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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42)화 (142/257)

142화

희는 전혀 놀라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아, 이런. 소저가 너무 어여뻐서 무심코 손이 먼저 나가 버렸네요. 미안해요. 제의는 물론 수락이에요.”

“예, 예?”

“소저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라도 제갈세가를 꼭 낱낱이 들쑤셔 봐야겠네요. 나한테 맡기고, 이만 가서 얼른 모자란 잠부터 채우세요.”

“그러면…….”

“당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니 설레발치진 않을게요. 난 유능한 사람을 혹독하게 부려 먹는 편이란 사실만 알아 둬요.”

“아…….”

계획한 일이 전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나서야 손에 들어간 힘이 풀렸다. 설린은 뒤늦게 목덜미를 붉힌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알겠다 대답한 뒤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화로운 장지문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등 뒤로 희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날 봐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이리 오세요, 밤이어도 아무나 붙잡고 말하면 될 거예요, 먹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면 꼭 관리인에게 얘기하고 귀빈관의 모든 물건은 편히 쓰세요, 필요한 게 있어도 부담 없이 말해요! 대체로 배려와 걱정과 오지랖이 철철 묻어나는 사소한 말이었다.

설린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곧 상층에 남은 외부인의 기척이 전부 사라졌다.

희는 그제야 천천히 입을 다물고 살갑게 흔들던 손을 내렸다. 흐뭇하고 유쾌하게 웃던 얼굴에선 어느새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맑은 풍경 소리와 어깨에 내려앉는 햇살은 얼음장 같은 침묵을 깨트리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고요한 얼굴로 눈앞에 없는 이를 노려보던 희가 손끝을 세워 책상 위를 까드득 긁었다. 토해 내지 않은 감정으로 손등에는 핏줄이 서고, 자단목을 깎아 만든 서안의 표면엔 사나운 손톱자국이 새겨졌다.

한동안 시근시근 숨을 고르던 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명랑하던 음성도 이미 냉랭하게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어때요?”

“……스승님은 보통 양모필로 글을 적으시는데, 오래 쓰면 탄력이 생기는 양모의 특성상 유려한 필세(筆勢)가 특징이십니다. 하지만 삼보대회가 열린 시기에 도착한 서신에 쓰인 글씨는 행필(行筆)이 예리하고 수필(收筆)은 강렬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서모필을 쓰신 듯합니다.”

허공에 대고 대뜸 던진 질문의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병풍으로 교묘히 가려져 있던 문을 열고 걸어 나온 사영이었다.

사영은 손에 든 스승의 편지를 들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고급 종이지만 숨김 문양은 없었습니다. 별저에 두시는 종이는 이곳에서 쓰시는 것과 비슷하게 모란 문양을 넣어 두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그 사람도 문양을 알고 있으니 종이를 바꿔치기해서 내어 드렸을 거예요. 약선 대협이 섬서성에 머무르고 계시단 걸 숨겨야 하는데 멍청하게 내 종이를 썼을 리 없지요.”

“하지만 그 별저에서 낡은 붓을 꺼낼 순 없으니 이렇게 되었겠군요.”

일찍이 알았다면 오죽 좋았을까. 필적을 뜯어 분석하는 법을 더 빨리 배웠다면 이것을 받자마자 재깍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는 사영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모든 일에 의구심을 품고 살다간 상종 못 할 인간이 될 것이란 자각도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제 밤이었다.

사영은 초윤과 충격의 연속인 대화를 나눈 뒤 동생과 함께 돌아가다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동도 트지 않은 한밤중에 짐을 옮기는 일이야 빈번했지만, 짐을 내리는 문도 중 하나가 손목에 둘둘 감아 둔 장신구가 문제였다.

햇빛으로 사람을 쪄 죽이는 광동성에 사과꽃이 웬 말인가. 심지어 사과꽃 세 송이라면 섬서성 제갈세가의 문장이 아닌가. 바로 얼마 전 제갈설린을 멸구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사영은 예민한 직감으로 그를 붙잡았고, 어렵지 않게 정체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문도로 위장해 하오문에 들어온 무림인은 바로 제갈설린의 호위무사였다.

도대체 무슨 하늘의 조화인지 제갈설린이 직접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심지어 아주 다급하지만 조바심조차 비치지 못할 정도로 중한 일이 생긴 듯했다. 천오가 분명 절강성에서 만났다고 한 것 같은데,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왔나. 스승의 행적을 더듬어 보던 사영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4년 전 섬서성의 독을 해결한 뒤 만날 이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때 제갈설린과 안면을 트신 것 같았습니다. 당시 저는…… 객잔에만 있어 몰랐고요.

-하오문이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말도 안 돼.

-이렇게 큰 규모로 중원에 해를 끼치고 싶어 하는 세력은 하나밖에 없잖아요?

-서 공자가 설린 소저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설린 소저는 이에 넘어가 비밀리에 섬서성을 감시했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 ‘무언가’가 무엇인가……. 분명 규모가 크고 위험하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정보를 얻은 것 같아서 삼보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지켜봤는데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거든요.

사영은 삼보대회가 끝난 뒤 스승이 희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약선이 섬서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기 하오문의 섬서성 지부는 제갈설린의 의뢰를 받아 섬서성의 전역을 주시하고 있었고, 꼭 의뢰 때문이 아니더라도 삼보대회라는 대국적인 행사는 평상시보다 많은 인력을 섬서성에 집중시켰다.

