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제갈소서의 여식 설린이라 하옵니다. 명문(名聞)이 무성하던 문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그리 고개를 숙이실 필요는 없어요. 편히 들어오세요. 앉아서 맞이할 수밖에 없어 미안해요.”
면사를 벗은 설린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하자 희가 살랑살랑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허례 없이 재깍 자세를 바로 한 설린은 그제야 방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응접실에서 대리인만 만나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는데, 설마 하오문주 본인을 개인실에서 직접 대면하게 되다니. 마음을 다잡은 게 무색하게도 심장이 떨렸다.
설린은 애써 진정을 덧칠하며 희가 가리키는 앞자리로 가 앉았다. 부드러운 비단 보료가 오랜 여정으로 지친 몸을 폭신하게 받아 주었다. 하오문의 우두머리는 족적에 황금이 묻어난다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사소한 물건에서 묻어나는 금력(金力)을 짐작한 설린이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소식을 전해 주신 무사님이라면 본문의 객인관에서 쉬고 계세요. 밤낮없이 달려오신 탓에 많이 피곤하신 것 같더군요. 편히 회복하시라고 일부러 부르지 않았어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문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충분히 휴식을 취하였을 터이니, 돌아갈 때 거두어 가겠사옵니다.”
“광동성의 어디에서 머무를 요량이신가요?”
“예? 아…… 이 근방의 객잔에…….”
“거기까지 오가기엔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
희가 서안에 팔을 올리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걱정스러운 듯한 미성이 가까워지자, 아직 희를 똑바로 바라본 적 없는 설린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난생처음 사람의 눈에서 바다를 찾게 된 설린은 화들짝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본관에서 멀지 않은 귀빈관을 한 채 내드릴게요. 규모는 좀 작지만 소저의 일행이 함께 머물기엔 충분할 거예요.”
“아…… 음, 그렇게까지 편의를 봐주실 필요는…….”
“소저처럼 특별한 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니, 바쁜 일이 없다면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쓰셨음 좋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설린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동요를 숨기느라 꽉 쥔 주먹을 풀지도 못한 설린은 한숨을 삼키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이미 베풀어 주신 은덕이 많아 사양해야 마땅하오나 염치없이 혜의에 기대겠사옵니다.”
“염치가 없다니요. 불세출의 진법가를 뵙게 된 제 쪽이 더욱 감사하지요.”
이십 년도 되지 않아 전설로 회자될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칭찬 일색인 말을 듣다니, 입바른 소리인 걸 알아도 양 뺨과 귀가 화끈거렸다.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지만 이런 말에 설레는 건 알아서 약점을 만드는 거나 진배없는 짓. 설린은 자신의 낯가죽이 생각보다 두껍길 바라며 생긋 웃었다. 꼬박꼬박 응대하는 설린이 기특하다는 듯 먼저 화제를 바꾼 건 희였다.
“그나저나, 광동성에서 소저를 뵐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바닷가를 둘러 오신 여정은 어떠셨나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사옵니다. 파도치는 모습에 온종일 시선을 빼앗긴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피부에 와 닿는 소금 바람마저 맛있게 느껴졌사옵니다. 하지만…… 광동성에 들어온 이후론 바다를 보지 못했사옵니다.”
“어라, 광동의 바다도 견줄 만한 절경이었을 텐데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었나요?”
“아니요, 그저 도시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사옵니다. 소녀가 나고 자란 섬서도 만만찮게 풍요로운 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문주님께서 일구신 광동에 비하면 모자람이 있는 듯하옵니다.”
“아하하, 이런.”
‘이런’? 아첨이 너무 과했나? 과장이 좀 들어가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인데.
소리 높여 웃는 희와 마주 앉아 웃음을 흉내 내던 설린의 속이 타들어 갔다. 눈앞의 사람은 웃어도 즐거운 것 같지 않고, 울어도 슬픈 것 같지 않아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럴 때면 입바른 말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못 미더울 뿐이었다.
불편한 마음에 발끝을 꼼질거리던 설린은 아랑곳 않고 한껏 유쾌해진 희가 물었다.
“근래에 고뿔로 많이 쇠약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했는데, 몸은 좀 어떤가요? 필요하다면 광동성에서 가장 유능한 의원을 소개해 드릴게요.”
“아, 괜찮사옵니다.”
나름 민감한 주제를 고뿔로 돌려 말한 희는 설린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바라보다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절맥증으로 오늘내일한다던 제갈설린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툰 금칠을 하던 아이는 가장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주제에 도리어 행복하게 답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천운이 따라 준 덕분에 무사히 한고비를 넘길 수 있었사옵니다.”
