 닿기까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모란 그림이 그려진 장지문 앞에 도달하자, 안내역이 설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의뢰주분께서만 걸음하실 수 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부축할 시비만이라도 대동할 수 없을까요?”

“문주님과 직접 대면하실 땐 필히 따라 주셔야 하는 방침인지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부액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직접 가지요.”

다 낫지 않은 몸에 십여 층의 층계는 상당한 부담을 가했다. 숨을 헐떡이던 제갈설린은 들썩이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다스리며 뚫어져라 장지문을 응시했다. 옻칠한 뼈대에 종이를 바르고, 그 위엔 색색의 모란을 그린 뒤 금박까지 입힌 문은 고상한 소비를 지향하던 제갈세가에선 본 적도 없을 정도로 호화찬란했다.

온갖 믿을 수 없는 소문만 들어 온 상대가 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괜한 긴장에 어깨가 굳었다. 하지만 제갈설린이 누구인가. 수많은 위인을 만난 걸로도 모자라 신비에 싸인 약선 초윤에게 긴밀한 은혜까지 입어 본 몸이다. 명명백백한 속세의 인물에게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평정을 되찾은 제갈설린이 발을 내딛자 장지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넓은 방의 맞은편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영롱한 풍경 소리에 이어 사근사근한 환대가 설린을 반겼다.

“어서 와요, 제갈 소저. 언젠가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어 기쁘네요.”

초윤의 뒤를 따라 길을 떠난 제갈설린이 드디어 하오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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