중원 모든 정보의 집합지라는 하오문이 섬서성에 몰려 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단신라면 몰라도, 열다섯 살의 서문천오를 대동한 약사가 과연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까?

스승님과 사제의 무공 특성을 감안해도 영 미심쩍었다. 미무일식공은 가진 기운을 자연과 동화시켜 존재감이 옅어지게 만드는 심법이지, 사람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었다. 객잔에 머물렀다면 분명 점원과 마주쳤을 텐데, 하오문도가 드글거리는 섬서성에서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고?

여기까지 생각한 사영은 가설을 세우기 위해 그 당시의 자료를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다 늦은 시간에 기록 보관소에 들려 섬서성에서 보내 온 서간을 꺼내고, 차곡차곡 보관해 둔 스승님의 서신도 챙겼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려 있었다. 사영은 형형한 눈으로 온갖 종이를 품에 안은 채 자신의 두 번째 스승이자 상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희와 한창 분석을 진행하고 있을 때, 제갈설린이 도착해 결정적인 정보를 보여 주었다.

“은거 기인이 도심의 공기만 마셔도 동네방네 소식을 물어 나르는 하오문인데, 하! 기만도 정도껏이지. 다 죽어 가는 인간을 데려다 가르치고 입혀서 그 자리에 앉혀 뒀더니 내 손발을 잘라?”

“왕 지부장이 보통 인간입니까. 마교의 힘을 빌렸다면 무력부터 금제까지 동원하지 못할 게 없었을 테니 지금까지 감출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를 믿고 몇 년 동안 방문조차 하지 않은 게 실책이었군요. 나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움직였을 거예요. 그렇다면 규모가 그리 크진 않을 테니 색출은 어렵지 않아요. 문제는 그 뒤처리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토한 희가 연이어 말했다.

“제갈세가, 화산, 종남이 다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섬서성이에요. 왕정이 그곳의 하오문과 모란표국 지부를 통틀어 관리한 지 자그마치 십 년이고요. 그동안 그의 손을 거치며 첨삭되고 변질된 게 얼마나 많겠어요. 표국에서 빼돌려지고 염탐당한 물건은 또 어떻고요. 섬서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의 사업을, 모든 사업의 간부급 문도를 다시 검토해야 해요. 먹물이 아니라 구정물로 그림을 그려 온 셈이니까!”

“……고정하십시오, 문주님. 결국 들통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심각했다면 문주님께서 모르셨을 리 없을 겁니다.”

“모를 리 없다, 눈치 못 챌 리 없다. 이렇게 자만해선 안 됐는데. 너무 많은 권력을 너무 먼 인간에게 쥐여 준 꼴이었어요. 최소한 표국이나 별저만이라도 다른 이에게 맡겼더라면…….”

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편지를 매만지며 잠시 묵묵히 서 있던 사영이 말했다.

“……그런데, 스승님이 섬서성에 계시단 사실을 숨겨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왕정은 무공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했고, 외부와 많이 접촉하는 위치에 있으니 마교에서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지위일 거예요. 그런 이에게 계획의 모든 일을 알려 주는 수뇌는 없지요. 짐조가 어디에 풀릴지 모르는 상태로 섬서성의 중독 계획만을 알고 있었다면…… 약선 대협을 경계했을 만도 해요.”

“스승님을 경계하다니요?”

“약선 대협은 이미 마교에 대항하여 광천마제를 봉인하신 전적이 있고, 짐조의 독을 해독하실 능력도 있잖아요. 설령 능력이 있으시단 걸 몰랐더라도 충분히 주시할 만해요. 섬서성 전역을 중독시킨다는 커다란 음모가 우연히 나타난 독공 고수 때문에 망가지면 안 되니까요.”

“스승님이 대규모 중독 사태를 단박에 해결하실 수도 있는 것과 하오문의 별저에 머무른 사실을 은폐한 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차하면 전력을 동원해서 대협을 막으려 했을 테고, 가장 좋은 방향은 그대로 더 나아가 대협을 해치는 것이었겠지요. 이 계략이 성공했을 경우 대협의 행적을 내게 들키면 곤란해지리라 생각했을 거예요. 행선지를 숨길 이유는 이것밖에 없어요.”

성역을 자극당한 사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벌어지지 않았고, 벌어질 리도 없는 과거의 가정이었지만 듣기만 해도 기분이 상했다.

“시기는 조금이라도 엇갈리는 편이 좋기도 하고…… 아무래도 대협을 제압할 가능성이 낮기도 하니 서신은 온전히 보냈을 거예요. 대협께선 별저에 머물고 있다는 말씀도 따로 하지 않으셨잖아요.”

“……예, 그런 문장은 없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약선 대협께선 늘 중요한 용건만 간결히 말씀하시니까요.”

“……도대체 어떻게 스승님을 해할 수 있다고 여겼을까요?”

“그만한 무력을 지원받았거나…… 나였다면 곧 풀릴 예정이었던 짐조의 독을 이용하려 했을 거예요. 독 난리가 시작되면 큰 혼란이 뒤따를 테니, 대협을 미행하다가 그 틈에 뭐라도 해 볼 생각이었겠죠.”

정확한 경위는 그 인간을 데려와 낱낱이 잡아 뜯어야 알아낼 수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현재의 가설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진 않았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답답한 한숨을 내쉰 사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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