“세상에, 정말 잘됐네요.”
왜 저렇게 기쁜 것처럼, 불치병이 나은 것처럼 굴지?
잠깐, ‘불치병이 나은 것처럼’? 남궁세가가 도왔을 리는 없는데, 그렇다면?
동상이몽은 먼 곳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었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머리 좋기로는 버금갈 사람 없다는 희가 눈앞의 소저와 다른 손님의 행선지를 비교하고 있을 때, 설린은 다시금 불쑥 떠오른 은인의 모습을 덧그리며 속절없이 반색했다.
광동성에서 유능한 의원이 웬 말인가. 설린의 시비인 수영이 무려 그 약선 초윤의 약을 지니고 있었다. 설린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그것을 복용했으며, 멀미와 여독으로 고생을 좀 할지언정 이전의 무기력과 절망감은 씻은 듯 나은 지 오래였다.
열어 둔 창문만 남긴 채 사라진 은인을 생각하자 어쩐지 오래 달인 약 냄새가 맡아지는 듯했다. 삐걱삐걱 긴장했던 몸도 기름칠을 한 것처럼 유연해졌고, 가슴 한구석에 충분한 여유도 생긴 것 같았다. 지금 상대하는 사람보다 더 인간 같지 않은 이를 두 번이나 만나 구명받기까지 했는데 움츠러들 필요는 없었다.
제갈설린은 어느새 굳어 있던 허리를 펴고 단정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지켜보던 희에겐 흥미로운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문주님과 밤새도록 담소를 나누며 견문을 넓힐 기회를 얻고 싶사오나, 무례를 무릅쓰고 다급히 찾아뵌 연유를 말씀드리지 않는 것도 실례가 될 듯하옵니다. 이만 본제를 아뢰어도 되겠사옵니까?”
“그럼요. 물론이에요. 소저께선 무엇이 필요하시기에 이곳까지 오셨나요?”
제갈설린이 품에서 곱게 접은 서신을 꺼내 조심스레 내밀었다. 꽃물을 들인 손끝이 이를 받아 펼치자, 단정하게 쓰인 두 글자가 시야에 확 들어왔다.
“‘돌아오지 말거라’…….”
“절강성을 지나는 도중 어머니께서 전서구로 보내 주신 서찰이옵니다. 소녀는 이것이…….”
“이상하네요. 소저가 길을 떠난 뒤 제갈세가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것 같진 않았는데.”
즉각 상황을 파악한 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말하자, 자신과 비슷한 사고로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사람을 처음 본 설린이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다 정신을 붙잡고 말했다.
“예, 본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으니 도움을 청하고 싶었사옵니다만…….”
“자세히 찾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일주일은 넘지 않을 거예요. 그동안 소저는 귀빈관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헌데…….”
“헌데?”
말끝을 따라 물은 희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설린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직시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운 낯을 천천히 올려다본 설린이 조곤조곤 말했다.
“부끄럽게도 아직 독립을 하지 못한 몸인지라, 세가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면 의뢰의 대가를 지불해 드릴 방도가 여의치 않사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여비로 충분할 리도 없고, 문주님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그다지 없사옵니다.”
“소저는 앞으로 대성하실 게 분명하신 분이니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투자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래서…… 감히 제의드리고픈 안건이 있사옵니다.”
결연하게 말한 설린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설마 싶은 마음에 희가 입을 벌렸다.
“세가를 영위하시는 어머니께서 돌아오지 말라고 하신 몸이옵니다. 만일 적절한 대금을 치를 수 없게 된다면, 제가 가진 모든 지식으로 하오문과 문주님께 보탬이 되고 싶사옵니다. 미력하고 어리며 무공 하나 익히지 못한 둔물(鈍物)이지만 진법만큼은 제 몫을 한다고 자부할 수 있사옵니다.”
“……하오문도가 되시겠다는 뜻인가요?”
“예, 문주님. 기밀을 누설할 것이 염려되신다면 영영 돌려보내지 않으셔도 좋고, 허드렛일만 시키셔도 좋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
제 무릎만 보며 상대방의 침묵을 견디는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명문 정파의, 그것도 고상하고 자존심 드높기로 유명한 제갈세가의 적손이 사파에 속하는 하오문에 들어가겠다니 분란만 키울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제갈설린 또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세가를 지킬 가능성이 있는, 세가를 벗어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는 이뿐이었다.
입술에 바른 연지가 다 없어질 때까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설린은 문득 머리 위에 와 닿은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슬쩍 머리를 들자, 소매로 입가를 가린 희가 다른 손을 들어 설린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